장재형목사, 신학적 성찰: 낮고 곤고한 자리를 비추는 은총과 유기적 지체론

로마서 12장 4~8절: 각자 받은 선물로 서로의 침묵을 채우는 신령한 성전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명작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면을 관통하는 거룩한 빛은 화려한 왕관을 쓴 권력자의 정수리가 아니라, 대지의 거친 숨결을 마시며 허리를 낮게 굽힌 여인들의 손끝에 가장 오랫동안 머뭅니다. 추수가 끝난 거친 들판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 흘리고 간 낱알과 흩어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그 숭고한 노동의 몸짓은, 하나의 공동체가 어떻게 이름 없는 이들의 조용한 수고와 헌신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파고드는 로마서 12장 4-8절의 말씀 역시, 우리를 저 화려한 지상의 높은 보좌가 아니라 가장 낮고 겸비한 자리로 이끌어 교회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교회는 결코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느슨하게 모여 있는 사교적 집합체가 아닙니다.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신비롭고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루며,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고유한 은사(Charisma)를 통해 서로의 연약함을 살려내고 붙들어주는 신령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이 묵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성적인 개념이나 추상적인 감동의 유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무거운 삶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려는 구체적인 행함이자,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실체적 형체가 됩니다.

1. 은혜는 한 몸 안에서 서로의 낮은 자리로 흐른다 (로마서 12:4~5)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참된 교회의 양식은 차갑고 경직된 관僚주의적 제도가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적인 정과 취미를 공유하는 느슨한 친목 단체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 수많은 지체가 존재하고 그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듯, 교회 안에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과 다채로운 기능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 안에서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은 분열과 갈등의 빌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저울로는 눈에 띄는 화려한 은사도 있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깊은 음지에서 조용히 감춰진 섬김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주권적으로 배치하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체(肢體)’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영적인 심연과 그 무게를 오랫동안 묵상하게 만듭니다. 몸의 지체는 필요할 때 잠시 붙였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떼어내 버리는 기계의 부품이나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피와 생명을 실시간으로 함께 나누어 공급받는 신비로운 유기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여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옆에 있는 지체들과도 힘써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타인과 절絶된 채 홀로 상아탑 속에 갇혀 도달하는 고립된 자기 완성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는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거나 그의 영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 전체를 온전케 하고 약한 자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아래로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의 위탁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빛깔과 모양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언제나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정렬해 있습니다。그 방향은 오직 십자가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고, 그 연대의 과정 속에서 천국의 생명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이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작고 사소해 보이는 역할들을 완전히 새로운 신령한 눈으로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의 눈물의 기도, 거친 서류를 정리하는 묵묵한 행정,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부엌에서 땀 흘리는 손길,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차가운 손を 잡기 위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그리스도의 몸의 움직임 안에서 결코 변두리나 주변부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화려한 무대 중심에 선 소수의 영웅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 몸을 지탱하기 위해 허리를 굽힌 이름 없는 성도들의 신실한 수고를 통해서 가장 따뜻하고 선명하게 세상에 증언되기 때문입니다.

2. 비교의 소음が 멎을 때 믿음은 은사를 바르게 쓴다 (로마서 12:3, 6)

하나님의 거룩한 은사가 공동체와 개인에게 임할 때,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치명적인 영적 유혹이 고개를 듭니다。하나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은근히 과시하며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주어진 은사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하하며 냉소와 절망에 빠지는 열등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인간적인 소음을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엄히 꾸짖으며 영적인 질서를 다시 정돈합니다。은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스펙이 아니며, 누군가에 대해 주눅 들어야 할 열등감의 근거도 아닙니다。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과 은혜의 분량을 따라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게 나누어 주신 거룩한 선물일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특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사도의 권勉을 통해 은사의 영적 질서와 겸손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예언이나 가르침처럼 대중 앞에서 돋보이고 두드러져 보이는 은사일수록, 자기 확신이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한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질서 안에서 철저히 통제되어야 합니다。아무리 탁월한 하늘の 능력이라 할지らい, 그것이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세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통ロ로 전락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을 살리는 사랑の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찢는 날카로운 흉기가 됩니다. 은사의 외적인 크기나 화려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사용하는 내 내면の 자아가 지금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영적 실제의 문제입니다.

