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강론: 십자가의 참혹한 고발과 부활이 열어젖힌 영원한 생명의 빛

이탈리아 바로크 거장 미켈란젤로라 카라바조의 명작 〈의심하는 도마〉를 마주할 때, 우리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온화하고 영광스러운 얼굴빛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룩한 분의 육신에 여전히 깊게 남아 있는, 고통스러운 상처의 자국을 잔인하리만치 선명하게 꿰뚫고 지나가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날카로운 빛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진수인 부활이란, 과거의 뼈아픈 상처나 십자가의 고통을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마냥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단순한 마술적 각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의 악한 권세가 가한 죽음의 흔적과 패배의 증거들을 고스란히 온몸에 품은 채, 마침내 죄악과 사망의 견고한 진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생명이 영원히 승리했음을 온 우주에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영적 반전입니다.

미국 올리벳 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가 깊이 있게 풀어낸 사도행전 3장 강해 설교 역시, 인간의 역사 속에서 결코 은폐하거나 가볍게 건너뛸 수 없는 우리의 부끄러운 죄의 흔적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듭니다.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다”라는 사도 베드로의 서늘하고도 뼈를 찌르는 역사적 고발과 양심의 책망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통과한 비로소 그 순간에야,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라고 외치는 부활의 복음이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생명의 빛을 찬란하게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깊은 은혜의 말씀이 시작되는 태곳적 출발점에는 한 평범한 인생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놀라운 치유의 현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단 한 번도 자기 힘으로 걸어본 적이 없던 한 사람이 있었고,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 속에서 무려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성전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며 비참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권세의 이름이 선포되는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했고, 감격에 겨워 뛰며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찾은 수많은 군중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광경에 압도되어 베드로와 요한을 향해 경외의 시선을 집중할 때, 사도 베드로는 즉시 그들의 오해 어린 시선을 단호하게 가로막으며 가감 없이 돌려세웁니다.

그 위대한 사건의 진정한 중심은 어떤 인간이 지닌 비범한 영적 권능이나 종교적 경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승리를 거두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거룩한 이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베드로의 설교는 단순한 신비로운 현상을 설명하는 가벼운 해설의 차원을 완전히 뛰어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과연 무엇을 선포해야 하는지 본질을 밝히는 가장 엄숙하고 감격스러운 복음의 선언으로 승화됩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시각적으로 확인되는 가시적인 회복은 더 깊은 차원의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 젖히게 됩니다. 그리고 한 연약한 사람의 두 발이 온전케 되는 것에서 시작된 작은 이야기는, 죄와 사망의 무거운 멍에 아래 신음하는 온 인류를 향해 구원의 소망을 외치는 부활의 거대한 대서사시로 한없이 확장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놀랍고 시각적인 기적 앞에서 언제나 쉽게 걸음을 멈추고 감탄하기 마련입니다. 평생을 걷지 못하던 선천적 장애인이 자신의 힘으로 두 발로 꼿꼿이 일어나는 순간은 너무나 충격적이며, 그 치유의 현장에 직접 개입하여 도구를 삼은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어쩌면 인간적인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군중을 향해 단호하게 묻습니다.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인간적인 영광을 한 치도 헛되이 받아들이지 않고, 그 모든 눈부신 스포트라이트를 본래의 자리인 그리스도께로 온전히 되돌려 놓습니다. 즉, 기적 그 자체는 목적지가 아니라 모든 빛의 근원이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가리키는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표지에 불과함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성경적 장면을 깊이 조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하나님의 일꾼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자기 이해와 영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강조합니다.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역자는 자신이 마치 구원의 메시지를 소유한 주인인 양 교만해져서는 결코 안 되며, 오직 은혜의 소식을 증언하는 신실한 증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단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외형적인 규모가 거대하게 커지고, 화려한 프로그램들이 도입되며, 막대한 재정이 확충되고 다양한 대외 사역들이 활기를 띤다 할지라도, 만약 그러한 인간적 성취들이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가리게 된다면 본래의 목적과 수단이 완전히 뒤바뀌는 영적 역전 현상이 일어나고 맙니다. 이 땅의 교회가 품고 있는 가장 고귀하고 유일한 보물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세상적인 성공이나 거창한 업적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자이신 주님께서 친히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 그 자체뿐입니다. 베드로가 군중을 향해 던진 질문 속에는 깊은 영적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사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치유를 받은 것은 분명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놀라운 일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기적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십자가와 부활이며, 그 복음의 능력 위에 성령의 강림과 함께 교회가 이 땅에 세워졌다는 영원한 사실입니다. 작고 가시적인 기적을 통해 인간은 그 배후에 숨겨진 훨씬 더 광대하고 완전한 구원의 역사를 바라볼 때 비로소 표적은 자신의 진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기적은 결코 복음을 가리거나 대신할 수 없으며, 오직 그 표적이 가리키는 방향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세상에 폭로할 뿐입니다.

