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신학적 통찰을 통해 본 ‘핍박을 이긴 교회의 비밀’

명암의 미학: 가장 칠흑 같은 밤에 떠오르는 빛

이탈리아의 거장 카라바조(Caravaggio)의 화폭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가지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의 전매특허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명암대조법)’ 기법 속에서 빛은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을 배경으로 할 때 비로소 그 본연의 찬란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배신, 상처, 혼돈,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캔버스 한복판에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한 줄기 빛은, 우리에게 진짜 구원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를 웅변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데살로니가전서 1장 역시 이러한 영적 명암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성경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이 본문을 통해 평온한 시대에는 결코 알 수 없는 ‘복음의 야성’을 일깨웁니다.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결코 안락한 휴양지가 아니었습니다. 사방에서 조롱과 적대감이 빗발쳤고, 정치적·사회적 압박이 숨통을 조여오는 영적 격전지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고통의 현장을 보며 탄식하는 대신 ‘감사’를 먼저 내뱉었습니다. 왜일까요? 교회는 안전할 때가 아니라 흔들릴 때 비로소 그 본질을 증명하며, 복음은 박수갈채 속에서보다 핍박의 불길 속에서 더 순전하게 정제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세 가지 엔진: 믿음, 사랑, 그리고 소망

데살로니가전서는 단순히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기록한 박물관의 문서가 아닙니다. 이것은 거대한 외부 압력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공동체의 내부 설계도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복음의 지침서’입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떠올릴 때마다 세 가지 핵심 동력을 기억했습니다.

핵심 가치성경적 표현신학적 실천 (장재형 목사 강해)
믿음 (Faith)믿음의 역사지적 동의를 넘어 삶을 송두리째 움직이는 ‘에너지(Energeia)’
사랑 (Love)사랑의 수고감상적 유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해산의 고통(Kopos)’
소망 (Hope)소망의 인내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끝까지 버티게 하는 ‘거룩한 견인(Hypomone)’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역사는 단순한 교리적 수긍이 아닙니다. 원문의 의미를 살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이것은 ‘능력을 실제로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그 능력의 원천에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부활 권능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단순한 철학적 사유였다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로마의 칼날 앞에서 진작에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실재(Reality)였기에 핍박을 뚫고 빛을 발했습니다.


정보가 아닌 능력: 데살로니가 교회의 ‘급속한 성숙’

데살로니가 교회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진짜 경이로운 점은 **’그 고난 한복판에서 무엇을 붙들었느냐’**에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사람의 화술’이나 ‘세련된 이론’으로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것을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있는 음성으로 정면으로 받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짧은 양육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성장했고, 오히려 주변의 다른 교회들에 영적 영감을 주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오늘날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의 권능’을 다시 묻습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으로 강해지는가? 거대한 규모인가, 세련된 제도인가, 혹은 안락한 분위기인가?”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정보가 아닌 **능력(Dunamis)**으로 받을 때만 강해집니다. 성령의 역사와 부활 신앙이 이론을 넘어 실제 삶의 현장에 침투할 때, 어린 공동체는 제국의 압박을 압도하는 성숙함을 입게 됩니다.


상처 난 틈새로 흐르는 은혜의 향기

우리는 흔히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이 멀리 계신다고 오해하곤 합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전서가 보여주는 역설은 정반대입니다. 은혜는 안락한 소파 위보다 거친 광야에서 더 밀도 있게 임합니다. 시대마다 박해의 모양은 달랐지만, 복음을 향한 세상의 적대감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2천 년을 버텨온 힘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탁월한 경영 능력이나 제도의 견고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부활 신앙의 능력’**이었습니다. 핍박받는 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의 향기가 스며있습니다. 그들의 견고한 믿음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 깊은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전염성을 가집니다.

결국 교회를 지키는 것은 외적인 평화가 아니라, 환난 속에서도 생동감 있게 꿈동치는 **’믿음의 역사’**입니다. 그 믿음이 사랑의 수고를 낳고, 그 수고가 다시 공동체의 뼈대를 세우며, 그렇게 세워진 공동체는 복음의 향기를 세상 끝까지 흘려보내는 발원지가 됩니다.


재림 소망: 도피가 아닌 ‘거룩한 견인’의 닻

데살로니가전서 1장의 신학적 정점은 결국 재림 신앙으로 귀결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기다린다”고 기록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의 완결성이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에 머물지 않고, 주님의 다시 오심(Parousia) 안에서 최종적인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을 명확히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입니다. 재림 소망은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마약 같은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 승리의 확신: 하나님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믿음.
  • 인내의 근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끝내 승리하게 하신다는 확신.