이 엄숙한 지점에서 성도가 마주하는 회개는 단순히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감정의 정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일시적으로 맡겨진 주님의 선물을 내 이름의 사유재산으로 꽉 붙잡았던 탐욕의 손を 펴고, 다시 온 몸의 유익과 형제의 살아남을 향해 전 존재의 스탠스를 바꾸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Metanoia)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의 분량과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겸손의 토양 위에서 가장 정결하고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경 묵상은 매일 아침 우리의 양심을 향해 날카롭고도 고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통해 필사적으로 나를 증명하고 내 성을 쌓으려 하는가, 아니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조용히 수건을 두르고 낮은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사가 인간의 가공되지 않은 고집이나 정제되지 않은 명誉욕과 결합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쉽게 영적 무질서와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가르치는 은사가 사사로운 지식의 자랑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다스리는 은사가 부지런한 책임과 헌신을 잃어버린 채 권력의 행사가 되며,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공동체적인 덕보다 자기의 영적 영리함을 앞세울 때,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성도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족을 안기는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거룩한 흐름은 우리의 능력이나 사역의 규모 자체를 묻기 전에, 우리의 내면적 태도와 영혼의 중심을 더 깊이 심문합니다。철저한 자기 부인의 순종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허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에만 은사는 비로소 교회를 진정으로 살려내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내 입술의 감사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자각은 내게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탐내지 않게 만듭니다。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화려한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마음이 시기와 질투로 굳어질 때, 공동체는 서서히 천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은 치열한 경쟁과 서열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에게 이 과분한 자리를 맡겨주신 것을 온전한 은혜로 인정하고, 나보다 더 탁월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다른 지체의 은사를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법정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고 함께 세워져 가는 거룩한 집, 즉 교회의 소망이 됩니다. 회개의 진정한 열매는 결국 내 자리를 정확히 아는 겸손과, 다른 지체의 존재를 존귀히 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섬김과 권면과 긍휼이 복음의 살결이 되다 (로마서 12:7~8)

로마서 12장 6절에서 8절에 나열된 수많은 은사들은 결코 구름 위에 떠 있는 추상적인 신학 사조나 관념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구체적인 살결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침입니다。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실제적인 결핍과 아픔을 예민하게 살피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부지런한 손과 발이 되는 것이며, 가르침은 인간의 현학적인 철학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사도적 진리를 왜곡 없이 바르게 전수하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또한 권면은 율법적인 정죄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낙심하고 절망한 영혼의 곁에 묵묵히 찾아가 함께 앉아, 그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거룩한 동행입니다.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이것들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구변이나 말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실제적 현실로 시각화하는 강력한 통로들입니다。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실함과 순전함이어야 합니다. 다스림은 자기가 가진 영적·행정적 권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곳을 먼저 살피고 책임을 지는 부지런한 헌신이어야 합니다。그리고 긍휼은 병든 자, 외로운 자, 그리고 인생의 모진 풍파에 치여 신음하는 자들을 향해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손길입니다。

이 모든 천국의 은사들은 결코 서로 더 높아지기 위해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오케스트ラの 악기들처럼, 가르침이 진리의 빛으로 갈 바를 밝히면 섬김은 그 빛이 비추는 길 위를 묵묵히 걸으며 현장을 지탱하고, 권면이 지쳐 쓰러진 영혼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면 구제는 그 영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의 실제를 손에 쥐여줍니다。이처럼 은사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깊고 넓은 복음의 표정을 짓게 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 구체적인 섬김의 손길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매하고 뛰어난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구체적인 발을 얻지 못하고 공허한 지식으로 굳어질 것입니다。또한 지친 영혼을 향한 따뜻한 권면과 위로가 사라진다면, 아무리 조직이 체계적이고 건물이 거대할지라도 낙심한 사람은 공동체라는 거대한 인파 속에서 철저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며 홀로 죽어갈 것입니다。더 나아가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애끓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입술로 외치는 ‘은혜’라는 거룩한 단어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찢어진 심장 곁에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지 못하는 차가운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은사는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빛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풍파を 막아내는 복음의 튼튼한 성벽이 됩니다。

이 설교가 정직하게 비추는 교회 공동체의 참모습은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캐리어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전시장이 결코 아닙니다。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본질적 죄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여,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고 살려내는 자비의 집(Bethesda)입니다。공동체 안에서 어떤 은사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의 영역에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하찮거나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어떤 은사가 대중 앞에 중요하고 거대해 보인다고 해서 그 은사를 가진 개인이 홀로 교회를 독점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교회는 완벽하고 강한 자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깨어짐과 부족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촘촘히 잇고 기워가는 신비로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4. 산 제사의 자리에서 소망은 일상의 예배가 된다 (로마서 12:1)

