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 기독일보 편집고문 및 자문위원들과 함께 한국교회연합 지도자들이 지난 달 31일 뉴욕 도버에 위치한 세계올리벳성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성회는 장재형목사가 설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방문단은 이날, 미주 기독일보 설립자이자 크리스천포스트 설립자 중 한 명인 장재형목사를 만나 따뜻한 대화를 나누었으며, 세계 기독교계의 주요 현안들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번 미국 방문은 기독일보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워싱턴 DC에 위치한 기독교미디어센터를 방문하여 상호간의 교류 및 협력에 대한 논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기독교미디어센터는 미국에서 대표적인 복음주의 언론사인 크리스천포스트가 소재하고 있으며, 이 미디어센터도 장재형목사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기독일보는 한교연과 MOU를 체결하여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으며, 한교연의 주요 리더들인 김요셉 초대대표회장, 권태진 전 대표회장, 송태섭 대표회장 등이 기독일보의 편집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올리벳(한국올리벳성회)은 현재 세계올리벳성회의 일원으로, 한교연의 회원교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기독일보는 지속적인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교계 지도자들과의 소통을 촉진하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명작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면을 관통하는 거룩한 빛은 화려한 왕관을 쓴 권력자의 정수리가 아니라, 대지의 거친 숨결을 마시며 허리를 낮게 굽힌 여인들의 손끝에 가장 오랫동안 머뭅니다. 추수가 끝난 거친 들판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 흘리고 간 낱알과 흩어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그 숭고한 노동의 몸짓은, 하나의 공동체가 어떻게 이름 없는 이들의 조용한 수고와 헌신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파고드는 로마서 12장 4-8절의 말씀 역시, 우리를 저 화려한 지상의 높은 보좌가 아니라 가장 낮고 겸비한 자리로 이끌어 교회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교회는 결코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느슨하게 모여 있는 사교적 집합체가 아닙니다.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신비롭고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루며,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고유한 은사(Charisma)를 통해 서로의 연약함을 살려내고 붙들어주는 신령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이 묵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성적인 개념이나 추상적인 감동의 유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무거운 삶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려는 구체적인 행함이자,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실체적 형체가 됩니다.
1. 은혜는 한 몸 안에서 서로의 낮은 자리로 흐른다 (로마서 12:4~5)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참된 교회의 양식은 차갑고 경직된 관僚주의적 제도가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적인 정과 취미를 공유하는 느슨한 친목 단체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 수많은 지체가 존재하고 그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듯, 교회 안에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과 다채로운 기능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 안에서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은 분열과 갈등의 빌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저울로는 눈에 띄는 화려한 은사도 있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깊은 음지에서 조용히 감춰진 섬김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주권적으로 배치하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체(肢體)’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영적인 심연과 그 무게를 오랫동안 묵상하게 만듭니다. 몸의 지체는 필요할 때 잠시 붙였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떼어내 버리는 기계의 부품이나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피와 생명을 실시간으로 함께 나누어 공급받는 신비로운 유기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여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옆에 있는 지체들과도 힘써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타인과 절絶된 채 홀로 상아탑 속에 갇혀 도달하는 고립된 자기 완성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는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거나 그의 영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 전체를 온전케 하고 약한 자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아래로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의 위탁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빛깔과 모양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언제나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정렬해 있습니다。그 방향은 오직 십자가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고, 그 연대의 과정 속에서 천국의 생명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이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작고 사소해 보이는 역할들을 완전히 새로운 신령한 눈으로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의 눈물의 기도, 거친 서류를 정리하는 묵묵한 행정,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부엌에서 땀 흘리는 손길,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차가운 손を 잡기 위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그리스도의 몸의 움직임 안에서 결코 변두리나 주변부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화려한 무대 중심에 선 소수의 영웅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 몸을 지탱하기 위해 허리를 굽힌 이름 없는 성도들의 신실한 수고를 통해서 가장 따뜻하고 선명하게 세상에 증언되기 때문입니다.
2. 비교의 소음が 멎을 때 믿음은 은사를 바르게 쓴다 (로마서 12:3, 6)
하나님의 거룩한 은사가 공동체와 개인에게 임할 때,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치명적인 영적 유혹이 고개를 듭니다。하나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은근히 과시하며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주어진 은사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하하며 냉소와 절망에 빠지는 열등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인간적인 소음을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엄히 꾸짖으며 영적인 질서를 다시 정돈합니다。은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스펙이 아니며, 누군가에 대해 주눅 들어야 할 열등감의 근거도 아닙니다。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과 은혜의 분량을 따라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게 나누어 주신 거룩한 선물일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특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사도의 권勉을 통해 은사의 영적 질서와 겸손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예언이나 가르침처럼 대중 앞에서 돋보이고 두드러져 보이는 은사일수록, 자기 확신이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한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질서 안에서 철저히 통제되어야 합니다。아무리 탁월한 하늘の 능력이라 할지らい, 그것이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세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통ロ로 전락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을 살리는 사랑の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찢는 날카로운 흉기가 됩니다. 은사의 외적인 크기나 화려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사용하는 내 내면の 자아가 지금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영적 실제의 문제입니다.
이 엄숙한 지점에서 성도가 마주하는 회개는 단순히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감정의 정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일시적으로 맡겨진 주님의 선물을 내 이름의 사유재산으로 꽉 붙잡았던 탐욕의 손を 펴고, 다시 온 몸의 유익과 형제의 살아남을 향해 전 존재의 스탠스를 바꾸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Metanoia)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의 분량과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겸손의 토양 위에서 가장 정결하고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경 묵상은 매일 아침 우리의 양심을 향해 날카롭고도 고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통해 필사적으로 나를 증명하고 내 성을 쌓으려 하는가, 아니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조용히 수건을 두르고 낮은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사가 인간의 가공되지 않은 고집이나 정제되지 않은 명誉욕과 결합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쉽게 영적 무질서와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가르치는 은사가 사사로운 지식의 자랑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다스리는 은사가 부지런한 책임과 헌신을 잃어버린 채 권력의 행사가 되며,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공동체적인 덕보다 자기의 영적 영리함을 앞세울 때,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성도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족을 안기는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거룩한 흐름은 우리의 능력이나 사역의 규모 자체를 묻기 전에, 우리의 내면적 태도와 영혼의 중심을 더 깊이 심문합니다。철저한 자기 부인의 순종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허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에만 은사는 비로소 교회를 진정으로 살려내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내 입술의 감사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자각은 내게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탐내지 않게 만듭니다。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화려한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마음이 시기와 질투로 굳어질 때, 공동체는 서서히 천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은 치열한 경쟁과 서열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에게 이 과분한 자리를 맡겨주신 것을 온전한 은혜로 인정하고, 나보다 더 탁월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다른 지체의 은사를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법정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고 함께 세워져 가는 거룩한 집, 즉 교회의 소망이 됩니다. 회개의 진정한 열매는 결국 내 자리를 정확히 아는 겸손과, 다른 지체의 존재를 존귀히 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섬김과 권면과 긍휼이 복음의 살결이 되다 (로마서 12:7~8)
로마서 12장 6절에서 8절에 나열된 수많은 은사들은 결코 구름 위에 떠 있는 추상적인 신학 사조나 관념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구체적인 살결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침입니다。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실제적인 결핍과 아픔을 예민하게 살피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부지런한 손과 발이 되는 것이며, 가르침은 인간의 현학적인 철학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사도적 진리를 왜곡 없이 바르게 전수하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또한 권면은 율법적인 정죄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낙심하고 절망한 영혼의 곁에 묵묵히 찾아가 함께 앉아, 그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거룩한 동행입니다.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이것들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구변이나 말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실제적 현실로 시각화하는 강력한 통로들입니다。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실함과 순전함이어야 합니다. 다스림은 자기가 가진 영적·행정적 권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곳을 먼저 살피고 책임을 지는 부지런한 헌신이어야 합니다。그리고 긍휼은 병든 자, 외로운 자, 그리고 인생의 모진 풍파에 치여 신음하는 자들을 향해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손길입니다。
이 모든 천국의 은사들은 결코 서로 더 높아지기 위해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오케스트ラの 악기들처럼, 가르침이 진리의 빛으로 갈 바를 밝히면 섬김은 그 빛이 비추는 길 위를 묵묵히 걸으며 현장을 지탱하고, 권면이 지쳐 쓰러진 영혼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면 구제는 그 영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의 실제를 손에 쥐여줍니다。이처럼 은사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깊고 넓은 복음의 표정을 짓게 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 구체적인 섬김의 손길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매하고 뛰어난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구체적인 발을 얻지 못하고 공허한 지식으로 굳어질 것입니다。또한 지친 영혼을 향한 따뜻한 권면과 위로가 사라진다면, 아무리 조직이 체계적이고 건물이 거대할지라도 낙심한 사람은 공동체라는 거대한 인파 속에서 철저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며 홀로 죽어갈 것입니다。더 나아가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애끓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입술로 외치는 ‘은혜’라는 거룩한 단어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찢어진 심장 곁에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지 못하는 차가운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은사는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빛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풍파を 막아내는 복음의 튼튼한 성벽이 됩니다。
이 설교가 정직하게 비추는 교회 공동체의 참모습은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캐리어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전시장이 결코 아닙니다。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본질적 죄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여,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고 살려내는 자비의 집(Bethesda)입니다。공동체 안에서 어떤 은사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의 영역에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하찮거나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어떤 은사가 대중 앞에 중요하고 거대해 보인다고 해서 그 은사를 가진 개인이 홀로 교회를 독점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교회는 완벽하고 강한 자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깨어짐과 부족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촘촘히 잇고 기워가는 신비로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4. 산 제사의 자리에서 소망은 일상의 예배가 된다 (로마서 12:1)
로마서 12장에서 사도가 쏟아내는 은사 공동체의 유기적 원리는,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그 참뜻이 살아납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는 거룩한 소명(Vocation)입니다。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일주일 중 특정한 한 시간, 구별된 종교적 공간의 장막 안에만 갇혀 있는 박제된 의식이 결코 아닙니다。그것은 주일 예배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육체와 삶의 전 영역, 즉 우리의 매일의 일상과 선택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거룩한 방향성이자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받은 은사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잠시 경건한 모양으로 빛나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일시적인 종교적 역할극이 아닙니다。그것은 내가 발を 딛고 살아가는 가장 세속적인 공간인 가정과, 치열한 생존의 경쟁이 벌어지는 일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의 생명력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성도의 삶 전체에 대한 거룩한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은 이 시대 공동체의 소망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일으켜 세웁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법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외적인 스펙과 성과로 등급을 매겨 평가하고, 끝없는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어 소외를 조장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위로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서로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세워주는 전혀 다른 천국의 대안적 질서를 이 땅 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맡겨진 말씀의 은사로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방향을 새벽녘 등대처럼 밝히고,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김으로 사역의 거친 현장을 묵묵히 온몸으로 지탱하며, 또 누군가는 뜨거운 권면과 애끓는 긍휼의 손길로 세상에서 상처받아 무너진 지체의 마음을 붙들어줍니다。그렇게 서로의 다른 은사들이 인간의 계산을 지우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촘촘히 이어질 때, 교회는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소외된 영혼도 외롭게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품어주는 하늘의 진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 공동체는 세상이 사용하는 권력과 마케팅의 방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심장에 복음의 충격을 던집니다。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정죄보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회복을 먼저 가슴에 품고, 자기 자신의 영적 의를 세우기보다 연약한 다른 이의 삶의 무게와 눈물을 함께 짊어지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깨어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매일의 삶으로 증명해 보입니다。로마서의 위대한 서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은사 공동체의 핵심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은사는 나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목에 거는 화려한 보석 장식품이 아니라, 죽어가는 교회와 이 어두운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왕이신 주님께서 내게 잠시 맡겨주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설교가 가리키는 참된 교회의 종착지는 그래서 마침내 ‘이 땅 위에 도래한 천국의 모형’이라는 장엄한 표현에까지 다다릅니다。이 선언은 교회가 아무런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도피성이나 비현실적인 이상향(Utopia)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여전히 허물 많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오직 예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통치 안에서 서로의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하늘 질서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미리 배우고 연습하는 은총의 훈련소라는 뜻입니다。
비교와 시기 대신 존중과 축복이, 율법적인 정죄와 배격 대신 보혈을 통한 용서와 회복が, 고립된 이기주의 대신 끈끈한 상호 의존의 연대가 지체의 삶 속에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의 길을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연대의 자리에서 우리의 소망은 저 먼 미래의 구름 위에 떠 있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숨 쉬는 형제를 살려내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는 은사의 종국적인 방향성이 개인의 영적 성취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살아나는 십자가의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번 엄숙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주님의 요청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단지 주일 오전의 거룩한 종교적 언어와 예배당의 의자 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성가신 가사 노동과 갈등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 거짓과 타협이 판치는 일터에서 손해を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내는 정직, 공동체 안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무언의 섬김, 그리고 행색이 초라하고 약한 이를 향해 내 주머니를 열어 다가가는 애틋한 긍휼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의 은사가 사사로운 소유를 떠나 하나님께 온전히 연락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제단입니다。 이러한 작은 순종들이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리 없이 반복될 때, 교회는 세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게 자라나고, 세상은 그 조용한 영적 지각변동 속에서 마침내 썩어지지 아니할 복음의 진정한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결어: 새 아침을 깨우는 영적 예배의 질문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조용하고 강력합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은사를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타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내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자아의 바벨탑입니까, 아니면 머리 되신 주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 입은 지체의 발을 씻기며 한 몸을 살려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십자가의 자리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거친 광야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고립된 영웅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필연적인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나의 보이지 않는 작은 양보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과, 이름 없는 순종이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거창한 사역의 성공을 외치기 전에, 이미 내가 서 있는 그 평범한 일상의 척박한 자리에서 천국을 향한 영적 예배의 장엄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의 화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조법)’ 기법 속에서 빛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찬란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배신, 상처, 혼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캔버스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은, 우리에게 진짜 구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웅변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데살로니가전서 1장 역시 이러한 영적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경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평온한 시대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복음의 야성’을 일깨웁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결코 안락한 휴양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조롱과 적대감이 빗발쳤고, 정치적·사회적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는 영적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고통의 현장을 보며 탄식하는 대신 ‘감사’를 먼저 내뱉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안전할 때가 아니라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본질을 증명하며, 복음은 박수갈채 속에서보다 핍박의 불길 속에서 더 순전하게 정제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세 가지 엔진: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순히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의 문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외부 압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의 내부 설계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복음의 지침서’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세 가지 핵심 동력을 기억했습니다.