초대교회가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를 외쳤던 것은 절망을 노래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승리가 이미 주님께 있음을 선포하는 승전가였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재림이 날짜를 맞히는 퀴즈가 아니라, 오늘을 가장 거룩하고 치열하게 살아내게 만드는 **’현재 진행형의 동력’**임을 일깨웁니다. 진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오늘 더 뜨겁게 사랑하고, 오늘 더 인내하며, 오늘 더 충실하게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를 지킵니다.


기도의 연금술: 중보로 빚어지는 공동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향해 “항상 감사하고, 기도할 때마다 당신들을 기억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 교회가 세워지는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교회는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공유하는 스터디 그룹이 아닙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눈물 젖은 기도, 중보의 사랑, 그리고 서로를 향한 거룩한 기억 속에서 유기적으로 자라납니다.

특히 핍박의 시대일수록 공동체는 서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련을 겪는 지체들을 위해 영적으로 연대할 때, 데살로니가 교회의 영광스러운 모범은 2026년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우리를 이 지점으로 이끄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교회는 ‘강한 자들의 성’이 아니라, **’복음을 능력으로 받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례자들의 쉼터’**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 지금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1장 2-10절의 메시지는 명료한 한 문장으로 압축됩니다. **”핍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부활 신앙과 사랑, 그리고 종말적 소망의 합주”**입니다. 상황이 편안하지 않을 때 교회가 더 단단해지고 복음이 더 힘 있게 증언되는 이 거룩한 역설은 초대교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법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공부하는 지적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믿음이 과연 어떤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엄중히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 믿음의 역사가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까?
  • 사랑의 수고가 공동체 안에 흐르고 있습니까?
  • 소망의 인내가 당신의 오늘을 지탱하고 있습니까?

이 세 가지가 다시 회복될 때, 교회는 다시 교회다워지고 복음은 세상 한복판에서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눈부신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의 데살로니가전서 강해가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 깊은 울림과 은혜로 남는 이유입니다.

fisherofman.kr

davidjang.org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강해를 통해 본 ‘하늘’과 ‘땅’의 신학적 조우

사도행전 1장: 상실의 애가를 넘어 사명으로 걷는 자들의 서사

실낙원(失樂園)의 끝에서 마주한 새로운 새벽

존 밀턴은 그의 장엄한 대서사시 『실낙원』을 통해 인간이 본래 누렸던 에덴의 상실과 그로 인한 영적 비극을 처절하게 노래했습니다. 밀턴이 응시했던 비극의 핵심은 단순히 지리적인 낙원의 상실이 아니라, 창조주와의 친밀한 사귐이 단절되고 그분의 영광이 떠난 자리에서 느껴지는 인간 영혼의 공허와 떨림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을 펼치면, 우리는 바로 그 깊은 상실의 긴 밤이 지나고 맞이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대한 계획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모호한 경계선 위에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약속된 영광의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선명하게 붙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의 설교가 강조하듯, 바로 그 ‘모호함’과 ‘기다림’의 경계에서 교회라는 신비로운 공동체는 태동합니다. 십자가는 실패한 자들의 비명으로 끝나는 종착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강렬하게 침투하는 거룩한 관문이었습니다. 부활 또한 단순히 슬픔을 달래주는 위로의 사건을 넘어, 기존의 세속적 질서를 뒤엎고 생명의 질서를 새롭게 쓰는 우주적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은 복음서의 눈물 어린 서사가 교회의 역동적인 발걸음으로 치환되는 거대한 ‘신학적 전환점’입니다. 낙원을 잃고 방황하던 인간의 역사가 성령의 임재 안에서 ‘회복의 역사’로 그 뱃머리를 돌리는 찬란한 문턱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늘의 소망과 땅의 사명 사이, 그 거룩한 긴장

부활의 감격이 가시기도 전, 제자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그들의 질문 속에는 지난 세월의 아픔과 민족적 해방에 대한 갈망이 녹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물음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기대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때(Timing)’에 대한 집착을 ‘성령(Spirit)’에 대한 약속으로 돌려놓으십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신앙의 본질적 차이를 날카롭게 짚어냅니다. 많은 신앙인이 ‘언제(When)’ 응답이 올지, ‘언제’ 상황이 바뀔지 계산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어떻게(How)’ 순종하며 기다릴 것인가를 묻습니다.