오늘의 현대 교회 역시 정확히 이와 동일한 본질적인 질문 앞에 엄중하게 선다. 우리의 말과 사역은 과연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어디에 머물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탁월한 언변이나 교회의 업적을 바라보게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라는 존재를 온전히 통과하여 오직 홀로 영광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바라보도록 돕고 있는가. 영적 겸손이란 자신을 한없이 비하하며 위축되는 거짓된 태도가 아니라, 나에게 쏠리는 모든 칭찬과 영광의 시선을 단호히 거두어 오직 생명의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명확한 방향 감각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는 듣는 이들의 양심을 찌르고 깊은 불편함을 안겨주는 뼈아픈 진실을 결코 교묘하게 피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청중들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매몰차게 부인했으며, 잔인한 살인범의 석방을 요구하는 비열함을 보였고, 마침내 우리 영혼의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끔찍한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만약 이러한 준엄한 고발이 단순히 까마득한 옛날 고대 예루살렘 성전에 모였던 군중들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라면, 십자가 사건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먼 나라의 역사적 유물로 전락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적 메시지는 그 예리한 정죄의 문장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개개인의 성도들의 삶 한복판으로 고스란히 가져와, 바로 나의 은밀한 죄악들이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무관하지 않음을 통렬하게 깨닫게 만듭니다.

인간의 추악한 죄악을 정직하게 직면하지 않은 채 오직 무조건적인 은혜만을 속삭인다면, 복음은 진정한 능력을 잃어버린 채 싸구려 위로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큽니다. 반대로 인간의 죄가 가진 무거운 절망감만을 강조하고 그 뒤에 예비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영원한 정죄와 어두운 절망의 감옥에 갇히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이 양쪽의 위험한 극단을 단 하나의 강렬한 접속어로 완벽하게 돌파해 냅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러나”라는 거룩한 반전의 단어입니다. 이 접속어는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과 그 비참함을 조금도 축소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추악한 인간의 죄가 인류 구속 역사의 마지막 문장이 되도록 결코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은 결국 생명의 주를 직접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영원한 사망의 실수를 저질렀으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인류가 스스로의 손으로 십자가의 못을 박으며 영원히 닫아버렸다고 생각했던 생명의 문을,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으로 친히 다시 열어 젖히셨던 것입니다. 이 놀라운 반전은 우연히 역사 속의 어쩌다 발생한 돌발적 결말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모세와 사무엘을 비롯한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대대로 약속되어 온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경륜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벽하게 성취된 영광스러운 사건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말없이 고난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던 예수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온전히 통과하신 후 궁극적으로 지극히 영화롭게 되셨음을 힘차게 선포합니다. 진정한 복음은 인간의 수치스러운 죄를 결코 덮어두거나 숨기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무한하고 측량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크다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나의 연약함과 실패를 막연히 부정하는 값싼 낙관주의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깊고 어두운 절망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열어 놓으신 부활의 생명의 길을 굳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느끼는 철저한 정직함과, 부활을 향해 타오르는 영원한 소망은 신앙의 여정에서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한 몸과 같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청중들을 향해 “너희가 알지 못하여 그리했다”라고 그들의 무지의 연약함을 언급하지만, 결코 그 무지를 죄를 합법적으로 짓게 만드는 면허증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제 진리의 빛이 그들의 눈앞에 밝히 드러났으므로, 과거의 삶에서 돌이켜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참된 진리의 깨달음이란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하게 만드는 단순한 지식의 유희가 아니라, 방황하던 삶의 근본적인 노선을 영원한 생명의 방향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는 거룩한 빛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란 자기 자신을 끝없는 자책과 정죄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 무기력한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주를 등지고 세상으로 향했던 영혼이 다시 그 따뜻한 품을 향해 온몸과 마음을 돌이키는 생명력 넘치는 사건입니다. 진정한 돌이킴의 그 마지막 종착지에는 언제나 감격스러운 죄 사함의 은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영혼이 “유쾌하게 되는 날”은 잠시 감정을 고양시키는 일시적인 종교적 흥분이나 현실의 아픔을 망각하게 만드는 도피처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무거운 죄의 빚이 십자가의 보혈로 완전히 도말되었다는 놀라운 자유이며, 죽음의 질서에 사로잡혀 신음하던 존재에게 새 생명의 찬란한 길이 열렸다는 것을 체험하는 깊은 해방입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하던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했던 것처럼, 진정한 죄 사함의 은총을 맛본 영혼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거룩한 걸음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이 거룩한 설교가 증거하는 회개와 은혜는 결코 서로 반대편에 대치되어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돈 주고 사기 위해 치르는 인간적인 대가가 아니며, 반대로 은혜가 임했다고 해서 우리의 진정한 회개와 결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바로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죄인의 자리에 정확히 서 있음을 깨달을 때, 그 허물 많은 죄를 친히 담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적인 사랑은 비로소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개인적인 복음으로 가슴 깊이 다가옵니다. 우리의 죄악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는 한없이 깊어질 수 있고, 그 용서가 실제적인 능력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돌이킴은 절망이 아닌 찬란한 기쁨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깊이 있는 설교가 오늘날의 교회를 향해 다시 한번 강력하게 확인시키는 것도 바로 이 정교하고도 기초적인 복음의 순서입니다.