핵심 가치
성경적 표현
신학적 실천 (장재형 목사 강해)
믿음 (Faith)
믿음의 역사
지적 동의를 넘어 삶을 송두리째 움직이는 ‘에너지(Energeia)’
사랑 (Love)
사랑의 수고
감상적 유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해산의 고통(Kopos)’
소망 (Hope)
소망의 인내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게 하는 ‘거룩한 견인(Hypomone)’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는 단순한 교리적 수긍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이것은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그 능력의 원천에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 권능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였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로마의 칼날 앞에서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실재(Reality)였기에 핍박을 뚫고 빛을 발했습니다.
정보가 아닌 능력: 데살로니가 교회의 ‘급속한 성숙’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경이로운 점은 **’그 고난 한복판에서 무엇을 붙들었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화술’이나 ‘세련된 이론’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으로 정면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짧은 양육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성장했고, 오히려 주변의 다른 교회들에 영적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권능’을 다시 묻습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으로 강해지는가? 거대한 규모인가, 세련된 제도인가, 혹은 안락한 분위기인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보가 아닌 **능력(Dunamis)**으로 받을 때만 강해집니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 신앙이 이론을 넘어 실제 삶의 현장에 침투할 때, 어린 공동체는 제국의 압박을 압도하는 성숙함을 입게 됩니다.
상처 난 틈새로 흐르는 은혜의 향기
우리는 흔히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가 보여주는 역설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는 안락한 소파 위보다 거친 광야에서 더 밀도 있게 임합니다. 시대마다 박해의 모양은 달랐지만, 복음을 향한 세상의 적대감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2천 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나 제도의 견고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의 능력’**이었습니다. 핍박받는 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의 향기가 스며있습니다. 그들의 견고한 믿음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깊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전염성을 가집니다.
결국 교회를 지키는 것은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꿈동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 믿음이 사랑의 수고를 낳고, 그 수고가 다시 공동체의 뼈대를 세우며, 그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복음의 향기를 세상 끝까지 흘려보내는 발원지가 됩니다.
재림 소망: 도피가 아닌 ‘거룩한 견인’의 닻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신학적 정점은 결국 재림 신앙으로 귀결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기록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완결성이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Parousia) 안에서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입니다. 재림 소망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승리의 확신: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인내의 근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끝내 승리하게 하신다는 확신.
초대교회가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던 것은 절망을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승리가 이미 주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승전가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재림이 날짜를 맞히는 퀴즈가 아니라, 오늘을 가장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게 만드는 **’현재 진행형의 동력’**임을 일깨웁니다. 진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더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 더 인내하며, 오늘 더 충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지킵니다.
기도의 연금술: 중보로 빚어지는 공동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눈물 젖은 기도, 중보의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거룩한 기억 속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납니다.
특히 핍박의 시대일수록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련을 겪는 지체들을 위해 영적으로 연대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범은 2026년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를 이 지점으로 이끄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성’이 아니라, **’복음을 능력으로 받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쉼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2-10절의 메시지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핍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부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종말적 소망의 합주”**입니다. 상황이 편안하지 않을 때 교회가 더 단단해지고 복음이 더 힘 있게 증언되는 이 거룩한 역설은 초대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믿음이 과연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엄중히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믿음의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까?
사랑의 수고가 공동체 안에 흐르고 있습니까?
소망의 인내가 당신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가 다시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교회다워지고 복음은 세상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강해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은혜로 남는 이유입니다.
존 밀턴은 그의 장엄한 대서사시 『실낙원』을 통해 인간이 본래 누렸던 에덴의 상실과 그로 인한 영적 비극을 처절하게 노래했습니다. 밀턴이 응시했던 비극의 핵심은 단순히 지리적인 낙원의 상실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친밀한 사귐이 단절되고 그분의 영광이 떠난 자리에서 느껴지는 인간 영혼의 공허와 떨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펼치면, 우리는 바로 그 깊은 상실의 긴 밤이 지나고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모호한 경계선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영광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선명하게 붙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강조하듯, 바로 그 ‘모호함’과 ‘기다림’의 경계에서 교회라는 신비로운 공동체는 태동합니다. 십자가는 실패한 자들의 비명으로 끝나는 종착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강렬하게 침투하는 거룩한 관문이었습니다. 부활 또한 단순히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사건을 넘어, 기존의 세속적 질서를 뒤엎고 생명의 질서를 새롭게 쓰는 우주적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복음서의 눈물 어린 서사가 교회의 역동적인 발걸음으로 치환되는 거대한 ‘신학적 전환점’입니다. 낙원을 잃고 방황하던 인간의 역사가 성령의 임재 안에서 ‘회복의 역사’로 그 뱃머리를 돌리는 찬란한 문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과 땅의 사명 사이, 그 거룩한 긴장
부활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지난 세월의 아픔과 민족적 해방에 대한 갈망이 녹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물음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때(Timing)’에 대한 집착을 ‘성령(Spirit)’에 대한 약속으로 돌려놓으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본질적 차이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많은 신앙인이 ‘언제(When)’ 응답이 올지, ‘언제’ 상황이 바뀔지 계산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How)’ 순종하며 기다릴 것인가를 묻습니다.
기다림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치밀하게 짠 정치적 프로젝트나 전략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의 내면이 변화될 때 비로소 확장됩니다.
관념에서 사명으로: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땅끝’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품되, 발은 땅의 현장을 향해야 한다는 이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바로 교회의 탄생 조건입니다. 기다림은 정지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가장 역동적인 준비 과정입니다.
비좁은 다락방, 우주적 왕국이 잉태된 곳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열린 곳은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이나 화려한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자들이 모여 숨죽여 기도하던 초라한 다락방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중심부’를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세상이 외면한 ‘주변부’에서 새로운 역사의 줄기를 뽑아내십니다.
그 다락방에는 화려한 전략도, 세상을 압도할 숫자도,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한 가지, 바로 **’전심으로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크기가 아니라, 그 영혼이 향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이 통찰은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프로그램보다 기도가, 과시보다 사랑이, 속도보다 순종이 앞설 때 교회는 비로소 하늘의 질서를 이 땅에 투영하는 거울이 됩니다. 다락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기도의 불씨는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지극히 작고 연약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면 시대를 뒤흔드는 씨앗이 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이 보여주는 거룩한 역설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증언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Already)’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아직(Not Yet)’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씨앗은 뿌려졌으나 추수의 때는 오지 않았고, 새벽빛은 밝았으나 정오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우리를 현실 도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고 변혁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에 여전히 부조리와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복음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증인(Martyr)’**으로 부름받았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내적 변화의 우선순위: 장재형 목사는 인간의 내면이 성령으로 먼저 변화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사회적 제도와 구조도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신앙의 진정성: ‘이미’ 임한 나라를 믿는 자는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담대함을 얻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유지합니다. 이 긴장 속에서 신앙은 값싼 위로를 넘어, 눈물 마르지 않은 세상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삶의 표정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현재성
결국 사도행전 1장이 여는 새 시대는 먼 미래에나 일어날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내딛는 작은 순종의 발걸음에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가정, 직장, 관계—이 먼저 ‘작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삶의 표정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관계의 변화: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던 관계가 사랑과 용서로 치환될 때.
재정의 변화: 소유의 집착에서 나눔의 기쁨으로 관점이 바뀔 때.
언어의 변화: 비난과 정죄 대신 성령의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은혜의 종착역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파송’이며, 승천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개시’입니다. 진정한 설교는 예배당의 감동으로 휘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기도를 바꾸고, 이웃을 보는 눈을 바꾸며,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나 대형 집회가 아닙니다. 성령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정직한 마음, 함께 무릎 꿇는 공동체, 그리고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도 복음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담대한 순종입니다. 한 사람을 품어주는 오래 참음, 진실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을 증명합니다. 그때, 잃어버린 낙원을 탄식하며 노래하던 인류의 슬픔 위로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방관자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세상의 어둠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부활의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그 웅장한 천장화 사이에서 유독 관람객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는 형상이 있습니다. 바로 거장 미켈란젤로가 형상화한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고뇌에 잠긴 그의 모습은, 단순히 한 인간의 우울함을 넘어선 형용할 수 없는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처진 어깨와 깊게 파인 미간에는 개인의 불행이 아닌, 무너져가는 시대와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을 향한 ‘거룩한 애통’이 서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근심 없는 상태’가 곧 행복이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고린도후서 7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 이 시대 성도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신앙의 원동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제시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붓 끝으로 표현해낸 예레미야의 그 고귀한 고뇌가 과연 우리의 영혼 안에도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1. 두 종류의 슬픔: 나를 파괴하는가, 영혼을 살리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두 가지로 정교하게 분류했습니다.
