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제인 고별설교가 담긴 사순절 40일 묵상집 ‘십자가의 길’ 설교자 장재형 목사 소개
장재형목사는 1949년 생으로 한국에서 출생 한국신학대학과 대학원 단국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92년 한국에서 교회를 시작했다. 그는 교회를 시작한 이유를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한국적 정서로 받아들였을 때 그것은 한국의 독특한 단어인 ‘한’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함석헌 선생이 대한민국이 많은 침략을 많았을 뿐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기에 평화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했었다. 이게 씨알 사상이라던가….
여튼 장재형 목사는 이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영어로 새가 운다고 표현하지 않고 새가 노래 한다고 한다. 한국어로는 새가 운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는 ‘문풍지가 운다’고도 했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운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데 이렇게 표현하는 나라가 없다는 거다. 동양 특히 한국에서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애통스러운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지 헬라의 철학에 세례를 받은 서양의 기독교는 이것에 거리가 좀 멀다는 이야기를 종종한다.
수년전 멜깁슨 감독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제작 발표했을 때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고통이 저러했구나라고 생각했을까? 그 영화를 보고 예수님이 저렇게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워했겠구나라고 처음 생각해봤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왜 일까? 장재형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짐을 지고 대속의 제물로 희생되셨지만 이 죽음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과 더불어 그의 죽음이 죽음이 아닌 죽임이라는 것에 초점을 두고 교회를 시작했다고 한다.
요한복음 소개
요한복음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으로 이루어진 4복음서 중에 하나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 사명, 죽음, 부활 및 그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 오게 한다. 특히 요한복음은 20장으로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으로 끝이 나지만 특별히 요한복음 21장이 추가가 되어 있는 톡득한 책이다. 요한복음 21장은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특별히 그를 사랑해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로 기록했는 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는 그 순간에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제자이다. 특히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 대한 희생에 대해 깊이 있게 기록되어져 있으며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명확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사순절 기간 2주간에 걸쳐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된 고별설교에 대해서 설교를 했다. 장재형 목사가 2003년 부터 2008년까지의 사순절 기간에 설교한 것을 엮어 출간한 ‘십자가의 길’에는 고별 설교 부분이 빠져 있는데 최근 장목사는 이 부분을 본문으로 설교를 했다. 다음은 장목사가 요한복음 16장 고별설교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묵상한 글이다.
요한복음 16장은 성령에 관해 설명해 놓은 아주 특별한 부분이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성삼위하나님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데, 이 개념은 하나님의 성격과 신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이다.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없다. 하지만 이 삼위일체는 주로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이해되는 개념이다. 삼위일체론은 아버지, 아들, 성령.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님이지만, 각각은 고유한 역할과 성격을 갖고 있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아버지 (Father): 삼위일체론에서 아버지는 하나님의 권능과 권위를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영원하며, 전능하며, 무한하고, 모든 것을 창조한 존재로서의 하나님이라고 믿는다.
아들 (Son):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는 인간 형상으로 신성한 계획을 완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였고, 부활하여 죽음을 이기고 승천해서 인류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다.
성령: 삼위일체론에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데, 오늘 묵상하려고 하는 고별설교인 요한복음 16장에 성령이 어떤 분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복잡한 신성을 설명하고 인간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이 개념은 성경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우리는 삼위일체(三位一體)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유일신이나 군주신론(君主神論) 같은 신론(神論)을 갖지 않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이라는 신론(神論)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미 하나님이 계시는데 아들이 필요하고 성령이 필요한가?
.첫번째 이유는 아들이 오지 않고는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로서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1장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지성과 영성, 객관적으로 주관적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우리 가운데 보내셔서 그분을 드러내셨다.
두번째 이유는 주께서 우리 죄 때문에 오신 것이다.
