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신학적 성찰: 낮고 곤고한 자리를 비추는 은총과 유기적 지체론

로마서 12장 4~8절: 각자 받은 선물로 서로의 침묵을 채우는 신령한 성전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명작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면을 관통하는 거룩한 빛은 화려한 왕관을 쓴 권력자의 정수리가 아니라, 대지의 거친 숨결을 마시며 허리를 낮게 굽힌 여인들의 손끝에 가장 오랫동안 머뭅니다. 추수가 끝난 거친 들판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 흘리고 간 낱알과 흩어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그 숭고한 노동의 몸짓은, 하나의 공동체가 어떻게 이름 없는 이들의 조용한 수고와 헌신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파고드는 로마서 12장 4-8절의 말씀 역시, 우리를 저 화려한 지상의 높은 보좌가 아니라 가장 낮고 겸비한 자리로 이끌어 교회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교회는 결코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느슨하게 모여 있는 사교적 집합체가 아닙니다.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신비롭고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루며,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고유한 은사(Charisma)를 통해 서로의 연약함을 살려내고 붙들어주는 신령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이 묵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성적인 개념이나 추상적인 감동의 유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무거운 삶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려는 구체적인 행함이자,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실체적 형체가 됩니다.

1. 은혜는 한 몸 안에서 서로의 낮은 자리로 흐른다 (로마서 12:4~5)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참된 교회의 양식은 차갑고 경직된 관僚주의적 제도가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적인 정과 취미를 공유하는 느슨한 친목 단체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 수많은 지체가 존재하고 그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듯, 교회 안에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과 다채로운 기능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 안에서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은 분열과 갈등의 빌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저울로는 눈에 띄는 화려한 은사도 있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깊은 음지에서 조용히 감춰진 섬김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주권적으로 배치하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체(肢體)’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영적인 심연과 그 무게를 오랫동안 묵상하게 만듭니다. 몸의 지체는 필요할 때 잠시 붙였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떼어내 버리는 기계의 부품이나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피와 생명을 실시간으로 함께 나누어 공급받는 신비로운 유기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여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옆에 있는 지체들과도 힘써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타인과 절絶된 채 홀로 상아탑 속에 갇혀 도달하는 고립된 자기 완성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는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거나 그의 영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 전체를 온전케 하고 약한 자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아래로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의 위탁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빛깔과 모양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언제나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정렬해 있습니다。그 방향은 오직 십자가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고, 그 연대의 과정 속에서 천국의 생명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이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작고 사소해 보이는 역할들을 완전히 새로운 신령한 눈으로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의 눈물의 기도, 거친 서류를 정리하는 묵묵한 행정,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부엌에서 땀 흘리는 손길,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차가운 손を 잡기 위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그리스도의 몸의 움직임 안에서 결코 변두리나 주변부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화려한 무대 중심에 선 소수의 영웅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 몸을 지탱하기 위해 허리를 굽힌 이름 없는 성도들의 신실한 수고를 통해서 가장 따뜻하고 선명하게 세상에 증언되기 때문입니다.

2. 비교의 소음が 멎을 때 믿음은 은사를 바르게 쓴다 (로마서 12:3, 6)

하나님의 거룩한 은사가 공동체와 개인에게 임할 때,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치명적인 영적 유혹이 고개를 듭니다。하나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은근히 과시하며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주어진 은사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하하며 냉소와 절망에 빠지는 열등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인간적인 소음을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엄히 꾸짖으며 영적인 질서를 다시 정돈합니다。은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스펙이 아니며, 누군가에 대해 주눅 들어야 할 열등감의 근거도 아닙니다。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과 은혜의 분량을 따라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게 나누어 주신 거룩한 선물일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특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사도의 권勉을 통해 은사의 영적 질서와 겸손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예언이나 가르침처럼 대중 앞에서 돋보이고 두드러져 보이는 은사일수록, 자기 확신이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한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질서 안에서 철저히 통제되어야 합니다。아무리 탁월한 하늘の 능력이라 할지らい, 그것이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세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통ロ로 전락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을 살리는 사랑の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찢는 날카로운 흉기가 됩니다. 은사의 외적인 크기나 화려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사용하는 내 내면の 자아가 지금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영적 실제의 문제입니다.