세상 근심 (Worldly Sorrow): 철저히 ‘자기 중심성’에 뿌리를 둡니다.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거나, 경제적 손실을 입거나, 남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영혼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결국 허무와 사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Godly Sorrow):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죄악을 아파하고, 진리가 가려진 세상을 보며 눈물 흘리는 통회입니다. 이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룩한 에너지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러한 거룩한 근심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완성하는 필수적인 관문임을 강조합니다. 참된 돌이킴은 가벼운 감정적 유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합해질 때 일어나는 영적 진통이며, 이 아픔을 통과할 때 비로소 후회 없는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2. 느헤미야의 수심이 가져온 기적: 성벽 재건의 설계도
이러한 신학적 원리를 삶으로 증명해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신임을 받던 그는 예루살렘 성문이 불타고 백성들이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그저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일간 금식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단계
느헤미야의 영적 여정
우리에게 주는 교훈
자각
성벽이 무너진 현실을 직시함
시대적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수용
애통
왕 앞에서 수색(愁色)이 나타날 정도의 근심
거룩한 부담감이 기도로 이어짐
결단
안락한 삶을 버리고 재건 현장으로 뛰어듦
근심이 구체적인 행동과 헌신으로 변모
오늘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역설하는 선교적 사명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느헤미야가 느꼈던 그 ‘거룩한 근심’은 결국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낙관적인 전망보다 무서운 것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불감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우는 한 사람의 기도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꿉니다.
3. 영적 파수꾼의 사명: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는가
우리는 지금 교회의 권위가 도전받고 복음의 순전함이 위협받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는 냉소나 비판이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거룩한 근심은 때로 우리의 안일한 일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신앙의 타성을 뒤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요동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영혼의 찌꺼기가 걸러지고, 우리 삶의 터전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을 보고 기뻐했던 것은, 그 아픔이 결국 그들을 정결함과 열정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는가?” 나만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세상 근심’은 과감히 털어내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거룩한 근심’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예레미야의 눈물이 훗날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는 통로가 되었듯,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진실한 눈물은 반드시 기쁨의 단을 거두는 축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결코 절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고,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키며, 가장 안전하게 천국 본향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감정의 언어를 내뱉을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언어로 서로를 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통해 볼 때, 교회 갈등의 해소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겸손’이라는 영적 체질 개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개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은 ‘내가 맞다’는 확신이 ‘상대는 틀렸다’는 공격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바울은 누가 옳은지 판가름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며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킵니다. 갈등 속에서 시선이 바뀌면 언어가 변하고, 비로소 관계의 방향도 수정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서신, 그 속에 감춰진 공동체의 아픔
빌립보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이 감옥에서 쓰인 ‘옥중서신’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갇힌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은 시종일관 기쁨(Rejoice)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기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복음의 결과물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고통은 감옥의 냉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회의 분열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며 공동체의 연합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교회가 무너지면 복음의 전진도 멈춘다는 영적 위기감을 반영한 목회적 탄식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우리가 화려한 예배 형식에만 치중한 채, 성령의 교제와 사랑의 위로가 사라지는 내부의 균열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날카롭게 묻습니다.
관계와 환대로 시작된 교회, 조직과 파벌로 변질되다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빌립보 교회의 태동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히 로마화된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복음은 가치관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울이 강가 기도처에서 만난 루디아와 여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이 ‘하우스 처치’가 된 사건은 초대교회가 제도적 조직이기에 앞서 관계와 환대로 숨 쉬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헌신과 눈물, 기도로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이러한 초심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딱딱한 조직이 되고, 조직은 이내 파벌로 갈라지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동역의 깊이만큼 깊어진 상처
빌립보 교회 탄생에 핵심적이었던 여성들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른 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에서 피할 수 없는 긴장이라고 분석합니다. 사역이 깊을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동일한 무게로 양쪽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이는 법적인 판결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처방입니다. 교회는 죄를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자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닮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자비가 권면의 본질입니다.
갈등을 녹이는 네 가지 영적 토대
빌립보서 2장 1절이 제시하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는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권면: 잘못을 파헤치는 칼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의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설득입니다.
사랑의 위로: 상대를 정죄하기 전에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복음적 온기를 부여합니다.
성령의 교제: 인간적인 타협을 넘어, 상대를 ‘문제’가 아닌 ‘기도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긍휼과 자비: 징계의 언어로 얼어붙은 공동체의 기류를 다시 녹여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 하라”는 의미는 성격이나 취향의 통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각자의 위치를 조정하는 ‘방향성의 일치’입니다. 나를 변호하고 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본능적 계산서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실재적 능력입니다.
케노시스: 내려감이 곧 새로움의 길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갈등의 해법을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연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비움(Kenosis)’의 신비는 우리가 왜 낮아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분쟁의 원인은 대개 ‘내가 낮아지면 손해 본다’는 두려움에 있지만, 복음은 낮아짐이 곧 구원의 방식임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듯, 교회 안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믿는 행위입니다. 분쟁의 순간에 상대의 얼굴이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해결의 시작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투영된 화해와 치유의 미학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란스러운 제자들 사이에서 고요를 유지하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중심을 권력이 아닌 십자가에 둘 때 분열은 멈춥니다.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어린양의 희생은 우리가 취향이 아닌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가족임을 일깨웁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죽은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비애는 갈등으로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죄가 아닌 공감의 언어임을 시사합니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식적인 위로보다 더 깊은 치유를 선사합니다.
회복의 실제: 말의 속도를 늦추고 경청하라
실질적인 회복은 언어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갈등 상황에서 말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은 그를 형제로 인정하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경청을 통해 자신의 확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때, 권면은 비로소 길이 됩니다. 또한 중재자는 재판관이 아닌 목자의 심정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화해의 문은 닫힙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배타적인 정결함이 아니라, 회개를 가능케 하는 포용적 자비에서 증명됩니다.
십자가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식은 지체의 통증을 함께 느끼는 교회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 분쟁 해결은 몇몇 사람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관계 맺는 법을 다시 배우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결국 빌립보서 2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침묵을 강요할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찾아옵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주님을 드러내려는 용기, 이기려는 마음 대신 살리려는 마음이 공동체의 공기를 바꿉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로 묶는 매듭입니다. 이 복음의 흐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때, 모든 갈등은 힘을 잃고 공동체는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 사건을 다룬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의 신비와 가롯 유다의 비극, 그리고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베다니 여인의 헌신을 신학·예술·음악·고전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해설한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과거 상처와 격리의 공간이 은혜와 감사의 식탁으로 변한 복음의 심장을 드러낸다. 이 자리로 이름 없는 여인이 들어와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께 쏟아 붓는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와 미래 전체를 내어놓는 결단이자,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넘어선 “사랑의 과잉”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랑을 “허비”로 규정하며 계산한다. 요한복음은 그 목소리의 중심에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비난이 진정한 정의감이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폭로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과 허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격표와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복음서와 예술·음악 속 대비(유다의 불편함과 마리아의 헌신)와 연결해 설명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제자들의 항의 합창 뒤에 예수의 “그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는 선언을 배치하듯, 예수는 이 허비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재해석한다.
여인의 행동은 순간적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직감한 영적 통찰이다. 향유는 장례용 향료였고, 여인은 다가올 죽음을 앞당겨 미리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다. 이 무모한 사랑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기 몸을 깨뜨리고 피를 쏟으실 운명의 예표이기도 하다. 설교는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로 흐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효율과 합리를 넘어선 “비효율적 풍성함”임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효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보다 먼저 기준이 될 때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유다적 합리성’에 포획되는지 경고한다. 예배·헌신·재정·사역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성과와 효율의 언어를 우선시하고, 사랑이 식을수록 계산은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비합리적 행동을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이야기가 함께 기억될 것이라 약속한다. 그의 설교는, 제도·기관·사역을 세우는 자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베다니 여인의 무조건적 사랑을 잃는 순간 유다의 계산과 다르지 않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본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인가, 허비라 비난하는 제자인가, 아니면 사랑의 현장을 불편해하며 결국 등을 돌린 유다인가. 주님의 사랑이 실제 사건으로 내 안에 자리할 때, 우리는 계산을 멈추고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을 기꺼이 찾아오신 사랑, 그녀를 변호하신 사랑, 배반할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신 사랑은 모두 ‘허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허비가 아니었다면 복음도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아까워하며 붙들고 있는가”로 바뀐다. 시간이든, 재정이든, 안전한 미래든, 베다니 여인의 옥합은 결국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할 삶의 상징이 된다.
예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다. 베다니의 향기는 이미 시몬의 집을 채웠고, 이제 우리의 일상과 예배 속을 채우기를 기다린다. 사랑을 허비라 부르지 않고 기쁨으로 선택하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세상 앞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증언이 된다.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신학적 사유 안에서 교회는 정적인 제도나 조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역동적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의 에베소서 4장 13절 강해는 바로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심장부를 해부하는 지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이 한 구절은, 장재형 목사의 해석을 통해 개인의 영적 성숙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목표와 그 실현 경로를 제시하는 거대한 신학적 아키텍처로 확장된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으로 조망하면서, 특히 종말론과 교회론을 하나의 변증법적 짝으로 설정하는 독창적 헤르메네틱스를 선보인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자들의 회집을 넘어,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이 땅 위에 선취하고 건설하는 역사적 전위대(avant-garde)로서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눈에 띄지 않는 겨자씨가 거목으로 자라나고, 소량의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리는—와 동일한 성장 원리가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이는 세상을 단번에 전복시키는 열광주의적 종말론을 지양하고, 내재적 생명력으로 점진적이고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본질을 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자라남’이라는 동사에서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며, 인체의 각 지체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의 생명을 영위하듯,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결합하여 끊임없이 성숙해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설파한다.
이러한 교회의 동력학적 성장을 추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장재형 목사는 본문이 제시하는 두 가지 축, 즉 ‘믿는 것’과 ‘아는 것’의 변증법적 통일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신학에서 신앙의 실존적 차원과 이성적 차원이 어떻게 상호 침투하며 성숙을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논리이다. 먼저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assent)를 초월하는 차원으로 규정된다. 갈라디아서 3장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를 바탕으로, 그는 믿음을 인간이 창안한 사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궁극적 진리, 즉 ‘지혜’에 대한 전인격적 수용 행위로 해석한다. 이 계시된 지혜 앞에서 인간은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예수의 단언적 선포처럼, 이 진리를 영접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0장 10절(“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을 근거로, 이 수용이 머리가 아닌 ‘마음’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속적 진리는 본질상 ‘사랑’이기에, 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로만 체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내면세계로 유입되는 유일무이한 통로로서, 모든 영적 성장의 존재론적 출발점이 된다.