  • 기다림의 은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치밀하게 짠 정치적 프로젝트나 전략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의 내면이 변화될 때 비로소 확장됩니다.
  • 관념에서 사명으로: 제자들이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때, 주님은 그들의 시선을 ‘땅끝’으로 향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의 뜻을 품되, 발은 땅의 현장을 향해야 한다는 이 ‘수직과 수평의 조화’가 바로 교회의 탄생 조건입니다. 기다림은 정지가 아니라,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가장 역동적인 준비 과정입니다.

비좁은 다락방, 우주적 왕국이 잉태된 곳

하나님 나라의 새 시대가 열린 곳은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이나 화려한 왕궁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는 자들이 모여 숨죽여 기도하던 초라한 다락방이었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중심부’를 주목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세상이 외면한 ‘주변부’에서 새로운 역사의 줄기를 뽑아내십니다.

그 다락방에는 화려한 전략도, 세상을 압도할 숫자도, 정치적 영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세상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한 가지, 바로 **’전심으로 마음을 같이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외형적 크기가 아니라, 그 영혼이 향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증명한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이 통찰은 현대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프로그램보다 기도가, 과시보다 사랑이, 속도보다 순종이 앞설 때 교회는 비로소 하늘의 질서를 이 땅에 투영하는 거울이 됩니다. 다락방이라는 좁은 공간에 갇혀 있던 기도의 불씨는 성령의 바람을 타고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번져나갔습니다. 지극히 작고 연약한 믿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온전히 붙들리면 시대를 뒤흔드는 씨앗이 된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 1장이 보여주는 거룩한 역설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피어나는 증언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마주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Already)’ 이 땅에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은 ‘아직(Not Yet)’ 우리 앞에 남아 있습니다. 씨앗은 뿌려졌으나 추수의 때는 오지 않았고, 새벽빛은 밝았으나 정오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긴장은 우리를 현실 도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고 변혁시키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에 여전히 부조리와 슬픔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복음이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증인(Martyr)’**으로 부름받았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 내적 변화의 우선순위: 장재형 목사는 인간의 내면이 성령으로 먼저 변화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훌륭한 사회적 제도와 구조도 결국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음을 경고합니다.
  • 신앙의 진정성: ‘이미’ 임한 나라를 믿는 자는 어떠한 절망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담대함을 얻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자기 의에 빠지지 않는 겸손함을 유지합니다. 이 긴장 속에서 신앙은 값싼 위로를 넘어, 눈물 마르지 않은 세상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게 하는 거룩한 소명이 됩니다.

삶의 표정으로 완성되는 복음의 현재성

결국 사도행전 1장이 여는 새 시대는 먼 미래에나 일어날 환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내딛는 작은 순종의 발걸음에서 시작됩니다.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으로 나아갔던 것처럼, 우리의 일상—가정, 직장, 관계—이 먼저 ‘작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은 말의 성찬이 아니라, 삶의 표정을 바꾸는 능력입니다.

  1. 관계의 변화: 이기적인 욕망이 지배하던 관계가 사랑과 용서로 치환될 때.
  2. 재정의 변화: 소유의 집착에서 나눔의 기쁨으로 관점이 바뀔 때.
  3. 언어의 변화: 비난과 정죄 대신 성령의 위로와 격려가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신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형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은혜의 종착역입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파송’이며, 승천은 이별의 슬픔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개시’입니다. 진정한 설교는 예배당의 감동으로 휘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기도를 바꾸고, 이웃을 보는 눈을 바꾸며,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재편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구호나 대형 집회가 아닙니다. 성령을 갈망하며 기다리는 정직한 마음, 함께 무릎 꿇는 공동체, 그리고 일상의 비루함 속에서도 복음의 가치를 지켜내려는 담대한 순종입니다. 한 사람을 품어주는 오래 참음, 진실한 참회의 눈물 한 방울이 결국 하나님 나라의 현실성을 증명합니다. 그때, 잃어버린 낙원을 탄식하며 노래하던 인류의 슬픔 위로 하나님은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여실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는 방관자가 아니라, 하늘의 뜻을 가슴에 품고 세상의 어둠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는 부활의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fisherofman.kr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근심이 거룩한 기도가 되는 순간