로마서 12장에서 사도가 쏟아내는 은사 공동체의 유기적 원리는,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그 참뜻이 살아납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는 거룩한 소명(Vocation)입니다。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일주일 중 특정한 한 시간, 구별된 종교적 공간의 장막 안에만 갇혀 있는 박제된 의식이 결코 아닙니다。그것은 주일 예배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육체와 삶의 전 영역, 즉 우리의 매일의 일상과 선택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거룩한 방향성이자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받은 은사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잠시 경건한 모양으로 빛나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일시적인 종교적 역할극이 아닙니다。그것은 내가 발を 딛고 살아가는 가장 세속적인 공간인 가정과, 치열한 생존의 경쟁이 벌어지는 일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의 생명력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성도의 삶 전체에 대한 거룩한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은 이 시대 공동체의 소망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일으켜 세웁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법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외적인 스펙과 성과로 등급을 매겨 평가하고, 끝없는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어 소외를 조장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위로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서로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세워주는 전혀 다른 천국의 대안적 질서를 이 땅 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맡겨진 말씀의 은사로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방향을 새벽녘 등대처럼 밝히고,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김으로 사역의 거친 현장을 묵묵히 온몸으로 지탱하며, 또 누군가는 뜨거운 권면과 애끓는 긍휼의 손길로 세상에서 상처받아 무너진 지체의 마음을 붙들어줍니다。그렇게 서로의 다른 은사들이 인간의 계산을 지우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촘촘히 이어질 때, 교회는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소외된 영혼도 외롭게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품어주는 하늘의 진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 공동체는 세상이 사용하는 권력과 마케팅의 방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심장에 복음의 충격을 던집니다。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정죄보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회복을 먼저 가슴에 품고, 자기 자신의 영적 의를 세우기보다 연약한 다른 이의 삶의 무게와 눈물을 함께 짊어지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깨어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매일의 삶으로 증명해 보입니다。로마서의 위대한 서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은사 공동체의 핵심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은사는 나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목에 거는 화려한 보석 장식품이 아니라, 죽어가는 교회와 이 어두운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왕이신 주님께서 내게 잠시 맡겨주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설교가 가리키는 참된 교회의 종착지는 그래서 마침내 ‘이 땅 위에 도래한 천국의 모형’이라는 장엄한 표현에까지 다다릅니다。이 선언은 교회가 아무런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도피성이나 비현실적인 이상향(Utopia)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여전히 허물 많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오직 예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통치 안에서 서로의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하늘 질서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미리 배우고 연습하는 은총의 훈련소라는 뜻입니다。

비교와 시기 대신 존중과 축복이, 율법적인 정죄와 배격 대신 보혈을 통한 용서와 회복が, 고립된 이기주의 대신 끈끈한 상호 의존의 연대가 지체의 삶 속에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의 길을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연대의 자리에서 우리의 소망은 저 먼 미래의 구름 위에 떠 있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숨 쉬는 형제를 살려내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는 은사의 종국적인 방향성이 개인의 영적 성취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살아나는 십자가의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번 엄숙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주님의 요청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단지 주일 오전의 거룩한 종교적 언어와 예배당의 의자 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성가신 가사 노동과 갈등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 거짓과 타협이 판치는 일터에서 손해を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내는 정직, 공동체 안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무언의 섬김, 그리고 행색이 초라하고 약한 이를 향해 내 주머니를 열어 다가가는 애틋한 긍휼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의 은사가 사사로운 소유를 떠나 하나님께 온전히 연락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제단입니다。 이러한 작은 순종들이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리 없이 반복될 때, 교회는 세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게 자라나고, 세상은 그 조용한 영적 지각변동 속에서 마침내 썩어지지 아니할 복음의 진정한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결어: 새 아침을 깨우는 영적 예배의 질문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조용하고 강력합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은사를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타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내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자아의 바벨탑입니까, 아니면 머리 되신 주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 입은 지체의 발을 씻기며 한 몸을 살려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십자가의 자리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거친 광야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고립된 영웅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필연적인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나의 보이지 않는 작은 양보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과, 이름 없는 순종이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거창한 사역의 성공을 외치기 전에, 이미 내가 서 있는 그 평범한 일상의 척박한 자리에서 천국을 향한 영적 예배의 장엄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davidjang.org

fisherofman.kr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본 ‘핍박을 이긴 교회의 비밀’