반면, ‘아는 것’은 이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의 서사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지성의 여정이다. 이 ‘앎’은 명제적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사랑의 진리를 인격적 관계와 삶의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체득해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과 동의어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성숙(Matu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바울 사도가 말한 ‘충만함’과 동일시한다. 즉,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단회적으로 수납했다면, 그 이후의 신앙 여정은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탐구하며 인격 전체가 성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 ‘야다(יָדַע)’가 지적 앎을 넘어 ‘경험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관계적 의미를 포괄한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기독교의 ‘앎’이 본질적으로 ‘사랑의 지식(knowledge of love)’임을 역설한다. 이 앎의 여정 속에서 신자와 교회는 비로소‘믿음’이라는 뿌리와 ‘지식’이라는 줄기가 조화롭게 자라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믿음 없는 지식은 지적 교만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지식 없는 믿음은 맹목적 광신에 머무를 위험이 있기에, 이 둘의 유기적 통일이야말로 건강한 영적 성숙의 시금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숙의 궤적을 고린도전서 13장의 심오한 통찰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현재적 앎이 지닌 근원적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온전한 앎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을 품게 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인식의 주체성에 관한 놀라운 신학적 전회를 보여준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알게 되는 그 궁극적 지점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극대화된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먼저 나를 아셨다’는 피조물로서의 본질적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깨닫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말씀의 인식론적 번역과도 같다. 우리의 앎과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제적(a priori) 앎과 사랑에 대한 응답적 메아리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자신의 사랑의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이미 알고 사랑하시는 주님께 있음을 투철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안다’는 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마침내 온전히 깨달아, 그 사랑의 힘으로 나 또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관계적 앎의 최상급 표현이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에게 있어 영적 성장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가 심화되는 과정이며, 교회의 성숙이란 이 사랑의 네트워크가 공동체 전체를 견고하게 직조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여정을 거부하고 정체된 상태를 장재형 목사는 ‘어린 아이’라는 은유를 통해 날카롭게 진단한다. 여기서‘어린 아이’는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한 단계가 아니라, 성장을 멈춘 비정상적 상태, 즉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결여된‘영적 유아기(spiritual infancy)’에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거구의 성인이 유아적인 행동을 하며 부조화의 극치를 보였던 개인적 경험을 소환하여, 영적 성장이 결여된 신앙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부자연스러운지를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히브리서 5장의 경고처럼, 마땅히 진리의 교사가 되어 단단한 식물을 섭취해야 할 성도가 여전히 젖병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연단을 게을리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성숙한 신자는 베드로전서 3장의 권면처럼, 세상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물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그 이유를 변증할 수 있는 지적·영적 준비를 갖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아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하는 대목이다.
영적 유아 상태에 머물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위험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대주의와 무수한 정보의 소음 속에서 이 말씀이 갖는 현대적 적실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한 닻을 내리지 못한 영혼은 시대의 사상과 이단의 교설이라는 파도에 속절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는 ‘속임수’를 의미하는 헬라어 ‘쿠비야(κυβείᾳ)’가 주사위 던지기, 즉 도박판의 사기 기술에서 유래했음을 설명하며, 세상이 얼마나 교활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신자들을 미혹하는지를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 영적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잡고 항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통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견고한 인격의 배를 구축하는 것뿐이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성장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으로 수렴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성장의 방향성(그리스도를 향하여), 방법론(진리의 실천), 그리고 필수 환경(사랑 안에서)을 통합적으로 제시한다. 진리와 사랑은 기독교 영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두 날개와 같다. 사랑이 배제된 진리는 차가운 독단과 율법주의로 전락하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은 무원칙한 감상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흐를 수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행할 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상징하듯, 가지된 교회의 모든 생명력과 성장의 동력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서 비롯되며, 그 연합의 본질적 수액은 바로 ‘사랑’이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은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 즉 성도들의 유기적 연결망을 통해 생명력을 공급받고, 각 지체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분량대로 역사할 때, 몸 전체가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건축해 나간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역동적인 교회의 이미지를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과 겹쳐 보여주는 탁월한 성경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죽음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 즉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생명을 얻어 ‘심히 큰 군대’로 재탄생하는 이 환상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흩어진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연합하여 세워지는 신약 시대의 완벽한 예표라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사랑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지체들 간에 서로를 세워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가는 역동적인 생명 공동체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결국, 이 시대의 마른 뼈와 같은 무기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생기 안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위대한 군대로 세워지라는 강력하고 희망에 찬 예언적 선포로 귀결된다.
갈라디아서 4장은 복음의 심장으로 스며들게 하는 문이다. 신앙은 종종 정보와 논쟁이 뒤엉킨 숲으로 보이지만,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안내를 따라 이 장을 다시 읽으면 시야가 맑아진다. 모든 길은 결국 한 사건, 곧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로 수렴한다. 옷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듯, 성육신이라는 첫 단추가 맞춰질 때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큰 그림이 제자리를 찾는다. 바울은 이 정점을 “때가 차매”라는 절제된 표현으로 붙들어 둔다. 시간의 양(크로노스)이 아니라 의미의 때(카이로스)가 충만해졌을 때, 역사는 새 방향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를 이중으로 준비하셨다. 한 축은 구속사의 중심 무대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시내산의 율법, 성전과 제사의 리듬,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은 메시아를 향한 기대를 공동체의 기억 속에 새겼다. 다른 축은 세속사의 흐름이다. 로마의 평화가 길을 열고, 제국의 도로망과 헬라어의 보편성이 소통의 경계를 낮췄다. 복음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빛난다. 제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변방의 베들레헴, 그마저도 마구간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아들이 태어나셨다. 세상이 힘과 성공으로 자신을 과시할 때, 하나님은 낮아짐과 섬김으로 세상의 논리를 거꾸로 세우신다. 이 전복의 지혜가 갈라디아서 4장 전체를 관통한다.
아들의 오심이 겨냥한 목표는 분명하다. 율법 아래 갇힌 우리를 속량하시어, 마침내 아들의 명분을 주시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율법은 은혜다. 죄를 분별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그러나 거울은 진단할 뿐 치료하지 못한다. 기준은 선명해지지만, 그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 또한 적나라해진다. 바울은 이 상태를 미성년 상속자의 비유로 설명한다. 유업의 주인이 될 아이라도 자랄 때까지는 후견인의 관리 아래 종과 다름없이 산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였지만, 그 교실에 평생 갇혀 죄책감과 의무감에 눌려 사는 것이 문제다. 바로 그 막다른 골목에서 복음이 길을 연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
속량은 추상적 종교어가 아니다. 값을 지불해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시장의 언어다. 한자 ‘속(贖)’에 화폐를 뜻하는‘패(貝)’가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그 현실감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팔린 우리를 해방하시려 아들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다. 십자가는 대속의 자리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요구가 무시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충족되는 길을 예비하셨다. 구약의 대속죄일이 예고편이었다면, 십자가는 본편이다. 예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잠재우는 화목제물이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법적 근거다. 그래서 십자가는 감상이나 연민의 드라마가 아니다. 공의와 사랑이 치열하게 만나는 정점이며,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깃든 자리다.
그러나 복음은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만 풀어 주신 게 아니라 “아들”로 삼으셨다. 입양의 선언은 법적 지위를 넘어 존재의 방향을 바꾼다. 심판을 피하려 벌벌 떨던 종의 마음에서, 사랑받는 자녀의 담대함으로 옮겨 앉는 변화다. 이 변화를 우리 안에서 보증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는 호명을 일으키신다. ‘아바’는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가족의 언어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핵심이 결국 관계임을 강조한다. 멀찍이 규칙을 지키며 버티는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안길 수 있는 신뢰의 관계. 성령은 이 관계를 기념이 아닌 경험으로 바꾸신다. 그 결과, 우리는 신분을 의심하는 고아가 아니라 유업을 기다리는 상속자가 된다. 상속은 먼 미래의 약속으로만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성령의 첫 열매를 맛보는 삶이 상속의 현재형이다.
아들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사랑할 능력의 회복이며,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어서” 순종하는 힘이다. 율법이 바깥에서 채찍질한다면, 성령은 안에서부터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은 자연스럽게 5장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진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는 외부 압박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기후에서 자라는 생명이다. 우리의 몫은 악착같이 애쓰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숨 쉬는 자리를 삶의 중심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바뀐다. 우리는 보통 시계를 바라보며 바쁨과 지루함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때를 준비하신다. 기도하는 기다림, 미뤄 둔 화해를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작지만 정직한 선택,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의 섬김—이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때를 익게 한다. 카이로스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오지 않는다. 새벽의 한 구절 묵상, 따뜻한 메시지 한 줄, 조용한 배려 속에 하나님의 때가 스며든다. 그때 우리는 비교의 리듬에서 벗어나 은혜의 리듬으로 호흡하기 시작한다. 자유의 박자는 성령의 박자와 맞아떨어질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교회 역시 이 리듬을 배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도로와 헬라어를 복음의 통로로 삼았듯, 오늘의 교회는 디지털 도로와 글로벌 언어, 다문화의 광장을 복음의 그릇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수단이 목적을 삼키지 않도록 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그램보다 복음, 방법보다 본질, 성장보다 성숙이 먼저다. 이 질서가 흐트러지면 우리는 금세 “초등 학문”으로 회귀해 도덕 경쟁과 성과주의에 붙잡힌다. 갈라디아서 4장은 이 함정을 경고하며, 종의 멍에를 벗고 아들의 자유로 서라고 초대한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잠재적 심판관이나 경쟁자로 대하기보다, 함께 유업을 이을 형제로 대할 때 복음의 공기가 교회 전체에 퍼진다.
개인의 영성에서도 이 장은 실천 가능한 지침을 준다. 정체성은 성과가 아니라 은혜에서 온다. 우리는 “잘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기에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패가 겹쳐도 성령은 우리에게 붙여 주신 “아들”이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으신다. 기도가 막힐 때는 어려운 수사를 찾기보다 “아바, 아버지”라는 단순한 호명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도 해야 할 목록을 늘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먼저 찾으라. 가정과 일터에서 상대를 상속자로 대하는 작은 배려를 반복하라. 그러면 삶의 리듬이 바뀐다. 쉼이 돌아오고, 감사가 습관이 되며, 평범한 하루가 예배로 변한다. 이것이 이미 주어진 “아들의 권세”가 일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다.
목회 현장에서 장재형 목사가 주는 조언은 땅에 닿아 있다. 설교는 죄책감을 자극해 억지 순종을 끌어내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복음으로 양심을 깨워 사랑의 힘을 흘려보내는 통로여야 한다. 제자훈련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정체성의 견고화—“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선교와 사회참여 역시 아들의 자유에서 출발할 때 가장 창의적이고 오래 간다. 십자가 앞에서 공의와 사랑을 함께 배운 사람만이, 세상 속에서 진리와 자비를 함께 실천할 수 있다. 복음의 공공성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정들에서 힘을 얻는다.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은 초대장이다. 종의 옷을 벗고 아들의 옷을 입으라는 초대, 흘러가는 시간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를 붙들라는 초대, 율법의 교실을 졸업하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 이 초대는 개인의 경건을 넘어 교회의 체질과 사회를 향한 태도까지 바꿀 힘을 지녔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시간 속에서 때를 채우신다. 그러니 오늘 작은 순종으로 그때를 맞이하자. 미뤄 둔 화해를 시작하고, 약한 이에게 손을 내밀고, 정직을 선택하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기도하며 섬기자.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선다. 거기서 아들의 노래가 시작되고, 자유의 호흡이 깊어진다. 복음은 우리의 이름을 바꾼다. 종에서 아들로, 낯선 손님에서 상속자로. 갈라디아서 4장이 선포하는 이 변화를 장재형 목사의 안내와 함께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 보자. 설명보다 선물, 성취보다 은혜, 율법보다 사랑—이 세 단어가 우리의 하루를 이끌게 하자. 그러면 크로노스의 풍랑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항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의 오심으로 열어 주신,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복음의 새 시대다.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4장을 통해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현실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시선에서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기 쉬운 종교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준비하는 선봉대, 세상 속에서 복음의 길을 열어 가는 전초기지다. 이 정체성이 분명해질수록 교회는 유행하는 담론이나 일시적 감정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과 성령의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앞으로의 길을 또렷하게 그린다. 에베소서 4장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공동체의 구조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선언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하나 됨과 다양함이 함께 숨 쉬어야 하듯, 교회도 한 분 주님 안에서의 연합과 각 지체에게 주어진 은사의 다양성이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은사를 바라보는 태도를 먼저 바로잡는다. 눈에 잘 띄는 은사가 박수를 독점하고 보이지 않는 섬김이 하찮게 여겨질 때, 공동체는 곧 균형을 잃는다. 그는 어떤 은사도 우열을 매길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주어진 선물이며, 서열을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일으키는 도구다. 예배팀과 교육, 선교와 행정, 돌봄과 재정이 서로 연결되어 흐를 때 교회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강해진다. 이러한 협력은 경쟁의 문화를 협력의 문화로 바꾸고, 독점의 태도를 나눔의 태도로 교체한다. 그 결과 각 지체는 자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전체는 한 몸의 운동성을 회복한다. 장재형 목사는 리더십의 핵심을 “누가 더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모두가 제 은사를 따라 섬기도록 길을 여는가”에 둔다.