로마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 그 웅장한 천장화 사이에서 유독 관람객의 시선을 오랫동안 붙잡는 형상이 있습니다. 바로 거장 미켈란젤로가 형상화한 선지자 예레미야입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깊은 고뇌에 잠긴 그의 모습은, 단순히 한 인간의 우울함을 넘어선 형용할 수 없는 무게감을 전달합니다. 처진 어깨와 깊게 파인 미간에는 개인의 불행이 아닌, 무너져가는 시대와 하나님을 등진 백성들을 향한 ‘거룩한 애통’이 서려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근심 없는 상태’가 곧 행복이라고 속삭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역설적입니다.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고린도후서 7장에 기록된 사도 바울의 권면을 통해, 이 시대 성도들이 반드시 회복해야 할 신앙의 원동력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제시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붓 끝으로 표현해낸 예레미야의 그 고귀한 고뇌가 과연 우리의 영혼 안에도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1. 두 종류의 슬픔: 나를 파괴하는가, 영혼을 살리는가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인간이 느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두 가지로 정교하게 분류했습니다.

  • 세상 근심 (Worldly Sorrow): 철저히 ‘자기 중심성’에 뿌리를 둡니다.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거나, 경제적 손실을 입거나, 남보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러한 근심은 영혼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결국 허무와 사망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Godly Sorrow): 시선이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죄악을 아파하고, 진리가 가려진 세상을 보며 눈물 흘리는 통회입니다. 이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결한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거룩한 에너지가 됩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를 통해 이러한 거룩한 근심이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완성하는 필수적인 관문임을 강조합니다. 참된 돌이킴은 가벼운 감정적 유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합해질 때 일어나는 영적 진통이며, 이 아픔을 통과할 때 비로소 후회 없는 구원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2. 느헤미야의 수심이 가져온 기적: 성벽 재건의 설계도

이러한 신학적 원리를 삶으로 증명해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신임을 받던 그는 예루살렘 성문이 불타고 백성들이 능욕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그저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일간 금식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단계느헤미야의 영적 여정우리에게 주는 교훈
자각성벽이 무너진 현실을 직시함시대적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수용
애통왕 앞에서 수색(愁色)이 나타날 정도의 근심거룩한 부담감이 기도로 이어짐
결단안락한 삶을 버리고 재건 현장으로 뛰어듦근심이 구체적인 행동과 헌신으로 변모

오늘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역설하는 선교적 사명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느헤미야가 느꼈던 그 ‘거룩한 근심’은 결국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낙관적인 전망보다 무서운 것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영적 불감증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며 우는 한 사람의 기도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꿉니다.


3. 영적 파수꾼의 사명: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우는가

우리는 지금 교회의 권위가 도전받고 복음의 순전함이 위협받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이 현실 앞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태도는 냉소나 비판이 아닙니다. 장재형 목사가 던지는 핵심적인 질문처럼,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눈물”**을 소유해야 합니다.

거룩한 근심은 때로 우리의 안일한 일상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지금까지 지켜온 신앙의 타성을 뒤흔들어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요동함이 있어야만 비로소 영혼의 찌꺼기가 걸러지고, 우리 삶의 터전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근심을 보고 기뻐했던 것은, 그 아픔이 결국 그들을 정결함과 열정으로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결론: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의 기쁨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 무엇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는가?” 나만의 안위와 성공을 위한 ‘세상 근심’은 과감히 털어내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는 ‘거룩한 근심’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예레미야의 눈물이 훗날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는 통로가 되었듯,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진실한 눈물은 반드시 기쁨의 단을 거두는 축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통찰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우리를 결코 절망시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고, 무너진 공동체를 일으키며, 가장 안전하게 천국 본향으로 인도하는 거룩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fisherofman.kr

davidjang.org

빌립보서 2장에서 찾는 교회 갈등의 해법: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강해를 중심으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감정의 언어를 내뱉을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언어로 서로를 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통해 볼 때, 교회 갈등의 해소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겸손’이라는 영적 체질 개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개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은 ‘내가 맞다’는 확신이 ‘상대는 틀렸다’는 공격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바울은 누가 옳은지 판가름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며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킵니다. 갈등 속에서 시선이 바뀌면 언어가 변하고, 비로소 관계의 방향도 수정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서신, 그 속에 감춰진 공동체의 아픔

빌립보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이 감옥에서 쓰인 ‘옥중서신’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갇힌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은 시종일관 기쁨(Rejoice)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기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복음의 결과물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고통은 감옥의 냉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회의 분열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며 공동체의 연합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교회가 무너지면 복음의 전진도 멈춘다는 영적 위기감을 반영한 목회적 탄식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우리가 화려한 예배 형식에만 치중한 채, 성령의 교제와 사랑의 위로가 사라지는 내부의 균열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날카롭게 묻습니다.