명암의 미학: 가장 칠흑 같은 밤에 떠오르는 빛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의 화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조법)’ 기법 속에서 빛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찬란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배신, 상처, 혼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캔버스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은, 우리에게 진짜 구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웅변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데살로니가전서 1장 역시 이러한 영적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경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평온한 시대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복음의 야성’을 일깨웁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결코 안락한 휴양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조롱과 적대감이 빗발쳤고, 정치적·사회적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는 영적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고통의 현장을 보며 탄식하는 대신 ‘감사’를 먼저 내뱉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안전할 때가 아니라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본질을 증명하며, 복음은 박수갈채 속에서보다 핍박의 불길 속에서 더 순전하게 정제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세 가지 엔진: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순히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의 문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외부 압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의 내부 설계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복음의 지침서’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세 가지 핵심 동력을 기억했습니다.

핵심 가치성경적 표현신학적 실천 (장재형 목사 강해)
믿음 (Faith)믿음의 역사지적 동의를 넘어 삶을 송두리째 움직이는 ‘에너지(Energeia)’
사랑 (Love)사랑의 수고감상적 유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해산의 고통(Kopos)’
소망 (Hope)소망의 인내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게 하는 ‘거룩한 견인(Hypomone)’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는 단순한 교리적 수긍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이것은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그 능력의 원천에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 권능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였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로마의 칼날 앞에서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실재(Reality)였기에 핍박을 뚫고 빛을 발했습니다.


정보가 아닌 능력: 데살로니가 교회의 ‘급속한 성숙’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경이로운 점은 **’그 고난 한복판에서 무엇을 붙들었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화술’이나 ‘세련된 이론’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으로 정면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짧은 양육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성장했고, 오히려 주변의 다른 교회들에 영적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권능’을 다시 묻습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으로 강해지는가? 거대한 규모인가, 세련된 제도인가, 혹은 안락한 분위기인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보가 아닌 **능력(Dunamis)**으로 받을 때만 강해집니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 신앙이 이론을 넘어 실제 삶의 현장에 침투할 때, 어린 공동체는 제국의 압박을 압도하는 성숙함을 입게 됩니다.


상처 난 틈새로 흐르는 은혜의 향기

우리는 흔히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가 보여주는 역설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는 안락한 소파 위보다 거친 광야에서 더 밀도 있게 임합니다. 시대마다 박해의 모양은 달랐지만, 복음을 향한 세상의 적대감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2천 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나 제도의 견고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의 능력’**이었습니다. 핍박받는 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의 향기가 스며있습니다. 그들의 견고한 믿음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깊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전염성을 가집니다.

결국 교회를 지키는 것은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꿈동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 믿음이 사랑의 수고를 낳고, 그 수고가 다시 공동체의 뼈대를 세우며, 그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복음의 향기를 세상 끝까지 흘려보내는 발원지가 됩니다.


재림 소망: 도피가 아닌 ‘거룩한 견인’의 닻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신학적 정점은 결국 재림 신앙으로 귀결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기록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완결성이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Parousia) 안에서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입니다. 재림 소망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 승리의 확신: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 인내의 근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끝내 승리하게 하신다는 확신.

초대교회가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던 것은 절망을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승리가 이미 주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승전가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재림이 날짜를 맞히는 퀴즈가 아니라, 오늘을 가장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게 만드는 **’현재 진행형의 동력’**임을 일깨웁니다. 진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더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 더 인내하며, 오늘 더 충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지킵니다.


기도의 연금술: 중보로 빚어지는 공동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눈물 젖은 기도, 중보의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거룩한 기억 속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납니다.