이 엄숙한 지점에서 성도가 마주하는 회개는 단순히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감정의 정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일시적으로 맡겨진 주님의 선물을 내 이름의 사유재산으로 꽉 붙잡았던 탐욕의 손を 펴고, 다시 온 몸의 유익과 형제의 살아남을 향해 전 존재의 스탠스를 바꾸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Metanoia)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의 분량과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겸손의 토양 위에서 가장 정결하고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경 묵상은 매일 아침 우리의 양심을 향해 날카롭고도 고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통해 필사적으로 나를 증명하고 내 성을 쌓으려 하는가, 아니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조용히 수건을 두르고 낮은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사가 인간의 가공되지 않은 고집이나 정제되지 않은 명誉욕과 결합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쉽게 영적 무질서와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가르치는 은사가 사사로운 지식의 자랑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다스리는 은사가 부지런한 책임과 헌신을 잃어버린 채 권력의 행사가 되며,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공동체적인 덕보다 자기의 영적 영리함을 앞세울 때,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성도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족을 안기는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거룩한 흐름은 우리의 능력이나 사역의 규모 자체를 묻기 전에, 우리의 내면적 태도와 영혼의 중심을 더 깊이 심문합니다。철저한 자기 부인의 순종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허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에만 은사는 비로소 교회를 진정으로 살려내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내 입술의 감사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자각은 내게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탐내지 않게 만듭니다。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화려한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마음이 시기와 질투로 굳어질 때, 공동체는 서서히 천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은 치열한 경쟁과 서열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에게 이 과분한 자리를 맡겨주신 것을 온전한 은혜로 인정하고, 나보다 더 탁월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다른 지체의 은사를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법정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고 함께 세워져 가는 거룩한 집, 즉 교회의 소망이 됩니다. 회개의 진정한 열매는 결국 내 자리를 정확히 아는 겸손과, 다른 지체의 존재를 존귀히 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섬김과 권면과 긍휼이 복음의 살결이 되다 (로마서 12:7~8)

로마서 12장 6절에서 8절에 나열된 수많은 은사들은 결코 구름 위에 떠 있는 추상적인 신학 사조나 관념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구체적인 살결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침입니다。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실제적인 결핍과 아픔을 예민하게 살피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부지런한 손과 발이 되는 것이며, 가르침은 인간의 현학적인 철학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사도적 진리를 왜곡 없이 바르게 전수하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또한 권면은 율법적인 정죄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낙심하고 절망한 영혼의 곁에 묵묵히 찾아가 함께 앉아, 그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거룩한 동행입니다.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이것들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구변이나 말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실제적 현실로 시각화하는 강력한 통로들입니다。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실함과 순전함이어야 합니다. 다스림은 자기가 가진 영적·행정적 권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곳을 먼저 살피고 책임을 지는 부지런한 헌신이어야 합니다。그리고 긍휼은 병든 자, 외로운 자, 그리고 인생의 모진 풍파에 치여 신음하는 자들을 향해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손길입니다。

이 모든 천국의 은사들은 결코 서로 더 높아지기 위해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오케스트ラの 악기들처럼, 가르침이 진리의 빛으로 갈 바를 밝히면 섬김은 그 빛이 비추는 길 위를 묵묵히 걸으며 현장을 지탱하고, 권면이 지쳐 쓰러진 영혼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면 구제는 그 영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의 실제를 손에 쥐여줍니다。이처럼 은사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깊고 넓은 복음의 표정을 짓게 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 구체적인 섬김의 손길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매하고 뛰어난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구체적인 발을 얻지 못하고 공허한 지식으로 굳어질 것입니다。또한 지친 영혼을 향한 따뜻한 권면과 위로가 사라진다면, 아무리 조직이 체계적이고 건물이 거대할지라도 낙심한 사람은 공동체라는 거대한 인파 속에서 철저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며 홀로 죽어갈 것입니다。더 나아가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애끓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입술로 외치는 ‘은혜’라는 거룩한 단어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찢어진 심장 곁에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지 못하는 차가운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은사는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빛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풍파を 막아내는 복음의 튼튼한 성벽이 됩니다。