세상의 환심을 얻기 위해 죄의 심각성을 흐리게 만들어서도 안 되며, 그렇다고 죄인들을 영적으로 짓누르기 위해 부활의 소망을 고의로 지연시켜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정직한 고발과 십자가의 속죄 사역, 그리고 부활과 죄 사함의 감격과 새로운 삶의 거룩한 기쁨이 하나의 유기적인 흐름으로 온전히 선포될 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날카롭게 찌르는 동시에 상한 자를 부드럽게 다시 일으켜 세우는 권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의 영감 어린 시선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육체적 치유나 개별적인 영혼의 죄 사함이라는 울타리에만 머물지 않고, 장차 이루어질 “만유를 회복하실 때”라는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인 구원의 완성으로 거침없이 뻗어 나아간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초림을 통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스러운 사역으로 구원의 생명의 문을 활짝 여셨지만, 온 세상의 완전한 회복은 아직 마지막 날에 성취될 미래의 약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참된 성도는 이미 우리에게 값없이 임한 구원의 은혜를 매일의 삶 속에서 풍성히 누리면서도, 동시에 다시 영광 중에 오실 주께서 이 땅을 온전한 치유와 평화로 가득 채우실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는 기다림의 시간 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종말론적 기다림은 결코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방관하는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끊임없이 회개를 선포하고, 오직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증언하며, 은혜를 입은 이들이 이 땅에서 거룩한 새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진정한 증인의 공동체로 굳게 서야 합니다. 교회가 이 악한 세대 속에서 실천하는 뜨거운 사랑과 순종, 헌신적인 섬김과 선교적 사명은 인간의 나약한 힘이나 조직력으로 이 세계의 모순을 완전하게 완성하려는 오만한 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주께서 친히 영광의 왕으로 임하셔서 이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현재의 삶 속에서 미리 맛보고 세상에 증언하는 가장 적극적이고 신실한 믿음의 응답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장엄한 구원의 역사를 아담 안에서 발견되는 절망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소망이라는 구속사적 틀 속에서 명확하게 바라봅니다. 아담으로부터 모든 인간에게 유전된 죄와 사망의 비참한 질서 안에서, 연약한 인간은 스스로의 도덕적 노력이나 수양으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력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한 생명과 새로운 창조의 거룩한 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더 착해지고 품행이 반듯해지는 윤리적 개선 정도의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의 법이 철저히 다스리던 어두운 왕국에서 건짐을 받아, 오직 부활하신 생명의 주께서 영원히 통치하시는 눈부신 하나님의 나라로 완전히 옮겨지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궁극적인 사명은 언제나 하나의 변하지 않는 중심축으로 정확히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바로 과거에도 지금도 생명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죄인이라는 진실을 결코 숨기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를 위해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음을 세상에 담대히 증언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열려 있는 놀라운 죄 사함과 영원한 회복의 소망을 거침없이 전파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다른 사역들과 프로그램들은 오직 이 본질적인 복음의 빛을 온 세상에 선명하게 드러낼 때 비로소 올바른 방향성을 부여받고 생명력을 얻게 됩니다. 오늘 이 순간, 우리의 영혼은 과연 무엇을 보며 기이히 여기고 있으며, 우리의 시선은 정확히 누구를 향해 고정되어 있는가.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지는 가시적인 성취와 인간적인 능력의 한계에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그 모든 세상의 소란함을 지나 오직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지니신 주님만을 깊이 응시하고 있는가. 만약 우리가 인간의 무서운 죄의 문장 뒤에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해 두신 위대한 반전의 “그러나”를 진실로 믿고 의지한다면, 우리의 남은 인생의 발걸음은 과연 어느 방향으로 완전히 돌이켜야 하겠는가. 어쩌면 성경을 펼치고 묵상하는 우리의 가장 깊고 은밀한 자리는, 인간적인 정답을 조급하게 쏟아내는 곳이 아니라 이 엄숙한 질문들 앞에 서서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생명의 주를 잠잠히 다시 바라보는 그 거룩한 무릎 꿇음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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