직분의 목적에 대한 설명도 분명하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는 모든 일을 대신하는 만능인이 아니다. 그들의 사명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일이다. 설교가 성경 공부와 멘토링으로 이어지고, 훈련이 실제 섬김과 선교의 현장으로 연결될 때 교회는 관람형 구조에서 참여형 구조로 전환된다. 이 전환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변화를 묵묵히 축적하면 체질이 달라진다. 한 사람이 떠맡던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누고, 새신자가 초반부터 작은 책임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만으로도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감이 깊어진다. 실패가 생기면 좌절이 아니라 학습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면 직분은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믿음과 지식의 균형은 장재형 목사가 가장 섬세하게 다루는 주제다. 그는 히브리적 전통에서 ‘안다(야다)’는 것이 정보 축적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와 참여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머릿속 데이터를 늘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삶 속에서 배우는 과정이다. 그래서 믿음 없는 지식은 논쟁만 키우고, 지식 없는 믿음은 쉽게 열광하다 식어 버린다. 교회는 교리 교육과 성경적 세계관 훈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예배와 기도, 성찬과 찬양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도록 돕는 두 날개가 필요하다. 이론과 체험이 서로를 견인할 때 신앙은 건조한 관념도, 감정의 파고에 매이는 감상주의도 아니다. 배운 대로 살고 산 대로 배우는 선순환이 일상에서 자리 잡으면, 교회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성장을 맛본다.
영적 성숙은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여정이다. 장재형 목사는 초기의 뜨거운 열심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 상태에 머무르는 위험도 경고한다. 가치관이 단단히 세워지기 전에 유행 사상과 왜곡된 가르침이 들어오면 미성숙한 신앙은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단계별 양육이 중요하다. 새신자에게는 복음의 기초와 공동체 생활을, 중간 단계의 성도에게는 성경의 큰 흐름과 교리의 체계를, 오래된 성도와 지도자에게는 해석학, 변증, 멘토링 역량을 가르친다. 이런 구조가 갖춰지면 “젖을 먹던” 사람이 “단단한 음식”도 소화하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성숙의 표지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드러난다. 갈등에서 자기 주장만 앞세우던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줄 알게 되고, 인정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늘어날 때, 그 교회는 분명히 자라고 있다.
사랑은 연합의 비밀이다. 사랑 없는 활동은 소음이 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칼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을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의지이자 습관으로 설명한다. 모욕을 당했을 때 되갚지 않고,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며, 책임을 나누는 태도가 사랑이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성령의 바람과 사랑의 끈으로 서로 연결될 때 공동체는 큰 군대처럼 선다. 에베소서 4장의 권면은 짧지만 핵심을 찌른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자라게 하며”(엡 4:15–16). 이 말씀은 교회의 연합과 성숙이 감정의 친밀감이나 행정적 일치만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즉 진리와 사랑이 한 몸처럼 작동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자란다.
현대의 가치관이 뒤섞인 환경에서 분별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대주의와 혼합주의는 그럴듯한 언어로 신앙을 잠식한다. 장재형 목사는 성경과 신앙고백의 골격을 탄탄히 세우라고 권한다. 분별은 의심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공동체를 지키려는 돌봄이다. 신앙고백의 전통과 교회사적 사례를 배우고, 오늘의 이슈를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훈련을 받으면, 소셜미디어의 격한 여론과 즉흥적 감정에 덜 흔들린다. 상호 점검과 권면의 문화도 중요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로운 피드백을 나누는 습관이 자리 잡으면,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는 명령을 일상의 언어로 살게 된다. 묵상과 기도가 지적 탐구를 넓히고, 탄탄한 공부가 경건의 삶을 구체화하는 선순환이 여기서 생겨난다.
디지털 환경 속 사역 방식은 균형이 관건이다. 온라인은 복음을 빠르게 전하고 학습 자료를 넓게 공유하는 데 큰 장점이 있다.그러나 공동체성은 대면 관계에서 자란다. 장재형 목사는 온라인은 보조, 오프라인은 중심이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현장 예배와 소그룹, 식탁 교제, 함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 같은 대면 경험이 교회 문화를 지탱하고, 온라인 콘텐츠는 그 경험을 확장하고 보완한다. 가정예배를 다시 세우고, 팀 사역에서 동료의 강점을 기록해 격려하고, 한 주에 한 번 이웃을 축복하는 습관 같은 구체적 실행이 대표적이다. 작은 실천이 쌓이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분위기가 변하면 구조가 바뀐다.
공공성을 향한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분리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연합과 성숙은 공적 책임을 통해 검증된다.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고,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작은 행위가 일상에 스며들 때 교회는 신뢰를 얻는다. 이 과정이 특정 이념의 구호로 흐르지 않도록 복음의 본질을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은 이념을 넘어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새롭게 한다. 말의 크기보다 삶의 일관성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작은 선함이 오래 축적될 때 도시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실천적으로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봉사 참여율, 선교의 실제적 열매, 지역사회 신뢰도 같은 항목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숫자 중심 성과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실제 열매를 확인하는 균형 감각이 여기서 빛난다.
교회 간 연대는 사역의 지평을 넓힌다. 같은 도시에 있는 여러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서 손잡으면 교육과 돌봄, 선교와 자원봉사에서 시너지가 커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복음적 연합이라 부른다. 복음적 연합은 모든 사안에서 같은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성경의 권위를 중심으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협력하는 문화다. 강점과 약점을 솔직히 나누고, 자원을 공유하며, 서로의 경험을 배워 갈 때 적은 힘도 큰 파장을 만든다. 이 연합은 교회가 세상과 경쟁하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공적 주체임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교회의 다양한 전통이 조화롭게 어울릴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현장에서 드러나는 리더십의 핵심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로 흐른다. 지도자는 단호함과 온유함을 함께 배워야 한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는 언어를 선택하고, 갈등을 해결할 때에도 공동체의 미래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리더십 아래에서 성도들은 방어적 태도를 내려놓고 서로에게 배우며 더 나은 길을 찾는 토론 문화를 익힌다. 이 문화가 정착하면 혁신은 상처 없이 일어난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공동체를 오히려 성숙하게 만든다. 그 결과 교회의 구조와 프로그램, 언어와 관계가 서서히 새로워진다.
결국 장재형 목사가 에베소서 4장으로 비추는 교회의 비전은 명료하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고,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로 서로를 세우며, 믿음과 지식의 균형 속에서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자라가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띠이며, 분별은 공동체를 지켜 주는 지혜다. 성숙은 화려한 행사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늘 더 온유한 말을 선택하고, 내일 더 기꺼운 헌신을 실천하며, 모레 더 정직한 결정을 내리는 작은 걸음이 성숙의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길이 이상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현실적 약속이며, 이미 많은 공동체가 경험한 복음의 능력이다.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응답하는 용기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찾아 봉사의 자리에 서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말씀과 기도로 분별을 연마하는 삶, 이것이 곧 교회의 연합과 성숙을 향한 실제적 발걸음이다. 이런 작은 순종이 내일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가 세상을 섬기는 교회를 세운다. 흔들림 많은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더 단단히 연결되고 더 따뜻하게 사랑하며 더 지혜롭게 자라가야 한다. 이 길을 안내하는 목회의 나침반으로,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4장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주고 실천 가능한 계획으로 제시한다. 그 비전에 응답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다.
Le chapitre 21 de l’Évangile de Jean est souvent appelé « l’épilogue » ou encore « le supplément » du récit. En effet, Jean 20.31 énonce déjà clairement l’objectif de cet Évangile : « Mais ces choses ont été écrites afin que vous croyiez que Jésus est le Christ, le Fils de Dieu, et qu’en croyant vous ayez la vie en son nom. » On peut donc penser que l’auteur a déjà communiqué de façon suffisante le but et la conclusion de son ouvrage à la fin du chapitre 20 : faire croire que Jésus est le Fils de Dieu et, par cette foi, faire accéder à la vie. Le chapitre 21 apparaît alors comme une sorte de récit additionnel, une postface qui raconte la suite, montrant la vie des disciples après la conclusion de l’histoire, ainsi que le dernier message du Seigneur et, plus largement, la direction missionnaire et pastorale à laquelle l’Église est appelée.
Le chapitre 21 contient un passage particulièrement important. Les versets 1 à 14 dépeignent la scène au lac de Tibériade (mer de Galilée), où sept disciples pêchent et rencontrent le Jésus ressuscité ; on y lit notamment le récit miraculeux de la prise de 153 grands poissons. La suite du texte relate comment Jésus, après avoir demandé trois fois à Pierre « M’aimes-tu ? », lui confie la mission de « faire paître ses brebis ». Cette triple injonction (et, plus largement, à l’ensemble des disciples et responsables d’Église) illustre le service pastoral et montre en quoi consiste véritablement « prendre soin du troupeau de Dieu ». Puis, la fin du chapitre traite des paroles de Jésus concernant Jean : « Si je veux qu’il demeure jusqu’à ce que je vienne, que t’importe ? », évoquant la notion du « temps » et du « moment » eschatologiques. Cette parole, dans sa dimension existentielle et eschatologique, complète la « Grande Mission » (Mt 28) sous un autre angle. Ainsi, l’Évangile de Jean nous présente, au-delà de la grande vérité « Jésus est le Fils de Dieu, et en croyant en son nom vous avez la vie », la façon dont la communauté ecclésiale se prépare concrètement au « retour du Seigneur » et à la « fin de l’histoire ».
La scène la plus marquante de ce chapitre est sans doute celle du lac de Tibériade : le Jésus ressuscité qui se manifeste aux disciples en train de pêcher. Le caractère nouveau et mystérieux de l’événement est frappant. Les disciples étaient repartis pêcher, mais ils n’avaient rien pris de toute la nuit. Même après la crucifixion de Jésus (et malgré sa résurrection), le monde ne semblait pas avoir radicalement changé. En réalité, les circonstances leur étaient difficiles. On pourrait appeler cela « le retour des disciples », qui symbolise parfois la léthargie spirituelle de l’être humain, l’expérience de l’échec, de l’espoir déçu, et finalement le retour à l’ancienne vie et aux habitudes familières.
Lorsque Jésus, se tenant sur le rivage, leur demande : « Les enfants, n’avez-vous pas quelque chose à manger ? », les disciples répondent : « Non. » Aussitôt, Jésus leur ordonne de jeter le filet du côté droit de la barque : « Jetez le filet à droite de la barque, et vous trouverez. » Ce n’est ni à gauche, ni derrière, ni devant. Selon l’interprétation du pasteur David Jang et d’autres prédicateurs, « la droite » symbolise la direction clairement indiquée par le Seigneur. Dans l’Évangile, la « direction » est à la fois un ordre de vie et une attitude d’obéissance. Nous sommes enclins à jeter le filet du côté qui nous est familier ou qui nous semble logique, mais Jésus nous dit distinctement : « À droite ! » Aujourd’hui encore, l’Église doit vérifier sa direction devant Dieu — la direction de la mission et du pastorat — et s’y soumettre.