이 설교가 정직하게 비추는 교회 공동체의 참모습은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캐리어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전시장이 결코 아닙니다。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본질적 죄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여,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고 살려내는 자비의 집(Bethesda)입니다。공동체 안에서 어떤 은사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의 영역에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하찮거나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어떤 은사가 대중 앞에 중요하고 거대해 보인다고 해서 그 은사를 가진 개인이 홀로 교회를 독점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교회는 완벽하고 강한 자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깨어짐과 부족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촘촘히 잇고 기워가는 신비로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4. 산 제사의 자리에서 소망은 일상의 예배가 된다 (로마서 12:1)

로마서 12장에서 사도가 쏟아내는 은사 공동체의 유기적 원리는,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그 참뜻이 살아납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는 거룩한 소명(Vocation)입니다。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일주일 중 특정한 한 시간, 구별된 종교적 공간의 장막 안에만 갇혀 있는 박제된 의식이 결코 아닙니다。그것은 주일 예배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육체와 삶의 전 영역, 즉 우리의 매일의 일상과 선택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거룩한 방향성이자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받은 은사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잠시 경건한 모양으로 빛나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일시적인 종교적 역할극이 아닙니다。그것은 내가 발を 딛고 살아가는 가장 세속적인 공간인 가정과, 치열한 생존의 경쟁이 벌어지는 일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의 생명력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성도의 삶 전체에 대한 거룩한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은 이 시대 공동체의 소망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일으켜 세웁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법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외적인 스펙과 성과로 등급을 매겨 평가하고, 끝없는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어 소외를 조장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위로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서로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세워주는 전혀 다른 천국의 대안적 질서를 이 땅 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맡겨진 말씀의 은사로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방향을 새벽녘 등대처럼 밝히고,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김으로 사역의 거친 현장을 묵묵히 온몸으로 지탱하며, 또 누군가는 뜨거운 권면과 애끓는 긍휼의 손길로 세상에서 상처받아 무너진 지체의 마음을 붙들어줍니다。그렇게 서로의 다른 은사들이 인간의 계산을 지우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촘촘히 이어질 때, 교회는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소외된 영혼도 외롭게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품어주는 하늘의 진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 공동체는 세상이 사용하는 권력과 마케팅의 방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심장에 복음의 충격을 던집니다。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정죄보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회복을 먼저 가슴에 품고, 자기 자신의 영적 의를 세우기보다 연약한 다른 이의 삶의 무게와 눈물을 함께 짊어지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깨어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매일의 삶으로 증명해 보입니다。로마서의 위대한 서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은사 공동체의 핵심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은사는 나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목에 거는 화려한 보석 장식품이 아니라, 죽어가는 교회와 이 어두운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왕이신 주님께서 내게 잠시 맡겨주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설교가 가리키는 참된 교회의 종착지는 그래서 마침내 ‘이 땅 위에 도래한 천국의 모형’이라는 장엄한 표현에까지 다다릅니다。이 선언은 교회가 아무런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도피성이나 비현실적인 이상향(Utopia)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여전히 허물 많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오직 예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통치 안에서 서로의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하늘 질서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미리 배우고 연습하는 은총의 훈련소라는 뜻입니다。

비교와 시기 대신 존중과 축복이, 율법적인 정죄와 배격 대신 보혈을 통한 용서와 회복が, 고립된 이기주의 대신 끈끈한 상호 의존의 연대가 지체의 삶 속에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의 길을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연대의 자리에서 우리의 소망은 저 먼 미래의 구름 위에 떠 있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숨 쉬는 형제를 살려내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는 은사의 종국적인 방향성이 개인의 영적 성취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살아나는 십자가의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번 엄숙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주님의 요청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단지 주일 오전의 거룩한 종교적 언어와 예배당의 의자 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성가신 가사 노동과 갈등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 거짓과 타협이 판치는 일터에서 손해を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내는 정직, 공동체 안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무언의 섬김, 그리고 행색이 초라하고 약한 이를 향해 내 주머니를 열어 다가가는 애틋한 긍휼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의 은사가 사사로운 소유를 떠나 하나님께 온전히 연락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제단입니다。 이러한 작은 순종들이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리 없이 반복될 때, 교회는 세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게 자라나고, 세상은 그 조용한 영적 지각변동 속에서 마침내 썩어지지 아니할 복음의 진정한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결어: 새 아침을 깨우는 영적 예배의 질문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조용하고 강력합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은사를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타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내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자아의 바벨탑입니까, 아니면 머리 되신 주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 입은 지체의 발을 씻기며 한 몸을 살려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십자가의 자리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거친 광야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고립된 영웅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필연적인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나의 보이지 않는 작은 양보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과, 이름 없는 순종이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거창한 사역의 성공을 외치기 전에, 이미 내가 서 있는 그 평범한 일상의 척박한 자리에서 천국을 향한 영적 예배의 장엄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davidjang.org