특히 핍박의 시대일수록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련을 겪는 지체들을 위해 영적으로 연대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범은 2026년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를 이 지점으로 이끄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성’이 아니라, **’복음을 능력으로 받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쉼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2-10절의 메시지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핍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부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종말적 소망의 합주”**입니다. 상황이 편안하지 않을 때 교회가 더 단단해지고 복음이 더 힘 있게 증언되는 이 거룩한 역설은 초대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믿음이 과연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엄중히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 믿음의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까?
  • 사랑의 수고가 공동체 안에 흐르고 있습니까?
  • 소망의 인내가 당신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가 다시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교회다워지고 복음은 세상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강해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은혜로 남는 이유입니다.

fisherofman.kr

davidjang.org

빌립보서 2장에서 찾는 교회 갈등의 해법: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강해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감정의 언어를 내뱉을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언어로 서로를 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통해 볼 때, 교회 갈등의 해소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겸손’이라는 영적 체질 개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개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은 ‘내가 맞다’는 확신이 ‘상대는 틀렸다’는 공격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바울은 누가 옳은지 판가름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며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킵니다. 갈등 속에서 시선이 바뀌면 언어가 변하고, 비로소 관계의 방향도 수정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서신, 그 속에 감춰진 공동체의 아픔

빌립보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이 감옥에서 쓰인 ‘옥중서신’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갇힌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은 시종일관 기쁨(Rejoice)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기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복음의 결과물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고통은 감옥의 냉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회의 분열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며 공동체의 연합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교회가 무너지면 복음의 전진도 멈춘다는 영적 위기감을 반영한 목회적 탄식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우리가 화려한 예배 형식에만 치중한 채, 성령의 교제와 사랑의 위로가 사라지는 내부의 균열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날카롭게 묻습니다.

관계와 환대로 시작된 교회, 조직과 파벌로 변질되다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빌립보 교회의 태동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히 로마화된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복음은 가치관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울이 강가 기도처에서 만난 루디아와 여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이 ‘하우스 처치’가 된 사건은 초대교회가 제도적 조직이기에 앞서 관계와 환대로 숨 쉬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헌신과 눈물, 기도로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이러한 초심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딱딱한 조직이 되고, 조직은 이내 파벌로 갈라지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동역의 깊이만큼 깊어진 상처

빌립보 교회 탄생에 핵심적이었던 여성들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른 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에서 피할 수 없는 긴장이라고 분석합니다. 사역이 깊을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동일한 무게로 양쪽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이는 법적인 판결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처방입니다. 교회는 죄를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자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닮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자비가 권면의 본질입니다.


갈등을 녹이는 네 가지 영적 토대

빌립보서 2장 1절이 제시하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는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 권면: 잘못을 파헤치는 칼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의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설득입니다.
  • 사랑의 위로: 상대를 정죄하기 전에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복음적 온기를 부여합니다.
  • 성령의 교제: 인간적인 타협을 넘어, 상대를 ‘문제’가 아닌 ‘기도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 긍휼과 자비: 징계의 언어로 얼어붙은 공동체의 기류를 다시 녹여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 하라”는 의미는 성격이나 취향의 통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각자의 위치를 조정하는 ‘방향성의 일치’입니다. 나를 변호하고 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본능적 계산서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실재적 능력입니다.

케노시스: 내려감이 곧 새로움의 길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갈등의 해법을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연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비움(Kenosis)’의 신비는 우리가 왜 낮아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분쟁의 원인은 대개 ‘내가 낮아지면 손해 본다’는 두려움에 있지만, 복음은 낮아짐이 곧 구원의 방식임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듯, 교회 안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믿는 행위입니다. 분쟁의 순간에 상대의 얼굴이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해결의 시작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투영된 화해와 치유의 미학

  •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란스러운 제자들 사이에서 고요를 유지하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중심을 권력이 아닌 십자가에 둘 때 분열은 멈춥니다.
  •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어린양의 희생은 우리가 취향이 아닌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가족임을 일깨웁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죽은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비애는 갈등으로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죄가 아닌 공감의 언어임을 시사합니다.
  •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식적인 위로보다 더 깊은 치유를 선사합니다.

회복의 실제: 말의 속도를 늦추고 경청하라

실질적인 회복은 언어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갈등 상황에서 말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은 그를 형제로 인정하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경청을 통해 자신의 확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때, 권면은 비로소 길이 됩니다. 또한 중재자는 재판관이 아닌 목자의 심정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화해의 문은 닫힙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배타적인 정결함이 아니라, 회개를 가능케 하는 포용적 자비에서 증명됩니다.