En obéissant à cette parole, les disciples prennent une quantité abondante de poissons, à tel point que le filet est trop lourd à tirer (Jn 21.6). Cette expérience rappelle l’épisode de Luc 5, lorsque Jésus dit à Pierre de « jeter le filet en eau profonde ». Pierre, alors bouleversé, confesse : « Seigneur, retire-toi de moi, car je suis un homme pécheur. » Et juste après, Jésus l’appelle à devenir « pêcheur d’hommes ». Dans Jean 21, cette même vocation est en quelque sorte « confirmée » ou « parachevée ». Le fait que Jésus dise : « Jetez le filet à droite » et qu’ils prennent 153 gros poissons préfigure la façon dont, un jour, les disciples iront dans le monde « pêcher » et rassembler un grand nombre d’hommes de toutes les nations pour le Royaume de Dieu.
Au verset 11, un détail attire l’attention : « Malgré leur grand nombre, le filet ne se déchira pas. » Normalement, avec autant de gros poissons, le filet aurait dû craquer. Mais le texte suggère un aspect presque surnaturel. Depuis l’époque des Pères de l’Église, on a beaucoup commenté le sens de ce passage. Certains expliquaient ainsi : « La Parole de Dieu (ou l’Évangile) ne se déchire jamais. » Augustin, entre autres, portait une grande attention au nombre 153. Dans la pensée de l’Église primitive, cette somme n’était pas pure coïncidence. Certains, s’inspirant de la guematria hébraïque (l’art de donner une valeur numérique aux mots), faisaient remarquer que « Bənē hāʾĔlōhīm » — « fils de Dieu » — avait pour valeur 153. Les avis divergent quant à la justesse de ce calcul, mais il est significatif que l’Église ancienne ne voyait pas ce nombre comme un simple hasard. Pour elle, « 153 » symbolisait l’ensemble de ceux qui appartiennent au Seigneur, la communauté des croyants qui, finalement, entrent joyeusement dans le Royaume de Dieu.
Il faut se rappeler qu’au temps de l’Église primitive, le symbole du poisson était un signe de reconnaissance pour les chrétiens persécutés. Le mot grec ΙΧΘΥΣ (Ichthus) — « poisson » — reprend les initiales de « Jésus Christ Fils de Dieu Sauveur ». Les croyants dessinaient donc un poisson pour se reconnaître en secret. Jean 21 illustre de façon concentrée cette symbolique. Ainsi, « Jetez le filet à droite » peut être compris comme l’assurance que lorsque l’Église s’engage résolument dans l’œuvre de l’Évangile, le filet ne se déchirera pas, et la moisson sera abondante. Cette conviction soutient le ministère de beaucoup de pasteurs, dont David Jang, qui proclament « la puissance et la Parole de Dieu sont bien plus que suffisantes et demeurent débordantes de dynamisme » pour mener à bien l’évangélisation.
Un autre aspect remarquable du récit : Jésus avait déjà préparé un feu de braise sur lequel un pain et un poisson étaient en train de cuire (Jn 21.9). Même si les disciples viennent d’attraper beaucoup de poissons, Jésus leur avait déjà tout apprêté. On y voit généralement l’allusion à la « sainte Cène ». On pense aussi à l’épisode des disciples d’Emmaüs (Lc 24) à qui Jésus a rompu le pain, ouvrant leurs yeux, ou encore au chapitre 6 de Jean (la multiplication des pains) où Jésus se révèle comme « le pain de vie ». Les poissons apportés par Pierre et les autres disciples représentent le fruit de leur labeur et de leur obéissance, mais tout vient d’abord d’une table déjà dressée par Jésus. Le salut procède du même principe : c’est Dieu qui, le premier, prépare la table de la grâce, et l’être humain n’est qu’un invité. Ainsi, ces poissons et ce pain sur le feu de braise ont un sens théologique : même si l’effort et l’engagement de l’homme sont importants, la base de tout est « la grâce préalablement offerte par le Seigneur ».
À partir du verset 15, Jésus s’adresse à Pierre : « M’aimes-tu ? » — et cela trois fois. À chaque réponse, Jésus confie à Pierre la responsabilité de « paître ses brebis ». Dans Luc 22.34, Jésus avait annoncé que Pierre le renierait trois fois ; cela s’est réalisé dans la cour du grand-prêtre, où il a publiquement clamé : « Je ne le connais pas. » Mais le Ressuscité vient guérir cette blessure et ce triple reniement, tout en confirmant à nouveau l’appel de Pierre. Ce dernier, après avoir reçu l’Esprit au chapitre 2 des Actes, servira avec hardiesse. Dans Actes 4, il déclare devant le grand-prêtre Anne : « Il n’y a de salut en aucun autre nom » (Ac 4.12). Voilà la puissance de l’Évangile agissant dans sa vie.
En somme, Jean 21 délivre deux messages centraux : la mission (l’évangélisation) et le pastorat (prendre soin des brebis). Jésus fait vivre à ses disciples une pêche miraculeuse afin de préfigurer « l’évangélisation de toutes les nations », puis il enjoint Pierre — et par extension tout responsable de communauté — de paître son troupeau, soulignant le « soin pastoral envers le peuple de Dieu ». Et tout cela se produit alors même que Jésus a déjà tout préparé (le feu, le pain et le poisson), rappelant l’importance du culte, de la communion fraternelle et du Saint-Esprit. Ainsi, quand le pasteur David Jang prêche sur ce texte, il insiste sur le fait que l’Église doit impérativement tenir ensemble « l’évangélisation » et le « pastorat ». Elle doit être ouverte au monde qui ne connaît pas l’Évangile, et simultanément assumer la responsabilité de nourrir et faire grandir ceux qui sont déjà en son sein.
Mais la seconde moitié du chapitre 21 met aussi en lumière la question : « Quand le Seigneur reviendra-t-il ? » L’entourage de Jésus, dans l’Église primitive, se demandait continuellement à quel moment aurait lieu le retour du Christ. Dans Matthieu 24, Jésus annonce la venue de la fin des temps ; dans Actes 1.6-7, quand les disciples lui demandent : « Est-ce maintenant que tu vas rétablir le royaume d’Israël ? », Jésus répond : « Il ne vous appartient pas de connaître les temps ou les moments. » C’est exactement ce qu’illustre Jean 21.23 : « Si je veux qu’il demeure jusqu’à ce que je vienne, que t’importe ? » Le « temps » et le « moment » relèvent de la souveraineté de Dieu. Ainsi, plus important que « Quand reviens-tu, Seigneur ? » est « Seigneur, que devons-nous faire ? » — et la réponse est : « Allez et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et prenez soin de mes brebis. » Ce même appel retentit aujourd’hui : l’Église, dans l’attente de la fin de l’histoire, doit être active et vigilante, non pas spéculer sur la date du retour de Jésus, mais se mettre au service, en évangélisant et en prenant soin du troupeau.
Au fil du texte, on constate donc que le chapitre 21 de Jean, bien qu’il succède au grand propos de Jean 20 (« Jésus est le Fils de Dieu, et quiconque croit en lui a la vie »), prolonge cette vérité en indiquant à la communauté de foi les voies concrètes de la mission, de la pastorale et de l’espérance eschatologique. La parole « Fais paître mes brebis » s’adresse non seulement à Pierre, mais aussi à tous les dirigeants d’Église et à tous les croyants : prenez soin de ceux que le Seigneur vous a confiés, aimez l’Église, éduquez la nouvelle génération (les jeunes, les enfants), formez-les dans la foi. L’annonce de l’Évangile et la responsabilité du soin pastoral vont de pair. Cela inclut la vocation de « recueillir dans le filet de l’Église » les multitudes qui, comme les 153 grands poissons, afflueront de partout pour connaître le Seigneur.
Le pasteur David Jang, dans ses divers enseignements, s’appuie sur ce chapitre pour plaider en faveur d’une Église « qui embrasse le monde », une communauté missionnaire tournée vers l’humanité entière, mais aussi capable d’un solide ministère pastoral. L’accomplissement ultime pour l’Église est « le soin aimant du troupeau » et « l’évangélisation tous azimuts ». Perdre l’équilibre entre ces deux pôles, c’est risquer une dérive. Si on se focalise uniquement sur la pastorale à l’intérieur, on néglige la mission vers l’extérieur ; à l’inverse, si on se consacre exclusivement à l’évangélisation, on risque de ne pas donner l’accompagnement nécessaire aux croyants. Jean 21 nous exhorte à tenir ces deux volets ensemble. Jésus appelle ses disciples à « jeter le filet à droite » (c’est-à-dire suivre la direction venue d’en haut) et à « paître ses brebis » (assurer la pastorale).
Dans la perspective historique de l’Église primitive comme dans la vision contemporaine de l’Église, cette exégèse demeure valide. Nous péchons souvent en enfermant dans notre logique humaine « les temps et les moments ». On croit à un retour proche de Jésus, mais on vit comme si cela n’était pas notre affaire, ou alors on se replie sur nous-mêmes, déconnectés du monde. Jean 21 nous rappelle plutôt : « Même si vous ignorez le moment précis du retour du Seigneur, accomplissez fidèlement la mission qui vous a été confiée. » Cette mission est la prédication de l’Évangile dans toutes les nations et le soin du troupeau de Dieu. La véritable « dernière volonté » de Jésus (allier « jetez le filet » et « faites paître mes brebis ») montre que ce n’est qu’en tenant ensemble l’un et l’autre que l’Église peut réellement bâtir.
La fin du chapitre, avec l’exemple de Pierre parmi les sept disciples revenus pêcher en Galilée, enseigne aussi que l’histoire ne se construit pas exclusivement par nos efforts humains. On voit bien que la pêche miraculeuse n’a eu lieu qu’en réponse à la parole du Seigneur. De même, l’histoire va là où Dieu le veut, selon sa providence. Pour saisir la finalité de l’histoire (le but ultime, le sens eschatologique), nous avons besoin d’une « vision biblique » qui nous garde de l’individualisme et de l’égocentrisme. C’est pourquoi l’Église doit enseigner aux jeunes et aux nouvelles générations la perspective biblique sur le monde et sur l’histoire : l’histoire humaine ne dépend pas du hasard ni seulement de forces matérielles, mais avance sous la souveraineté de Dieu vers la rédemption ultime et le jugement, lors du retour de Jésus-Christ.
Ainsi, le message central de Jean 21 porte sur « l’obéissance missionnaire et la responsabilité pastorale » dans la réalité nouvelle de la résurrection du Christ.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ce chapitre « d’essence de la mission et du pastorat dans la tension qu’ils forment », incitant l’Église à la pratique concrète : l’implantation de nouvelles communautés, la création d’écoles, l’emploi des médias, l’investissement culturel, afin de répandre l’Évangile dans 153 régions du monde (ce qu’on appelle la « vision 153 »), de former et de nourrir toutes sortes d’âmes par la Parole. Ce chiffre symbolise, tel un écho, la grande pêche de Jean 21 : l’appel à recueillir de toutes les nations le peuple de Dieu.