fisherofman.kr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본 ‘핍박을 이긴 교회의 비밀’

명암의 미학: 가장 칠흑 같은 밤에 떠오르는 빛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의 화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조법)’ 기법 속에서 빛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찬란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배신, 상처, 혼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캔버스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은, 우리에게 진짜 구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웅변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데살로니가전서 1장 역시 이러한 영적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경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평온한 시대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복음의 야성’을 일깨웁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결코 안락한 휴양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조롱과 적대감이 빗발쳤고, 정치적·사회적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는 영적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고통의 현장을 보며 탄식하는 대신 ‘감사’를 먼저 내뱉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안전할 때가 아니라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본질을 증명하며, 복음은 박수갈채 속에서보다 핍박의 불길 속에서 더 순전하게 정제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세 가지 엔진: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순히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의 문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외부 압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의 내부 설계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복음의 지침서’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세 가지 핵심 동력을 기억했습니다.

핵심 가치성경적 표현신학적 실천 (장재형 목사 강해)
믿음 (Faith)믿음의 역사지적 동의를 넘어 삶을 송두리째 움직이는 ‘에너지(Energeia)’
사랑 (Love)사랑의 수고감상적 유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해산의 고통(Kopos)’
소망 (Hope)소망의 인내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게 하는 ‘거룩한 견인(Hypomone)’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는 단순한 교리적 수긍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이것은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그 능력의 원천에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 권능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였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로마의 칼날 앞에서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실재(Reality)였기에 핍박을 뚫고 빛을 발했습니다.


정보가 아닌 능력: 데살로니가 교회의 ‘급속한 성숙’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경이로운 점은 **’그 고난 한복판에서 무엇을 붙들었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화술’이나 ‘세련된 이론’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으로 정면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짧은 양육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성장했고, 오히려 주변의 다른 교회들에 영적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권능’을 다시 묻습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으로 강해지는가? 거대한 규모인가, 세련된 제도인가, 혹은 안락한 분위기인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보가 아닌 **능력(Dunamis)**으로 받을 때만 강해집니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 신앙이 이론을 넘어 실제 삶의 현장에 침투할 때, 어린 공동체는 제국의 압박을 압도하는 성숙함을 입게 됩니다.


상처 난 틈새로 흐르는 은혜의 향기

우리는 흔히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가 보여주는 역설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는 안락한 소파 위보다 거친 광야에서 더 밀도 있게 임합니다. 시대마다 박해의 모양은 달랐지만, 복음을 향한 세상의 적대감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2천 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나 제도의 견고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의 능력’**이었습니다. 핍박받는 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의 향기가 스며있습니다. 그들의 견고한 믿음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깊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전염성을 가집니다.

결국 교회를 지키는 것은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꿈동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 믿음이 사랑의 수고를 낳고, 그 수고가 다시 공동체의 뼈대를 세우며, 그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복음의 향기를 세상 끝까지 흘려보내는 발원지가 됩니다.


재림 소망: 도피가 아닌 ‘거룩한 견인’의 닻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신학적 정점은 결국 재림 신앙으로 귀결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기록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완결성이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Parousia) 안에서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입니다. 재림 소망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 승리의 확신: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 인내의 근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끝내 승리하게 하신다는 확신.

초대교회가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던 것은 절망을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승리가 이미 주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승전가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재림이 날짜를 맞히는 퀴즈가 아니라, 오늘을 가장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게 만드는 **’현재 진행형의 동력’**임을 일깨웁니다. 진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더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 더 인내하며, 오늘 더 충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지킵니다.