십자가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식은 지체의 통증을 함께 느끼는 교회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 분쟁 해결은 몇몇 사람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관계 맺는 법을 다시 배우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결국 빌립보서 2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침묵을 강요할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찾아옵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주님을 드러내려는 용기, 이기려는 마음 대신 살리려는 마음이 공동체의 공기를 바꿉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로 묶는 매듭입니다. 이 복음의 흐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때, 모든 갈등은 힘을 잃고 공동체는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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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낚는 어부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 복음의 향기가 되다 – 장재형 목사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 사건을 다룬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의 신비와 가롯 유다의 비극, 그리고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베다니 여인의 헌신을 신학·예술·음악·고전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해설한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과거 상처와 격리의 공간이 은혜와 감사의 식탁으로 변한 복음의 심장을 드러낸다. 이 자리로 이름 없는 여인이 들어와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께 쏟아 붓는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와 미래 전체를 내어놓는 결단이자,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넘어선 “사랑의 과잉”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랑을 “허비”로 규정하며 계산한다. 요한복음은 그 목소리의 중심에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비난이 진정한 정의감이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폭로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과 허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격표와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복음서와 예술·음악 속 대비(유다의 불편함과 마리아의 헌신)와 연결해 설명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제자들의 항의 합창 뒤에 예수의 “그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는 선언을 배치하듯, 예수는 이 허비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재해석한다.

여인의 행동은 순간적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직감한 영적 통찰이다. 향유는 장례용 향료였고, 여인은 다가올 죽음을 앞당겨 미리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다. 이 무모한 사랑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기 몸을 깨뜨리고 피를 쏟으실 운명의 예표이기도 하다. 설교는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로 흐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효율과 합리를 넘어선 “비효율적 풍성함”임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효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보다 먼저 기준이 될 때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유다적 합리성’에 포획되는지 경고한다. 예배·헌신·재정·사역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성과와 효율의 언어를 우선시하고, 사랑이 식을수록 계산은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비합리적 행동을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이야기가 함께 기억될 것이라 약속한다. 그의 설교는, 제도·기관·사역을 세우는 자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베다니 여인의 무조건적 사랑을 잃는 순간 유다의 계산과 다르지 않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본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인가, 허비라 비난하는 제자인가, 아니면 사랑의 현장을 불편해하며 결국 등을 돌린 유다인가. 주님의 사랑이 실제 사건으로 내 안에 자리할 때, 우리는 계산을 멈추고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을 기꺼이 찾아오신 사랑, 그녀를 변호하신 사랑, 배반할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신 사랑은 모두 ‘허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허비가 아니었다면 복음도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아까워하며 붙들고 있는가”로 바뀐다. 시간이든, 재정이든, 안전한 미래든, 베다니 여인의 옥합은 결국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할 삶의 상징이 된다.

예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다. 베다니의 향기는 이미 시몬의 집을 채웠고, 이제 우리의 일상과 예배 속을 채우기를 기다린다. 사랑을 허비라 부르지 않고 기쁨으로 선택하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세상 앞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증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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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경영대학원 박사학위 승인 획득 프로그램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캘리포니아 주 사립 고등 교육국(BPPE)이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박사 학위 제공을 승인했습니다. 이 학위는 경영학 프로그램을 전공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박사 학위 프로그램은 경영학 학사 학위의 우수한 졸업생과 MBA 프로그램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며, 학생들을 학계 및 경영학 연구 분야에서의 경력을 쌓도록 준비합니다.

Olivet Business School의 경영학 박사 과정은 엄격한 연구와 혁신적인 통찰력 형성을 목표로 하며, 학생들이 최고 수준의 교육 기관에서 모범적인 교사가 되도록 장려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후보자들은 경영, 시장, 재무, 조직 등과 관련된 넓은 주제를 조사하며, 비즈니스 실무와 관련된 경영 이론과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에 중점을 둡니다.

올리벳 경영대학원의 제이콥 채터지 학장은 이 프로그램의 승인이 학생들의 노력과 학문적 우수성을 증명한다며, 이제 학생들이 변화하는 경영학 세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더욱 강력하게 준비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학교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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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JCM MIDI 과정은 학생들이 자신의 노래를 출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Jubilee College of Music(JCM)에서는 겨울학기에 맞춰 MIDI(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관한 음악 제작 과정을 새롭게 개설했습니다.