관계와 환대로 시작된 교회, 조직과 파벌로 변질되다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빌립보 교회의 태동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히 로마화된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복음은 가치관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울이 강가 기도처에서 만난 루디아와 여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이 ‘하우스 처치’가 된 사건은 초대교회가 제도적 조직이기에 앞서 관계와 환대로 숨 쉬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헌신과 눈물, 기도로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이러한 초심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딱딱한 조직이 되고, 조직은 이내 파벌로 갈라지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동역의 깊이만큼 깊어진 상처

빌립보 교회 탄생에 핵심적이었던 여성들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른 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에서 피할 수 없는 긴장이라고 분석합니다. 사역이 깊을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동일한 무게로 양쪽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이는 법적인 판결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처방입니다. 교회는 죄를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자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닮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자비가 권면의 본질입니다.


갈등을 녹이는 네 가지 영적 토대

빌립보서 2장 1절이 제시하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는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 권면: 잘못을 파헤치는 칼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의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설득입니다.
  • 사랑의 위로: 상대를 정죄하기 전에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복음적 온기를 부여합니다.
  • 성령의 교제: 인간적인 타협을 넘어, 상대를 ‘문제’가 아닌 ‘기도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 긍휼과 자비: 징계의 언어로 얼어붙은 공동체의 기류를 다시 녹여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 하라”는 의미는 성격이나 취향의 통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각자의 위치를 조정하는 ‘방향성의 일치’입니다. 나를 변호하고 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본능적 계산서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실재적 능력입니다.

케노시스: 내려감이 곧 새로움의 길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갈등의 해법을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연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비움(Kenosis)’의 신비는 우리가 왜 낮아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분쟁의 원인은 대개 ‘내가 낮아지면 손해 본다’는 두려움에 있지만, 복음은 낮아짐이 곧 구원의 방식임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듯, 교회 안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믿는 행위입니다. 분쟁의 순간에 상대의 얼굴이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해결의 시작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투영된 화해와 치유의 미학

  •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란스러운 제자들 사이에서 고요를 유지하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중심을 권력이 아닌 십자가에 둘 때 분열은 멈춥니다.
  •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어린양의 희생은 우리가 취향이 아닌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가족임을 일깨웁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죽은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비애는 갈등으로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죄가 아닌 공감의 언어임을 시사합니다.
  •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식적인 위로보다 더 깊은 치유를 선사합니다.

회복의 실제: 말의 속도를 늦추고 경청하라

실질적인 회복은 언어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갈등 상황에서 말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은 그를 형제로 인정하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경청을 통해 자신의 확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때, 권면은 비로소 길이 됩니다. 또한 중재자는 재판관이 아닌 목자의 심정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화해의 문은 닫힙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배타적인 정결함이 아니라, 회개를 가능케 하는 포용적 자비에서 증명됩니다.


십자가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식은 지체의 통증을 함께 느끼는 교회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 분쟁 해결은 몇몇 사람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관계 맺는 법을 다시 배우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결국 빌립보서 2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침묵을 강요할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찾아옵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주님을 드러내려는 용기, 이기려는 마음 대신 살리려는 마음이 공동체의 공기를 바꿉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로 묶는 매듭입니다. 이 복음의 흐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때, 모든 갈등은 힘을 잃고 공동체는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davidjang.org

사람을 낚는 어부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 복음의 향기가 되다 – 장재형 목사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 사건을 다룬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의 신비와 가롯 유다의 비극, 그리고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베다니 여인의 헌신을 신학·예술·음악·고전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해설한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과거 상처와 격리의 공간이 은혜와 감사의 식탁으로 변한 복음의 심장을 드러낸다. 이 자리로 이름 없는 여인이 들어와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께 쏟아 붓는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와 미래 전체를 내어놓는 결단이자,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넘어선 “사랑의 과잉”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랑을 “허비”로 규정하며 계산한다. 요한복음은 그 목소리의 중심에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비난이 진정한 정의감이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폭로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과 허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격표와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복음서와 예술·음악 속 대비(유다의 불편함과 마리아의 헌신)와 연결해 설명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제자들의 항의 합창 뒤에 예수의 “그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는 선언을 배치하듯, 예수는 이 허비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재해석한다.