기도의 연금술: 중보로 빚어지는 공동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눈물 젖은 기도, 중보의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거룩한 기억 속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납니다.

특히 핍박의 시대일수록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련을 겪는 지체들을 위해 영적으로 연대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범은 2026년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를 이 지점으로 이끄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성’이 아니라, **’복음을 능력으로 받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쉼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2-10절의 메시지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핍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부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종말적 소망의 합주”**입니다. 상황이 편안하지 않을 때 교회가 더 단단해지고 복음이 더 힘 있게 증언되는 이 거룩한 역설은 초대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믿음이 과연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엄중히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 믿음의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까?
  • 사랑의 수고가 공동체 안에 흐르고 있습니까?
  • 소망의 인내가 당신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가 다시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교회다워지고 복음은 세상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강해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은혜로 남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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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통해 본 ‘하늘’과 ‘땅’의 신학적 조우

사도행전 1장: 상실의 애가를 넘어 사명으로 걷는 자들의 서사

실낙원(失樂園)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새벽

존 밀턴은 그의 장엄한 대서사시 『실낙원』을 통해 인간이 본래 누렸던 에덴의 상실과 그로 인한 영적 비극을 처절하게 노래했습니다. 밀턴이 응시했던 비극의 핵심은 단순히 지리적인 낙원의 상실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친밀한 사귐이 단절되고 그분의 영광이 떠난 자리에서 느껴지는 인간 영혼의 공허와 떨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펼치면, 우리는 바로 그 깊은 상실의 긴 밤이 지나고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모호한 경계선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영광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선명하게 붙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강조하듯, 바로 그 ‘모호함’과 ‘기다림’의 경계에서 교회라는 신비로운 공동체는 태동합니다. 십자가는 실패한 자들의 비명으로 끝나는 종착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강렬하게 침투하는 거룩한 관문이었습니다. 부활 또한 단순히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사건을 넘어, 기존의 세속적 질서를 뒤엎고 생명의 질서를 새롭게 쓰는 우주적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복음서의 눈물 어린 서사가 교회의 역동적인 발걸음으로 치환되는 거대한 ‘신학적 전환점’입니다. 낙원을 잃고 방황하던 인간의 역사가 성령의 임재 안에서 ‘회복의 역사’로 그 뱃머리를 돌리는 찬란한 문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과 땅의 사명 사이, 그 거룩한 긴장

부활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지난 세월의 아픔과 민족적 해방에 대한 갈망이 녹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물음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때(Timing)’에 대한 집착을 ‘성령(Spirit)’에 대한 약속으로 돌려놓으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본질적 차이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많은 신앙인이 ‘언제(When)’ 응답이 올지, ‘언제’ 상황이 바뀔지 계산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How)’ 순종하며 기다릴 것인가를 묻습니다.

  • 기다림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치밀하게 짠 정치적 프로젝트나 전략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의 내면이 변화될 때 비로소 확장됩니다.
  • 관념에서 사명으로: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땅끝’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품되, 발은 땅의 현장을 향해야 한다는 이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바로 교회의 탄생 조건입니다. 기다림은 정지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가장 역동적인 준비 과정입니다.

비좁은 다락방, 우주적 왕국이 잉태된 곳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열린 곳은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이나 화려한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자들이 모여 숨죽여 기도하던 초라한 다락방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중심부’를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세상이 외면한 ‘주변부’에서 새로운 역사의 줄기를 뽑아내십니다.