MIDI는 현대 음악가와 프로듀서들에게 균형 잡힌 도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MIDI 노트 작성, 오디오 트랙 녹음, 다양한 종류의 가상 악기 설치 등 음악 제작의 기초를 소개합니다.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AW)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곡을 작곡, 편곡하고 출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것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인 Coco Chang은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MIDI 기술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악기 선택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에 대한 취향을 개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코스 강사인 Jerry Park은 모든 JCM 학생들이 기독교 예술가로 성장할 것이며, MIDI 코스가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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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수업에서 학생들이 사역 준비 상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설계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겨울 분기가 시작되면서 OSAD(Olivet School of Art and Design)의 2021년 학생들은 6월 졸업에 맞춰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과정의 정규 MA 외에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는 OSAD 졸업 요건 중 하나입니다. 2분기에 걸쳐 진행되며, 각 학생은 웹 디자인, 브랜딩, UI/UX 디자인, 제품 모형 등 전문 분야 하나에 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은 사역과 협력하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궁극적으로 발표 가능한 제품을 생산하게 됩니다.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에서 성공하려면 학생은 그래픽 디자인 과정 석사 과정에서 다루는 실용적인 디자인 기술을 숙달해야 합니다. 또한,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은 프로젝트 관리, 연구,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교육을 통해 점차적으로 아트 디렉터의 역할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OSAD 프로그램 디렉터인 Rodem Hwang은 “우리는 학생들이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위해 교회, 파라처치 조직, 기업 또는 교육자와 긴밀히 협력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들은 디자인을 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사역에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OSAD는 2021년 졸업생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이번 여름에 결실을 맺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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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대표단, ABHE 연례 회의 참석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진젠도르프 박사과정에 전세계 학생들 참여

장재형목사 설립 올리벳대학교 리버사이드 캠퍼스 최신 랜더링 공개

장재형목사 설립 OTCS 기독교 변증학 과정 신앙의 이유 탐구

사람을 낚는 어부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SMC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대한 연간 커리큘럼 검토를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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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OSMC)은 여름 분기에 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연례적인 커리큘럼 검토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검토를 통해 검토 위원회는 최신 업계 표준을 반영하여 몇 가지 주요 변경 사항을 제안하였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보다 전문적이고 기술 중심적인 교육 모델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전히 저널리즘과 보도의 기본 원칙은 유지되지만, 학생들은 텍스트, 사진, 비디오, 그래픽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학습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특정 매체에 초점을 맞춘 보다 심층적인 교육 과정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또한, 새로운 커리큘럼은 최신 장비와 생산 시설을 활용하여 보다 현실적인 학습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업계에서 요구하는 벤치마크에 맞춰 전문 장비에 대한 교육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를 들어, Associated Press는 최근 Sony 이미징 제품을 전 세계 시각 저널리스트에게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미러리스 카메라는 학생들의 작업에서 표준 장비로 사용될 것입니다.

또한, 정보 기술을 적용하는 새로운 학습 트랙이나 인증 프로그램도 도입될 예정입니다. 학생들은 빅 데이터, 인공 지능(AI), 가상 현실(VR) 제작, 라이브 스트리밍 등과 같은 최신 주제를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심사위원회는 특정 교과목 교수진 및 컨설턴트들과 추가 회의를 거친 후 다음 달에 새로운 교육과정 초안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변경 사항은 학생들에게 보다 현실적이고 산업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여 미디어 및 저널리즘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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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David James Randolph 도서관 개조 진행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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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OSMC)은 David James Randolph 도서관 개조 진행 상황을 보고합니다.

OSMC 학장인 David James Randolph 박사의 이름을 딴 도서관은 발표된 이후 OSMC는 도서관 설립을 위해 2,000평방피트의 공간을 지정했습니다. David James Randolph 도서관의 비전은 미디어와 예술 분야에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을 양성하는 데 유용한 자료에 대한 접근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미디어 업계와 관련된 서적, 저널, 멀티미디어, 기술 매뉴얼 및 기타 관련 자료 모음이 꼼꼼하게 선별되고 있습니다. 도서관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열방과 군중이 예수의 이름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보다 먼저 온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건축가 팀은 도서관의 기능에 맞는 설계 및 건축을 고안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컴퓨터로 렌더링된 3D 이미지는 도서관의 내부 및 평면도를 보여줍니다. 미니멀리스트 미학은 넓고 깔끔한 환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공간에는 목재 바닥재, 책장, 학습 공간용 가구가 배치됩니다.

빈 공간을 쓸모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건축 프로젝트는 아름다운 나무 바닥을 깔고 벽을 새로 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가구와 장비는 점차 추가될 예정입니다. 개관식 및 봉헌식은 2022년 1분기 공사가 완료되면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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