여인의 행동은 순간적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직감한 영적 통찰이다. 향유는 장례용 향료였고, 여인은 다가올 죽음을 앞당겨 미리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다. 이 무모한 사랑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기 몸을 깨뜨리고 피를 쏟으실 운명의 예표이기도 하다. 설교는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로 흐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효율과 합리를 넘어선 “비효율적 풍성함”임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효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보다 먼저 기준이 될 때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유다적 합리성’에 포획되는지 경고한다. 예배·헌신·재정·사역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성과와 효율의 언어를 우선시하고, 사랑이 식을수록 계산은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비합리적 행동을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이야기가 함께 기억될 것이라 약속한다. 그의 설교는, 제도·기관·사역을 세우는 자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베다니 여인의 무조건적 사랑을 잃는 순간 유다의 계산과 다르지 않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본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인가, 허비라 비난하는 제자인가, 아니면 사랑의 현장을 불편해하며 결국 등을 돌린 유다인가. 주님의 사랑이 실제 사건으로 내 안에 자리할 때, 우리는 계산을 멈추고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을 기꺼이 찾아오신 사랑, 그녀를 변호하신 사랑, 배반할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신 사랑은 모두 ‘허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허비가 아니었다면 복음도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아까워하며 붙들고 있는가”로 바뀐다. 시간이든, 재정이든, 안전한 미래든, 베다니 여인의 옥합은 결국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할 삶의 상징이 된다.

예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다. 베다니의 향기는 이미 시몬의 집을 채웠고, 이제 우리의 일상과 예배 속을 채우기를 기다린다. 사랑을 허비라 부르지 않고 기쁨으로 선택하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세상 앞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증언이 된다.

davidjang.org

장재형목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신학적 사유 안에서 교회는 정적인 제도나 조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역동적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의 에베소서 4장 13절 강해는 바로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심장부를 해부하는 지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이 한 구절은, 장재형 목사의 해석을 통해 개인의 영적 성숙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목표와 그 실현 경로를 제시하는 거대한 신학적 아키텍처로 확장된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으로 조망하면서, 특히 종말론과 교회론을 하나의 변증법적 짝으로 설정하는 독창적 헤르메네틱스를 선보인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자들의 회집을 넘어,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이 땅 위에 선취하고 건설하는 역사적 전위대(avant-garde)로서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눈에 띄지 않는 겨자씨가 거목으로 자라나고, 소량의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리는—와 동일한 성장 원리가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이는 세상을 단번에 전복시키는 열광주의적 종말론을 지양하고, 내재적 생명력으로 점진적이고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본질을 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자라남’이라는 동사에서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며, 인체의 각 지체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의 생명을 영위하듯,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결합하여 끊임없이 성숙해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설파한다.

이러한 교회의 동력학적 성장을 추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장재형 목사는 본문이 제시하는 두 가지 축, 즉 ‘믿는 것’과 ‘아는 것’의 변증법적 통일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신학에서 신앙의 실존적 차원과 이성적 차원이 어떻게 상호 침투하며 성숙을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논리이다. 먼저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assent)를 초월하는 차원으로 규정된다. 갈라디아서 3장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를 바탕으로, 그는 믿음을 인간이 창안한 사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궁극적 진리, 즉 ‘지혜’에 대한 전인격적 수용 행위로 해석한다. 이 계시된 지혜 앞에서 인간은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예수의 단언적 선포처럼, 이 진리를 영접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0장 10절(“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을 근거로, 이 수용이 머리가 아닌 ‘마음’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속적 진리는 본질상 ‘사랑’이기에, 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로만 체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내면세계로 유입되는 유일무이한 통로로서, 모든 영적 성장의 존재론적 출발점이 된다.