그 다락방에는 화려한 전략도, 세상을 압도할 숫자도,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한 가지, 바로 **’전심으로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크기가 아니라, 그 영혼이 향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이 통찰은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프로그램보다 기도가, 과시보다 사랑이, 속도보다 순종이 앞설 때 교회는 비로소 하늘의 질서를 이 땅에 투영하는 거울이 됩니다. 다락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기도의 불씨는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지극히 작고 연약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면 시대를 뒤흔드는 씨앗이 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이 보여주는 거룩한 역설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증언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Already)’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아직(Not Yet)’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씨앗은 뿌려졌으나 추수의 때는 오지 않았고, 새벽빛은 밝았으나 정오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우리를 현실 도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고 변혁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에 여전히 부조리와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복음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증인(Martyr)’**으로 부름받았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 내적 변화의 우선순위: 장재형 목사는 인간의 내면이 성령으로 먼저 변화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사회적 제도와 구조도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 신앙의 진정성: ‘이미’ 임한 나라를 믿는 자는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담대함을 얻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유지합니다. 이 긴장 속에서 신앙은 값싼 위로를 넘어, 눈물 마르지 않은 세상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삶의 표정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현재성

결국 사도행전 1장이 여는 새 시대는 먼 미래에나 일어날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내딛는 작은 순종의 발걸음에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가정, 직장, 관계—이 먼저 ‘작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삶의 표정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1. 관계의 변화: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던 관계가 사랑과 용서로 치환될 때.
  2. 재정의 변화: 소유의 집착에서 나눔의 기쁨으로 관점이 바뀔 때.
  3. 언어의 변화: 비난과 정죄 대신 성령의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은혜의 종착역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파송’이며, 승천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개시’입니다. 진정한 설교는 예배당의 감동으로 휘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기도를 바꾸고, 이웃을 보는 눈을 바꾸며,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나 대형 집회가 아닙니다. 성령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정직한 마음, 함께 무릎 꿇는 공동체, 그리고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도 복음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담대한 순종입니다. 한 사람을 품어주는 오래 참음, 진실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을 증명합니다. 그때, 잃어버린 낙원을 탄식하며 노래하던 인류의 슬픔 위로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방관자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세상의 어둠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부활의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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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은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2장의 핵심 주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찬송과 감사의 이유를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넘어선 ‘역사의 큰 방향성’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역사의 흐름이B.C(주전)와 A.D(주후)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핵심적 사건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는“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거대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종말론적 비전’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보통 ‘창조-죄-그리스도-구원’으로 요약되는 사영리(四靈理)를 가르치지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추가하여 ‘창조-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소개한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의 구원”이라는 광범위한 차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바라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하듯,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찬양과기도가 넘치게 된다고 해설한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가 바로 바울의 기도”라며, 특히 에베소서 1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 내용을 주목한다. 그기도는 피상적인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영적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높은 차원의 요청이다. 즉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뜻 깨달음을구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타락과 죄 문제로 시선을 옮긴다. 원래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심히 좋았다’고 평가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다”고 한 말씀과 비견되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깊은 세계”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로 진노 아래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아들을 보내셨고,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복음으로 인류를 초대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Redemption)’의 사건임을 특히 강조한다.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가진 고대적 배경(노예를 돈으로 사서 자유를 선물하는 개념)처럼,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창조-죄-그리스도-구원’이라는 전형적인 사영리에 이어,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장대하고도 명확한 것인지를 설파한다.