Lorsqu’elle s’engage à porter l’Évangile dans le monde, l’Église subit de multiples pressions et tentatives de diversion. Dans ce contexte, il faut d’autant plus s’attacher à la « droite » indiquée par Jésus, autrement dit à la « direction exacte » voulue par Dieu. Selon David Jang et d’autres responsables missionnaires, c’est ainsi que l’on envoie des missionnaires aux quatre coins de la terre, que l’on intègre les mutations sociales et culturelles, sans pour autant trahir l’essence de l’Évangile. Le filet (la Parole de Dieu) ne se déchire jamais, même s’il ramène beaucoup de poissons, car il a la capacité de tout contenir. Seul problème : quand l’Église perd sa boussole et jette le filet ailleurs, ou abandonne carrément la pêche. Rester fidèle à ce message est la condition pour goûter à la « plénitude » et à la « vie » que décrit Jean 21.
L’histoire de la reconnaissance du Ressuscité — « C’est le Seigneur ! » (Jn 21.7) — indique également comment nous devons vivre la foi en la résurrection aujourd’hui : pas seulement la confesser de façon théorique, mais réellement rencontrer le Ressuscité dans notre quotidien et suivre la route qu’il nous montre. Au moment où Pierre entend : « C’est le Seigneur », il se jette à l’eau, dans un élan passionné. Les exégètes y voient le signe que Pierre a retrouvé un amour ardent et une foi renouvelée, libérée de la culpabilité qui le rongeait après son triple reniement. De fait, cette plongée illustre « un nouveau départ ».
En définitive, Jean 21 décrit le « nouveau départ » qui suit la conclusion apparente de l’Évangile au chapitre 20. Jésus a vaincu la mort par sa résurrection et s’est montré à ses disciples. À présent, les disciples sont face à un monde qu’ils n’avaient pas imaginé. Tout a changé, mais ils se retrouvent encore sur les bords du lac de Galilée, confrontés à leurs responsabilités. Ces responsabilités sont l’évangélisation et le soin des brebis. Pierre, après l’événement décisif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n’a pas reçu une mission insignifiante, bien au contraire. Le Seigneur ne les a pas abandonnés : il les précède, il prépare le feu et le repas, et dit : « Jetez le filet à droite. » L’Église d’aujourd’hui, malgré l’évolution des temps, demeure sous la même guidance et le même appel. Plus l’eschaton approche, plus il est essentiel de préserver « la mission, le pastorat, la conscience de l’histoire et du monde, et la formation de la génération suivante ».
2. La mise en pratique de l’évangélisation et du pastorat, et l’importance de la conscience de l’histoire et du monde
En prêchant sur Jean 21, le pasteur David Jang met particulièrement l’accent sur les deux pôles « évangélisation et pastorat ». Il appelle ce chapitre « le chapitre de l’évangélisation et du pastorat », soulignant qu’il s’agit d’un axe majeur pour la communauté de croyants, depuis l’Église primitive jusqu’à nos jours. L’évangélisation correspond au fait de « jeter le filet à droite de la barque », comme l’ordonne Jésus aux disciples qui, eux, avaient pêch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Quant au pastorat, il découle du triple appel adressé à Pierre : « Pais mes brebis », qui est à la fois un témoignage d’amour et une mission de soins envers le troupeau, à l’intérieur comme à l’extérieur de la communauté. L’un ne va pas sans l’autre. Un déséquilibre serait fatal : se concentrer uniquement sur l’intérieur peut nous faire oublier la mission extérieure, tandis qu’une focalisation exclusive sur l’évangélisation risque de délaisser la formation et l’accompagnement spirituel des convertis.
Regardons d’abord l’évangélisation : après sa résurrection, Jésus rencontre les disciples en Galilée, selon les Évangiles. Matthieu 28 montre aussi Jésus s’adressant à ses disciples sur une montagne de Galilée, où il prononce la « Grande Mission » : « Allez,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les baptisant au nom du Père, du Fils et du Saint-Esprit, et leur enseignant tout ce que je vous ai prescrit » (Mt 28.19-20). Il déclare : « Tout pouvoir m’a été donné dans le ciel et sur la terre. Allez donc… » Dans Actes 1.8, il insiste encore : « Vous recevrez une puissance, le Saint-Esprit survenant sur vous, et vous serez mes témoins à Jérusalem, en Judée, en Samarie, et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 En intégrant ces textes à la leçon de Jean 21, David Jang soutient que l’abondance de poissons dans le filet, qui reste intact, est un symbole de la riche moisson pour ceux qui obéissent à la direction (« la droite ») donnée par le Seigneur. Sur le terrain missionnaire, nous pouvons être tentés de ne recourir qu’à nos propres stratégies, statistiques ou expériences, mais chaque génération et chaque culture sont différentes. Seule la voix du Seigneur peut nous indiquer où et comment jeter le filet. Quand l’Église entreprend un programme missionnaire par simple calcul humain, on risque d’aboutir à un échec ou à un enlisement. Mais si l’on s’aligne sur les instructions divines, même dans des circonstances précaires, on peut voir se manifester le « réveil » et l’extension vivifiante de l’Église, à l’image de celle de l’Église primitive.
Pour David Jang, l’évangélisation fait partie intégrante de la nature même de l’Église. S’appuyant sur la prophétie des 153 poissons, il évoque aussi la « vision 153 », c’est-à-dire l’ambition d’évangéliser le monde entier. Dans certains de ses enseignements, il explique comment les communautés chrétiennes peuvent monter des écoles, des séminaires, des hôpitaux, des centres médiatiques, afin de former de nouvelles générations et d’apporter une aide concrète, tout en prêchant l’Évangile. Ce n’est pas du « fétichisme numérique » ; c’est l’affirmation que « le filet de Dieu ne se déchire pas », que la Parole de Dieu est stable et capable de rassembler un grand nombre d’âmes. Les disciples ont passé la nuit à pêcher en vain, mais sur la simple parole de Jésus : « Jetez le filet à droite », ils ont obtenu une prise inouïe. Cette dynamique se prolonge aujourd’hui : la mission est l’œuvre de Dieu, et il faut s’y engager par la foi et l’obéissance.
En parallèle à cette activité missionnaire, l’Église doit déployer le pastorat. Lorsque Jésus dit à Pierre, par trois fois : « M’aimes-tu ? … Pais mes brebis », cela ne se résume pas à une simple réconciliation sentimentale : c’est un mandat solennel, une injonction à protéger, guider et nourrir le troupeau. Au sein de l’Église, les responsables ont la charge de conduire et de soigner les brebis, de leur enseigner fidèlement la Parole de Dieu et de guérir leurs blessures. Sans un solide ministère pastoral, l’Église risque de ressembler à un grand rassemblement de gens non enracinés, sans croissance ni profondeur. Ainsi, l’évangélisation et le pastorat sont deux piliers aussi indispensables l’un que l’autre. Le Seigneur demande à Pierre de proclamer l’Évangile (cf. Actes 2), mais aussi de prendre soin des croyants (Jean 21). L’union des deux est un principe fondamental : « Jetez le filet » et « Prenez soin de mes brebis ».
Le pastorat ne se limite pas aux frontières de l’Église : il s’étend à la société. Pour le pasteur David Jang, aimer et nourrir les brebis, c’est aussi tendre la main aux pauvres, aux marginaux, à tous ceux qui souffrent, et manifester concrètement l’amour du Christ. Dans l’histoire, l’Église, depuis les premiers siècles, a établi des écoles, des orphelinats et des hôpitaux, assurant ainsi un soutien culturel et social. Cette diaconie s’est élargie au fil des époques. On peut y voir le prolongement de « pais mes brebis », qui ne s’adresse pas seulement à l’intérieur, mais se tourne vers l’extérieur. Pour cela, l’Église doit disposer d’une vision historique et mondiale, c’est-à-dire ne pas se recroqueviller sur sa communauté, sa culture ou sa nation, mais recevoir l’appel d’Abraham : « Quitte ton pays et ta parenté » (Gn 12.1), pour être une bénédiction envers toutes les nations. David Jang insiste souvent sur cette « conscience planétaire » et cet « enseignement d’une vision biblique de l’histoire » pour les jeunes générations, afin qu’ils ne restent pas centrés sur eux-mêmes, mais qu’ils embrassent la perspective du Royaume de Dieu.
Aujourd’hui, beaucoup de jeunes sont immergés dans la culture postmoderne, axée sur l’individu et le présent. Leur désir est « mon plan de carrière, mon épanouissement », sans trop se soucier d’« où va le monde ». Or, les Écritures nous demandent : « Allez dans le monde entier et prêchez l’Évangile à toute créature » (Mc 16.15), et « Ne vous conformez pas au siècle présent » (Rm 12.2). Cela n’est pas qu’une question de salut personnel ; c’est la participation au plan de Dieu pour le salut du monde. Si l’Église n’inculque pas cette perspective historique et universelle à la prochaine génération, on risque de perdre le sens de la « pêche miraculeuse ». C’est pourquoi la leçon de Jean 21 — « Jetez le filet à droite » et « Pais mes brebis » — ne s’adresse pas qu’aux seuls responsables ; elle concerne aussi les parents, les éducateurs, toute la communauté de foi.
« Maître, nous avons pêch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mais sur ta parole je jetterai le filet » (cf. Lc 5) : cet état d’esprit permet de passer du néant au miracle, du vide à l’abondance. Sur le plan de l’évangélisation mondiale, les 153 poissons représentent « la totalité des enfants de Dieu » qui entrent dans le filet de l’Évangile. Comme le souligne David Jang dans ses sermons, « le filet, c’est la Parole de Dieu, et il ne se déchire pas. Le plus important n’est pas de craindre la déchirure, mais de se demander comment y faire entrer plus d’âmes. » Dire que « le filet ne se déchire pas » signifie que l’Évangile a une force indestructible et une capacité illimitée à attirer les pécheurs vers la vie.
Jean 21 exige donc de conjuguer évangélisation et pastorat sous l’horizon de l’eschatologie. Le texte montre le désir ardent de Dieu : que l’Église s’étende sans cesse tout en veillant à la solidité interne du troupeau. À travers l’histoire — Rome antique, Moyen Âge, Réforme, modernité — chaque fois que l’Évangile est prêché, on voit des âmes « prises dans le filet », et on voit des communautés se constituer et paître les brebis. Bien sûr, il y a eu des erreurs et des égarements, mais l’idée première demeure : « Jeter le filet » et « faire paître ». Quant au « Quand reviendra-t-il ? », la réponse est toujours la même : « Les temps et les moments appartiennent au Père. » Notre responsabilité est de persévérer dans l’obéissance. C’est le sens de la parole : « Si je veux qu’il demeure jusqu’à ce que je vienne, que t’importe ? Toi, suis-moi » (Jn 21.22-23). Pour l’Église, chercher à dater le retour de Jésus ou spéculer sur les signes eschatologiques est moins crucial que d’accomplir la tâche confiée. Comme le résume David Jang : « Telle est la dimension eschatologique, missionnaire et pastorale de Jean 21. » Quand l’Église se prépare à une nouvelle année ou un nouveau champ d’action, il est bon de se rappeler « la grande vision de Dieu sur l’histoire et le monde » et de discerner notre propre rôle, si humble soit-il, dans ce plan.
Le danger serait de se replier à l’intérieur et de perdre la direction indiquée par Jésus, en jetant le filet de façon aléatoire, ou pire, de ne plus le jeter du tout. Dans une société de relative opulence, on peut se laisser distraire par les loisirs et oublier la vocation de l’Évangile. Mais Jean 21 nous répète : « Jetez le filet à droite. Nourrissez mes brebis. Et quant au temps de la fin, cela appartient à Dieu. Vivez dans la conscience eschatologique. » Les tâches de l’Église moderne demeurent identiques : aimer, soigner, nourrir (pastorat) et aller faire des disciples (évangélisation). Ce doit être le « critère » de nos projets d’Église et de nos assemblées générales.