반면, ‘아는 것’은 이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의 서사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지성의 여정이다. 이 ‘앎’은 명제적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사랑의 진리를 인격적 관계와 삶의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체득해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과 동의어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성숙(Matu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바울 사도가 말한 ‘충만함’과 동일시한다. 즉,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단회적으로 수납했다면, 그 이후의 신앙 여정은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탐구하며 인격 전체가 성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 ‘야다(יָדַע)’가 지적 앎을 넘어 ‘경험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관계적 의미를 포괄한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기독교의 ‘앎’이 본질적으로 ‘사랑의 지식(knowledge of love)’임을 역설한다. 이 앎의 여정 속에서 신자와 교회는 비로소‘믿음’이라는 뿌리와 ‘지식’이라는 줄기가 조화롭게 자라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믿음 없는 지식은 지적 교만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지식 없는 믿음은 맹목적 광신에 머무를 위험이 있기에, 이 둘의 유기적 통일이야말로 건강한 영적 성숙의 시금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숙의 궤적을 고린도전서 13장의 심오한 통찰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현재적 앎이 지닌 근원적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온전한 앎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을 품게 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인식의 주체성에 관한 놀라운 신학적 전회를 보여준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알게 되는 그 궁극적 지점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극대화된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먼저 나를 아셨다’는 피조물로서의 본질적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깨닫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말씀의 인식론적 번역과도 같다. 우리의 앎과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제적(a priori) 앎과 사랑에 대한 응답적 메아리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자신의 사랑의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이미 알고 사랑하시는 주님께 있음을 투철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안다’는 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마침내 온전히 깨달아, 그 사랑의 힘으로 나 또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관계적 앎의 최상급 표현이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에게 있어 영적 성장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가 심화되는 과정이며, 교회의 성숙이란 이 사랑의 네트워크가 공동체 전체를 견고하게 직조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여정을 거부하고 정체된 상태를 장재형 목사는 ‘어린 아이’라는 은유를 통해 날카롭게 진단한다. 여기서‘어린 아이’는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한 단계가 아니라, 성장을 멈춘 비정상적 상태, 즉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결여된‘영적 유아기(spiritual infancy)’에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거구의 성인이 유아적인 행동을 하며 부조화의 극치를 보였던 개인적 경험을 소환하여, 영적 성장이 결여된 신앙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부자연스러운지를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히브리서 5장의 경고처럼, 마땅히 진리의 교사가 되어 단단한 식물을 섭취해야 할 성도가 여전히 젖병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연단을 게을리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성숙한 신자는 베드로전서 3장의 권면처럼, 세상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물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그 이유를 변증할 수 있는 지적·영적 준비를 갖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아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하는 대목이다.

영적 유아 상태에 머물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위험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대주의와 무수한 정보의 소음 속에서 이 말씀이 갖는 현대적 적실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한 닻을 내리지 못한 영혼은 시대의 사상과 이단의 교설이라는 파도에 속절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는 ‘속임수’를 의미하는 헬라어 ‘쿠비야(κυβείᾳ)’가 주사위 던지기, 즉 도박판의 사기 기술에서 유래했음을 설명하며, 세상이 얼마나 교활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신자들을 미혹하는지를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 영적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잡고 항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통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견고한 인격의 배를 구축하는 것뿐이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성장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으로 수렴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성장의 방향성(그리스도를 향하여), 방법론(진리의 실천), 그리고 필수 환경(사랑 안에서)을 통합적으로 제시한다. 진리와 사랑은 기독교 영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두 날개와 같다. 사랑이 배제된 진리는 차가운 독단과 율법주의로 전락하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은 무원칙한 감상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흐를 수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행할 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상징하듯, 가지된 교회의 모든 생명력과 성장의 동력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서 비롯되며, 그 연합의 본질적 수액은 바로 ‘사랑’이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은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 즉 성도들의 유기적 연결망을 통해 생명력을 공급받고, 각 지체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분량대로 역사할 때, 몸 전체가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건축해 나간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역동적인 교회의 이미지를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과 겹쳐 보여주는 탁월한 성경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죽음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 즉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생명을 얻어 ‘심히 큰 군대’로 재탄생하는 이 환상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흩어진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연합하여 세워지는 신약 시대의 완벽한 예표라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사랑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지체들 간에 서로를 세워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가는 역동적인 생명 공동체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결국, 이 시대의 마른 뼈와 같은 무기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생기 안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위대한 군대로 세워지라는 강력하고 희망에 찬 예언적 선포로 귀결된다.

www.davidjang.org

종에서 아들로 — 장재형목사와 함께 읽는 갈라디아서 4장

갈라디아서 4장은 복음의 심장으로 스며들게 하는 문이다. 신앙은 종종 정보와 논쟁이 뒤엉킨 숲으로 보이지만,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안내를 따라 이 장을 다시 읽으면 시야가 맑아진다. 모든 길은 결국 한 사건, 곧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로 수렴한다. 옷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듯, 성육신이라는 첫 단추가 맞춰질 때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큰 그림이 제자리를 찾는다. 바울은 이 정점을 “때가 차매”라는 절제된 표현으로 붙들어 둔다. 시간의 양(크로노스)이 아니라 의미의 때(카이로스)가 충만해졌을 때, 역사는 새 방향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를 이중으로 준비하셨다. 한 축은 구속사의 중심 무대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시내산의 율법, 성전과 제사의 리듬,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은 메시아를 향한 기대를 공동체의 기억 속에 새겼다. 다른 축은 세속사의 흐름이다. 로마의 평화가 길을 열고, 제국의 도로망과 헬라어의 보편성이 소통의 경계를 낮췄다. 복음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빛난다. 제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변방의 베들레헴, 그마저도 마구간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아들이 태어나셨다. 세상이 힘과 성공으로 자신을 과시할 때, 하나님은 낮아짐과 섬김으로 세상의 논리를 거꾸로 세우신다. 이 전복의 지혜가 갈라디아서 4장 전체를 관통한다.