그 결과,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은 ‘찬송’과 ‘기도’로 요약된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듯,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넘치는 찬양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닫고 체험하기를 구하는 ‘거룩한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 구원을지향하는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이 에베소서가 가진 독특한 규모감, 즉 ‘역사와 구원’을 동시에 관통하는 서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Ⅱ. 허물과 죄,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에베소서 2장으로 넘어가면서, 2장 1절에 등장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이지닌 극적인 반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 마지막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선언했는데, 2장에 이르러 그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παράπτωμα, 파라프토마)’과 ‘죄(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구분에 주목한다. 장재형목사는허물은 ‘궤도를 이탈함(fall away)’을 의미한다고 전하면서, 본래 인간이 가야 할 길(궤도)이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났다는 점을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 공전 궤도를 지니고 있고, 자연계나 동식물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창조 질서와 길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감(missing the mark)’이라는 어원을 갖는데, 이는 과녁 중심을 맞히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이 엉켜버린 상태,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전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단지 개인적 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구조적 죄악임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즉 사람들은 죄의 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있으며, 그 세력이 세상 풍속(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 등)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죄의 기류’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거대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성적 퇴폐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당시 사람들이 “우상 숭배와 음란, 부패한 문화 속에서 그 길을 좇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모습’이 결코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할 때,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불의와 우상숭배를 행하며, 서로를 해치는 죄악 가운데 빠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라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질적 태도이자, 회복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간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해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구원할 길을 내신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반전 메시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라는 구절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인류를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은 아들을 내어주는 극단적 희생을 통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구원을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의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의 본질은 ‘행위 이전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장재형목사는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언급하며, 종교개혁 시기부터 강조되어 온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먼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엡2:9)고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물을 타면 안 되듯, 절대 은혜에 행위 공로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유하며, 구원의 절대성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표현(엡2:10)을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로 분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음을 재차 언급하며, 구원은 단순히 죄사함이나 형벌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근본적 재창조라고 본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는 말로 이어간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신‘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결국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서 빛과소금이 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 2장 1-10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은, 허물과 죄로 궤도를 이탈하고 과녁에서 빗나간 인간을 주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심’으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복음의정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죄인 인생에게, 하나님의 극진한 긍휼과 사랑이 임하여 ‘함께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에 참여시키셨으므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확신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2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 정리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할 때, 이는곧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종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결론이자 신약의 시작, 곧 “알파요 오메가”라는 계시록의 선언처럼 역사의 시발점이자 완성점으로서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개념에 빗대어, “구약의 오메가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오메가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결국 종말은 “낡은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물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수렴”되는 계획된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속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된 것을상기시킨다(행28:3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는 말 속에도 “나라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해설한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참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낡은 죄악의 역사는 십자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는 선포는, 곧 오늘날 교회가 “어떤 역사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자신의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게 된다”는 비유를 들며, 크리스천은 “명확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며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금씩 자라나며, 누룩처럼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듯 영향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다(마13:31-33).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역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적 태도가 “찬송과감사”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삶 자체를 찬송으로 고백했듯, 그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찬양의 이유는 단지 심리적 위로 수준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었던 자를 “은혜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습과 공중 권세에 붙들려 허우적대며, 결코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줌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은 “값 없이” 구원받았으며, 그 결과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여기에 대한 감사가 곧 찬양이 된다.

또한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의 태도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감사와 찬송은 결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해석한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도 바울이 그 은혜를 깨닫고 온 인생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 선을 행하게 함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결국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장(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으니 “새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에베소서가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이며, 또한 “장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구원 계획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요약한다. 과거에 죄로 인해 궤도를 이탈해 죽어 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소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사단의 권세가 커 보일지라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워졌다”는 복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노래와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교회 공동체를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목표로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가는 종착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낡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끝이 나며, 새로운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 은혜로 구원받은 너희는 선한 일을 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라”라고 결론지어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2장의 메시지는 곧 교회의 정체성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이다. “너희가죽었었다, 그러나 이제 산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서 나온 감사와 찬양, 그리고 확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위에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죽음에서 생명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옮겨진 모든 사람의 고백이요 간증이 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고한 비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이 장대한 역사의 행진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그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마땅하다는 결론이,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에베소서 2장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구원의 은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2장의 핵심 주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찬송과 감사의 이유를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넘어선 ‘역사의 큰 방향성’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역사의 흐름이B.C(주전)와 A.D(주후)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핵심적 사건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는“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거대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종말론적 비전’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보통 ‘창조-죄-그리스도-구원’으로 요약되는 사영리(四靈理)를 가르치지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추가하여 ‘창조-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소개한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의 구원”이라는 광범위한 차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바라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하듯,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찬양과기도가 넘치게 된다고 해설한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가 바로 바울의 기도”라며, 특히 에베소서 1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 내용을 주목한다. 그기도는 피상적인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영적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높은 차원의 요청이다. 즉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뜻 깨달음을구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타락과 죄 문제로 시선을 옮긴다. 원래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심히 좋았다’고 평가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다”고 한 말씀과 비견되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깊은 세계”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로 진노 아래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아들을 보내셨고,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복음으로 인류를 초대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Redemption)’의 사건임을 특히 강조한다.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가진 고대적 배경(노예를 돈으로 사서 자유를 선물하는 개념)처럼,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창조-죄-그리스도-구원’이라는 전형적인 사영리에 이어,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장대하고도 명확한 것인지를 설파한다.