로마서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장을 100번이 넘게 설교했는데 장재형 목사는 바울사도는 유대인의 사도 그리고 바울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를 대표한다고 이야기 한다. 특히, 2천년 전 바울사도가 살아 있을 때에 선민 보다는 이방인이 절대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자의식으로 가득한 바울 사도의 구원의 방법에 대한 것을 우리가 잘 볼필요가 있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대 사명,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대에 부족함이 없다는 거다. 바울 사도가 말 한 구원의 방법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은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게 장재형목사의 설명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 천하에 드러내셨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인류를 향한 사랑인 것이다.
세번째 이유는 이 땅을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 땅에 공의와 정의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많이 잊고 산다.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잊고 산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또 그분의 오심이 우리를 위한 것이라는 것만 우리는 기억하기 쉽다. 그 다음에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인과 의인을 갈라내서 심판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걸 역사라고 한다. 어둠을 지나 빛나는 광명의 아침이 반드시 오듯이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 가고 있고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무대인 것이다.
이 세가지는 요한복음 16장 8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예수님의 오신 이유는 위 구절에 간단하게 나와 있다. 장재형 목사는 2003년 미국으로 가서 그 때 부터 2008년까지 사순절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설교를 수십 차례 했다. 장재형 목사가 사순절에 설교한 것을 모아서 책으로 출판을 했는 데 ‘십자가의 길’이라는 책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를 편집해서 낸 이 책에서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에 18장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유다는 예수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갔는 데 그 때가 밤이라고 성경에 써 있는 것에 주목한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가 예수님의 권면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간 것은 그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팔아 밀고를 하기 위해 나간 것을 이야기 하지만 더욱 우리가 깊이 있게 봐야 할 것은 유다 자신에게도 그 순간은 ‘밤’이었고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결정되는 순간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이야기 한다. 그것을 사랑의 사도인 요한은 ‘밤’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이후 유다는 마지막 주님의 권면을 거부하고 주를 팔기 위해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이제 기다리는 것은 죽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무어라고 하시는가?
요한복음 13장 30절로 31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이게 예수님의 믿음이다. 사단이 무슨 계략을 펼친다 하더라도 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중권세 잡은 자들은 모두 도말 된 것이다. 이 죄악으로 물들어 버린 세상에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역사는 어떠한 것으로도 흔들리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라는 주님의 담대한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 다음이 고별 설교인데 매우 소중한 장면이다.
요한복음 16장 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지 않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신앙은 늘 흔들릴 수 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흔들리는 갈대냐고 하셨다. 수태고지를 통해서 세례요한이 무슨 사명이 있는지 알게 하셨는데 그는 흔들리는 갈대가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 았다. 인간은 세상에서 할 일은 많다. 그 많은 일 중에서 목숨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하는 데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밥먹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일차원적인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의 인생이 여기서 그치면 안된다 .더 나가야 한다. 이 사명을 붙들고 살아야지만이 인생에 의미가 있다. 하루 하루 살아보고 한달 두달 시간이 지나는 것을 보고 이게 모여서 1년이 되는 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듯 하지만 그러지 않다. 그래서 장목사는 늘 이야기 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다라는 것 보다는 먼저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베푸셨는지 그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라고 말이다. 그 은혜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하는 일의 모든 것들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고백할 수 있게 되더라. 맞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주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하루도 살아갈 수 없고 숨쉴 수 없는 이들이다. 은혜가 아니면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을 보면 교만함 때문이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20세가 되면 성년인데 30세 40세 그리고 50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 같이 미성숙한 신앙을 하는 걸 보면 그것은 그들이 교만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를 교만이 막아 서고 있다. 그래서 그 은혜가 흘러 넘치는데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밖으로 나와 쏟아져 땅에 떨어진다. 마태복음 13장에 진리의 씨앗을 옥토에 뿌리라고 하셨다. 다른 밭에 뿌리면 새들이 오서 먹고 햇빛에 타 씨앗이 죽어버린다고 하셨다. 정말 맞는 말인데 그것을 실천하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완고해서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고 다른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합리화 하기 위해 여러 정보를 쌓는다. 자신의 성을 쌓고 살아가는 거다. 가인의 후손이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성을 쌓는 것이었다. 이 성을 무너뜨려야하는데 ….