Lorsque l’Église s’implante dans une région, elle s’enracine dans la culture et l’environnement local, célébrant Dieu à travers les saisons, contemplant la neige en hiver ou les feuillages d’automne. Parler d’« entrer dans une ère de construction » n’implique pas seulement la construction d’un bâtiment, mais bien la volonté de s’engager corps et âme pour la croissance de la communauté, dans la perspective de l’histoire et du monde. Et tout cela commence par « jeter le filet à la droite » et préparer tout ce qu’il faut pour « paître les brebis », sur le plan spirituel et concret.
Le pasteur David Jang, comme d’autres responsables partageant cette vision, s’appuie sur Jean 21 pour motiver la création d’écoles destinées à la formation de la jeunesse, la mise en place de centres missionnaires, la proclamation de l’Évangile et l’exercice de l’amour. Ce parcours de l’Église reflète l’appel de Jean 21 à « ramener 153 gros poissons » et à « faire paître les brebis », c’est-à-dire à rassembler des croyants de toutes nations — « les fils de Dieu » (Bənē hāʾĔlōhīm) — et à agrandir la communauté chrétienne mondiale.
De là découle l’interrogation adressée à chacun : « Simon, fils de Jonas, m’aimes-tu ? » — celle-ci retentit de nos jours. Si nous croyons au Fils de Dieu pour la vie éternelle, il est temps de nous tourner vers le salut du monde. Même si nous ignorons la date du retour du Seigneur, nous avons l’opportunité, ici et maintenant, de répondre à la vocation d’évangélisation et de pastorat. Les fruits en seront visibles dans chaque région, de Douvres à l’autre bout de la planète, où le Royaume de Dieu progressera, où la génération montante adoptera une vision biblique de l’histoire et du monde. Ainsi, lorsque le Seigneur reviendra, il pourra nous dire : « C’est bien, bon et fidèle serviteur ! », et nous participerons à la joie de la noce céleste. Voilà la conclusion de Jean 21, selon l’interprétation donnée par David Jang, qui voit dans ce chapitre la « grande finale » des Évangiles : nous avons connu la résurrection, l’affirmation que Jésus est Fils de Dieu, et maintenant s’ouvre l’ère de la mission et du soin pastoral.
On réalise alors que la présence de Jean 21, après la déclaration de foi de Jean 20, n’est pas un hasard. Après avoir clairement affirmé : « Jésus est le Christ, Fils de Dieu, et la vie est en son nom », le chapitre 21 montre concrètement comment vivre cette foi : en adoptant une posture d’attente active du Seigneur, au lieu de nous focaliser sur la date de son retour, en obéissant aux directives qu’il nous laisse (« Jetez le filet à la droite » et « Pais mes brebis »). L’Église, dans l’histoire, se dirige vers la grande noce annoncée dans l’Apocalypse, lorsque Jésus, l’Époux, s’unira pleinement à elle. D’ici là, « 153 gros poissons » entreront dans le filet, et le filet — la Parole de Dieu — ne se déchirera pas.
Ainsi se rejoignent les deux fils conducteurs de Jean 21 : l’évangélisation (1re moitié) et la pastorale (2e moitié). Et en arrière-plan, l’espérance du retour de Jésus (fin du chapitre) : on ne sait pas quand, mais « cela ne nous regarde pas ». Notre rôle est de collaborer à la grande œuvre de Dieu — annoncer l’Évangile, nourrir le troupeau. L’être humain se demande souvent : « Seigneur, quand reviendras-tu ? » Jésus répond : « Qu’est-ce que cela peut te faire ? Toi, suis-moi, et occupe-toi de mes brebis. »
Alors, concrètement, que faire ? Jean 21 offre une réponse limpide : en aimant Jésus, nous nourrissons les brebis ; nous les servons. Dans le même temps, nous jetons le filet en Galilée, c’est-à-dire que nous portons l’Évangile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En alliant formation interne et expansion externe, le monde verra la gloire de Dieu, et l’Église deviendra un lieu de louange et d’action de grâce. David Jang le résume en disant : « Voilà la raison d’être de l’Église aujourd’hui et la mise en pratique de l’esprit de Jean 21. » Pour y parvenir, la communauté doit aussi communiquer une vision biblique de l’histoire et du monde à ses enfants et ses jeunes, afin qu’ils ne se laissent pas séduire par les modes éphémères et n’abandonnent pas la vocation missionnaire de l’Église.
Jean 21, tel un épilogue de l’Évangile, consigne l’apparition de Jésus ressuscité au bord du lac de Tibériade, le miracle de la pêche abondante, le repas partagé avec les disciples autour du feu de braise, et la triple interpellation de Pierre : « M’aimes-tu ? » — « Pais mes brebis. » On y voit un nouveau commencement qui surgit après l’événement décisif de la croix et de la résurrection. Ce n’est pas qu’un simple retour à la pêche ordinaire, mais l’entrée dans une nouvelle mission. Pierre et les autres disciples, désormais, savent qu’ils ont un rôle majeur : proclamer l’Évangile et prendre soin de l’Église. Et le Seigneur est toujours avec eux, leur préparant d’avance les ressources nécessaires, les invitant à agir selon ses instructions. Il en va de même pour l’Église d’aujourd’hui : le monde a peut-être changé, mais la guidance du Seigneur reste immuable. Surtout quand les derniers temps approchent, l’objectif demeure « la mission, le pastorat, la conscience éclairée de l’histoire et la formation des nouvelles générations ».
C’est dans cette optique que David Jang et bien d’autres responsables, en se penchant sur Jean 21, insistent sur l’édification d’écoles pour la jeunesse, de centres missionnaires dans les pays étrangers, sur l’évangélisation par les médias ou la culture, etc. Tout cela vise à concrétiser la réalité de la pêche miraculeuse (les 153 poissons) et du « Fais paître mes brebis », en faisant grandir la communauté mondiale des « fils de Dieu » (Bənē hāʾĔlōhīm).
Ainsi retentit inlassablement la question adressée à Pierre : « Simon, fils de Jonas, m’aimes-tu plus que ceux-ci ? » — et la réponse résonne pour nous aussi. Croire en Jésus, Fils de Dieu, pour la vie éternelle, implique de se mobiliser pour le salut du monde. Nous ne savons pas exactement quand le Seigneur reviendra, mais nous avons la responsabilité de remplir la mission de l’évangélisation et du pastorat. De nombreux fruits paraîtront alors dans nos villes, nos villages, et jusque dans les régions lointaines. Les nouvelles générations croîtront dans une perspective biblique de l’histoire. Et au jour du retour de Christ, nous pourrons entendre : « Bon et fidèle serviteur, tu as accompli la tâche que je t’ai confiée », et nous participerons à la fête éternelle. C’est là l’essence de Jean 21 et la conviction du pasteur David Jang, pour qui ce chapitre représente la conclusion grandiose des Évangiles.
On comprend enfin qu’après la puissante conclusion de Jean 20, l’ajout du chapitre 21 n’est pas un hasard. « Jésus est le Fils de Dieu, et celui qui croit en son nom a la vie » (ch. 20) est le cœur du salut. Mais comment vivre cette foi au quotidien ? Le chapitre 21 nous en donne la feuille de route : « Même si vous ne savez pas quand je reviendrai, ne vous préoccupez pas de calculer ce temps. Accomplissez fidèlement la mission que je vous ai confiée : jetez le filet à la droite, paissez mes brebis. » L’Église, en marchant dans cette obéissance, atteindra finalement l’union parfaite avec le Christ, l’Époux, annoncée dans l’Apocalypse. Et jusque-là, comme dans la pêche miraculeuse des 153 poissons, de nombreuses âmes entreront dans le filet, qui ne se déchirera pas.
Les deux grands thèmes — évangélisation et pastorat — dominent ce chapitre, et un troisième les sous-tend : l’espérance du retour du Seigneur. Or, Jean 21 ne révèle pas de date précise de la fin. Il se contente de dire : « Si je veux qu’il demeure jusqu’à ce que je vienne, que t’importe ? Toi, suis-moi. » (21.23) L’important n’est pas de connaître les délais, mais de se montrer « bon et fidèle » dans l’œuvre confiée. Dans l’Église primitive comme dans l’Église moderne, les croyants se questionnent : « Seigneur, quand reviendras-tu ? » — mais Jésus répond : « Que t’importe ? Fais plutôt ce que je t’ai ordonné, prêche l’Évangile et nourris le troupeau. »
Par conséquent, concrètement, que doit faire l’Église ? Jean 21 donne la réponse : aimer Jésus, prendre soin des brebis, jeter le filet. En conjuguant formation interne et évangélisation, on laissera au monde l’occasion de contempler la gloire de Dieu, et on fera de l’Église une communauté de louange. Le pasteur David Jang voit là la raison d’être de l’Église aujourd’hui et l’appel fort de Jean 21. Il ajoute que, pour étendre l’influence de l’Évangile dans l’éducation, la culture et la société, il faut enseigner aux enfants la vision biblique de l’histoire et du monde. Sans la conscience du projet divin de la création, de la rédemption et de la fin, les jeunes risquent de suivre les valeurs du monde et de s’éloigner du mandat missionnaire.
Le chapitre 21 de Jean, comme épilogue, raconte donc une manifestation du Christ ressuscité au lac de Tibériade, la pêche miraculeuse, le repas au feu de braise, et le dialogue d’amour qui réhabilite Pierre en l’appelant à paître les brebis. « Je pars pêcher », disait Pierre, et ce qui semblait être un simple retour en arrière est devenu l’occasion d’un nouveau départ. L’ordre de Jésus, « jetez le filet à droite », leur a fait découvrir la surabondance ; le pain et le poisson préparés sur le rivage montrent que le Seigneur pourvoit à tout. Puis le triple « M’aimes-tu ? » restaure Pierre après son reniement et lui confère une mission : prêcher (évangéliser) et faire paître (pastorat). À tous les chrétiens de l’histoire revient également la mission de « jeter le filet et de nourrir les brebis », en attendant le retour de Jésus.
C’est en cela que réside le message de Jean 21 pour nous aujourd’hui, et c’est le fardeau que porte le pasteur David Jang avec beaucoup d’autres témoins de l’Évangile à travers le monde. Les derniers versets du chapitre disent que bien des paroles de Jésus ne sont pas mises par écrit, car elles seraient trop nombreuses. Pourtant, l’essentiel est là : « M’aimes-tu ? », « Jetez le filet à droite », « Pais mes brebis ». En accomplissant fidèlement cette parole, l’Église participe au plan magnifique et bienveillant de Dieu pour l’histoire et le monde. Et au Jour du Seigneur, nous verrons « toutes les nations » se réjouir avec nous dans la vie éternelle. Tel est l’horizon qu’ouvre Jean 21, selon David Jang, et c’est en même temps l’invitation et l’exhortation ultime adressées à l’Église d’aujourd’hui et de demain.
En revenant sur l’ensemble de ce commentaire théologique et pratique du chapitre 21 de Jean, suivant l’interprétation du pasteur David Jang et la mission qui incombe à la communauté croyante (évangéliser, paître, éduquer la génération suivante, cultiver une vision biblique de l’histoire), la conclusion est claire : « Après avoir exposé l’essentiel de l’Évangile dans le chapitre 20, le chapitre 21 nous montre que la chose la plus importante pour l’Église, jusqu’au retour du Seigneur, est de mener de front l’évangélisation et la pastorale, dans la direction et la puissance que Jésus a déjà préparées. Il ne nous reste qu’à lui obéir chaque jou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