그 결과,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은 ‘찬송’과 ‘기도’로 요약된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듯,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넘치는 찬양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닫고 체험하기를 구하는 ‘거룩한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 구원을지향하는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이 에베소서가 가진 독특한 규모감, 즉 ‘역사와 구원’을 동시에 관통하는 서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Ⅱ. 허물과 죄,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에베소서 2장으로 넘어가면서, 2장 1절에 등장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이지닌 극적인 반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 마지막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선언했는데, 2장에 이르러 그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παράπτωμα, 파라프토마)’과 ‘죄(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구분에 주목한다. 장재형목사는허물은 ‘궤도를 이탈함(fall away)’을 의미한다고 전하면서, 본래 인간이 가야 할 길(궤도)이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났다는 점을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 공전 궤도를 지니고 있고, 자연계나 동식물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창조 질서와 길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감(missing the mark)’이라는 어원을 갖는데, 이는 과녁 중심을 맞히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이 엉켜버린 상태,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전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단지 개인적 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구조적 죄악임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즉 사람들은 죄의 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있으며, 그 세력이 세상 풍속(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 등)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죄의 기류’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거대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성적 퇴폐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당시 사람들이 “우상 숭배와 음란, 부패한 문화 속에서 그 길을 좇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모습’이 결코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할 때,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불의와 우상숭배를 행하며, 서로를 해치는 죄악 가운데 빠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라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질적 태도이자, 회복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간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해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구원할 길을 내신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반전 메시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라는 구절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인류를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은 아들을 내어주는 극단적 희생을 통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구원을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의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의 본질은 ‘행위 이전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장재형목사는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언급하며, 종교개혁 시기부터 강조되어 온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먼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엡2:9)고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물을 타면 안 되듯, 절대 은혜에 행위 공로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유하며, 구원의 절대성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표현(엡2:10)을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로 분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음을 재차 언급하며, 구원은 단순히 죄사함이나 형벌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근본적 재창조라고 본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는 말로 이어간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신‘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결국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서 빛과소금이 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 2장 1-10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은, 허물과 죄로 궤도를 이탈하고 과녁에서 빗나간 인간을 주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심’으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복음의정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죄인 인생에게, 하나님의 극진한 긍휼과 사랑이 임하여 ‘함께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에 참여시키셨으므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확신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2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 정리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할 때, 이는곧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종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결론이자 신약의 시작, 곧 “알파요 오메가”라는 계시록의 선언처럼 역사의 시발점이자 완성점으로서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개념에 빗대어, “구약의 오메가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오메가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결국 종말은 “낡은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물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수렴”되는 계획된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속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된 것을상기시킨다(행28:3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는 말 속에도 “나라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해설한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참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낡은 죄악의 역사는 십자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는 선포는, 곧 오늘날 교회가 “어떤 역사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자신의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게 된다”는 비유를 들며, 크리스천은 “명확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며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금씩 자라나며, 누룩처럼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듯 영향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다(마13:31-33).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역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적 태도가 “찬송과감사”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삶 자체를 찬송으로 고백했듯, 그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찬양의 이유는 단지 심리적 위로 수준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었던 자를 “은혜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습과 공중 권세에 붙들려 허우적대며, 결코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줌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은 “값 없이” 구원받았으며, 그 결과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여기에 대한 감사가 곧 찬양이 된다.

또한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의 태도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감사와 찬송은 결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해석한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도 바울이 그 은혜를 깨닫고 온 인생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 선을 행하게 함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결국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장(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으니 “새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에베소서가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이며, 또한 “장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구원 계획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요약한다. 과거에 죄로 인해 궤도를 이탈해 죽어 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소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사단의 권세가 커 보일지라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워졌다”는 복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노래와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교회 공동체를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목표로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가는 종착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낡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끝이 나며, 새로운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 은혜로 구원받은 너희는 선한 일을 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라”라고 결론지어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2장의 메시지는 곧 교회의 정체성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이다. “너희가죽었었다, 그러나 이제 산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서 나온 감사와 찬양, 그리고 확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위에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죽음에서 생명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옮겨진 모든 사람의 고백이요 간증이 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고한 비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이 장대한 역사의 행진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그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마땅하다는 결론이,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에베소서 2장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