요한복음16장 2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출회가 무엇인가? 유대 공동체에서 쫓아 낸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들은 이 말을 쉽고 가볍게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중세까지만 해도 기독교에서 출교 당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그건 죽음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중세 시대에 출교(Excommunication)는 교회 내의 중요한 징벌적 조치였는데, 이는 교회로부터 개인이나 집단이 교리나 규범을 위반하거나, 교회의 권위를 거역했을 때 부과되는 징벌이었다. 출교는 개인의 신앙적 상태에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종종 사회적인 파장도 초래할 수 있었다. 출교는 특정한 상황에서의 교회에서의 탈퇴나 배척을 의미했다. 이는 중세 교회에서는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여겨졌는데, 특히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성서나 교리적으로 정해진 원칙을 거부하는 경우에 사용되었다고 하다.
출교는 언제 이루어졌는가?
이단적인 교리나 신앙을 주장할 때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거나 반항할 때
교회의 교리나 규정을 위반했을 때
교회의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거나, 윤리적 불법 행위를 저질렀을 때 출교를 했었다고 한다. 출교는 당하게 되면 제사 즉, 예배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게 무엇인가? 그저 죽음이다. 죽음으로 내 몬다든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별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가 출교를 당하게 될거라고 하신다. 사랑하는 제자들, 그리고 3년 밖에 함께 있지 못한 미성숙한 제자들, 아직도 알아야 할게 많은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이들과 작별해야 한다. 그러면서 이야기 하신다. 너희는 출회를 당하게 될거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게 무엇인가? 이게 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여 진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는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다. 그들이 그런 악행을 하는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보라. 십자가에 메달라 죽이는 자들이 누구 이름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았는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행해진 죄악이 아닌가? 우리도 그렇다.장재형목사는 종종 이야기하는데, 주님의 말씀을 내 자신을 향한 심판으로 여겨야 하는데 말씀을 타인을 향한 심판으로만 적용한다는 거다. 맞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다.
죽음의 광기가 춤을 추듯 다가올 것이고, 제자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 것이고 너희를 쫓아낸다고 하셨다. 주님의 제자들을 유대 공동체로부터 쫓아낸다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죽음보다 더한 형극(刑極)이었다. 맞다. 교회가 받은 모든 핍박은 이런 모양을 띄고 나타났다. 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했다. 이 핍박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고 저 핍박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핍박을 한다고 했다. 셀 수 없는 하늘의 별 보다도 더 많은 핍박들이 이런 형태를 띄고 찾아왔던 것이다. 이 상황 가운데 가장 고통받으시는 분이 누구신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고통 받으신다.
요한복음16장 3절로 4절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 말 한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니라
너희가 핍박을 당하고 쫓겨나고 참혹한 절망의 순간을 맞을 때, 그 속에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이 말씀이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위로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을까? 내가 사는 나라에서는 그러한 핍박이 덜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 갈때 너무 많은 핍박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에서는 자녀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 부모가 미성년자일 때 강압적?으로 가르쳤을 때 부모의 권한까지도 박탈 할 수 있다는 세상 가운데 살아간다. 이게 미국의 아름다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 임금이 지배하는 죄악과 어둠의 세계에서 빛의 자녀들이 핍박을 받고 내어 쫓김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5절로 6절 지금 내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가는데 너희 중에서 나더러 어디로 가느냐 묻는 자가 없고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우리가 지금 이 상황과 분위기를 잘 알필요가 있는데, 우리 안에 여기 있는 제자들과 같은 동일한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절박하고 참혹하고 고통스럽고 암담한 세계를 잘 깨닫고 가야 한다. 매년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하는데, 이 사순절은 이 세계를 깊이 깨닫는 기간인 것이다. 여기 주께서 어디로 가신다고 하니, 제자들 안에 주님을 잃어버리는 근심이 가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 근심을 넘어서 더 알아야 될 깊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그게 무엇인가? 바로 성령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떠나는 것이 유익인 이유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떠나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십자가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가장 참혹한 죽음인데 이 죽음은 사랑하는 그래서 당신이 직접 선택한 12사도 중에서 한 사도가 주님을 판 것이다. 이러한 배반 속에 일어난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의 이 구절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결심하시고 나아가시는 장면이다.
요한복음 16장 7절 지금까지는 내가 너희에게 위로자가 되었고 힘이 되어 주었고 내가 너희를 보살펴주는 자로서 옆에 있었지만, 이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왜 예수님이 떠나가는게 제자들에게 유익한겁니까?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는 데 겨우 3년 밖에 제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도대체 왜 예수님이 이토록 어리고 불안해하는 제자들을 두고 떠나시는게 제자들에게 유익이라고 하시는가? 이 유익이 무슨 유익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다는 거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위로자가 되고 힘이 되었고 우리를 보호하는 분이셨다. 그런데 예수님이 떠나 가시더라도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성령은 수백년에 한번 예언자에게 임해서 예언을 하게 하셨는데 사도행전의 말씀 처럼 남종이나 여종에게 젊은이나 어린아이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신다는 거다. 사도행전의 시작은 바로 이 성령께서 불 같이 임하시는 장면을 기록해 놓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우리가 외쳐야 될 마지막 말은 “성령이여 오시옵소서”라고 이야기 한다. 성령이 주님이 만난 몇 명의 제자들 가운데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 하늘로부터 불 같은 혀가 내려와서 모든 이에게 갈라져서 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볼 수 있는 자들이 과연 몇이나 되는가?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 해도 함께 있는 자들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는 데 이제는 성령께서 오셔서 모든 자들에게 임하시는 놀라운 시대가 열린다고 이야기 하고 계시는 거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진리를 알고 그 다음에 성령을 받게 되어 있다. 물론 예외적인 이들도 존재한다. 장재형목사는 진리와 성령을 빛과 열로 설명을 한다. 빛이 있으면 열이 있고, 열이 있으면 빛이 는데 ‘따뜻하다’고 느끼면 그것은 빛이 있기 때문이다. 빛과 열을 뗄래야 뗄 수 없듯이, 진리와 성령도 그렇다.
초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 가운데 계셨을 때는 주님이 우리의 위로자가 되셨고 주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셨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우리를 직접 기르셨지만, 주님이 가시면 성령의 시대가 오는 것이다.
사도행전2장 17절로 18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어린아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남자나 여자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할 것 없이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자에게 다 성령을 부어 주신다. 이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려 오시는 데 우리 모든 사람이 각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을 담아서 살게 되는 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리라. 아름다운 세상에서 너희가 살게 하리라. 아름다운 세상을 회복하리라”는 메세지로 지금 주님은 그 세계를 말하고 계신다.
요한복음 16장은 “내가 가는 것이 절망이 아니다. 너희를 버려 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인류가 소망하고 있던 세계가 이 과정을 거쳐서 온다는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유익이라는 거다. 이 고통스러운 주의 수난과 말할 수 없는 눈물과 죽음의 골짜기를 거쳐서, 너희가 노래하고 소망했던 새로운 시대가 너희 가운데 온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거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이제 위로자가 너희 가운데 온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열어 주신 새 시대로 이것이 주님의 수난이후의 세계이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역사의 미래이다. 지금 우리는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다 구원을 얻게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8장에 소망가운데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을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해서 이야기 했다. 우리가 이미 죄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는 또한 이런 소망을 갖고 있다. 로마서 8장에 피조물도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역사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사역
성령은 주께서 하시고자 했던 것 즉,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것, 주를 아는 것, 주의 사랑을 느끼는 것, 주의 임재하심을 느끼는 것은 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서 아는 것이다. 주께서 이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뒤에, “이런 아름다운 세상이 올 것이다”라고 알려주고 계신다.
칠흙 같이 어둡고 깜깜한 절망과 죽음의 그늘이 내리운 자리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그리고 “다가올 세계를 너희가 예비하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주의 고난은 새로운 시대를 잉태하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사랑라고 한다.
고별설교는 그 주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설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