아들의 오심이 겨냥한 목표는 분명하다. 율법 아래 갇힌 우리를 속량하시어, 마침내 아들의 명분을 주시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율법은 은혜다. 죄를 분별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그러나 거울은 진단할 뿐 치료하지 못한다. 기준은 선명해지지만, 그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 또한 적나라해진다. 바울은 이 상태를 미성년 상속자의 비유로 설명한다. 유업의 주인이 될 아이라도 자랄 때까지는 후견인의 관리 아래 종과 다름없이 산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였지만, 그 교실에 평생 갇혀 죄책감과 의무감에 눌려 사는 것이 문제다. 바로 그 막다른 골목에서 복음이 길을 연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

속량은 추상적 종교어가 아니다. 값을 지불해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시장의 언어다. 한자 ‘속(贖)’에 화폐를 뜻하는‘패(貝)’가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그 현실감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팔린 우리를 해방하시려 아들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다. 십자가는 대속의 자리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요구가 무시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충족되는 길을 예비하셨다. 구약의 대속죄일이 예고편이었다면, 십자가는 본편이다. 예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잠재우는 화목제물이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법적 근거다. 그래서 십자가는 감상이나 연민의 드라마가 아니다. 공의와 사랑이 치열하게 만나는 정점이며,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깃든 자리다.

그러나 복음은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만 풀어 주신 게 아니라 “아들”로 삼으셨다. 입양의 선언은 법적 지위를 넘어 존재의 방향을 바꾼다. 심판을 피하려 벌벌 떨던 종의 마음에서, 사랑받는 자녀의 담대함으로 옮겨 앉는 변화다. 이 변화를 우리 안에서 보증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는 호명을 일으키신다. ‘아바’는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가족의 언어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핵심이 결국 관계임을 강조한다. 멀찍이 규칙을 지키며 버티는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안길 수 있는 신뢰의 관계. 성령은 이 관계를 기념이 아닌 경험으로 바꾸신다. 그 결과, 우리는 신분을 의심하는 고아가 아니라 유업을 기다리는 상속자가 된다. 상속은 먼 미래의 약속으로만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성령의 첫 열매를 맛보는 삶이 상속의 현재형이다.

아들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사랑할 능력의 회복이며,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어서” 순종하는 힘이다. 율법이 바깥에서 채찍질한다면, 성령은 안에서부터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은 자연스럽게 5장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진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는 외부 압박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기후에서 자라는 생명이다. 우리의 몫은 악착같이 애쓰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숨 쉬는 자리를 삶의 중심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바뀐다. 우리는 보통 시계를 바라보며 바쁨과 지루함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때를 준비하신다. 기도하는 기다림, 미뤄 둔 화해를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작지만 정직한 선택,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의 섬김—이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때를 익게 한다. 카이로스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오지 않는다. 새벽의 한 구절 묵상, 따뜻한 메시지 한 줄, 조용한 배려 속에 하나님의 때가 스며든다. 그때 우리는 비교의 리듬에서 벗어나 은혜의 리듬으로 호흡하기 시작한다. 자유의 박자는 성령의 박자와 맞아떨어질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교회 역시 이 리듬을 배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도로와 헬라어를 복음의 통로로 삼았듯, 오늘의 교회는 디지털 도로와 글로벌 언어, 다문화의 광장을 복음의 그릇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수단이 목적을 삼키지 않도록 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그램보다 복음, 방법보다 본질, 성장보다 성숙이 먼저다. 이 질서가 흐트러지면 우리는 금세 “초등 학문”으로 회귀해 도덕 경쟁과 성과주의에 붙잡힌다. 갈라디아서 4장은 이 함정을 경고하며, 종의 멍에를 벗고 아들의 자유로 서라고 초대한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잠재적 심판관이나 경쟁자로 대하기보다, 함께 유업을 이을 형제로 대할 때 복음의 공기가 교회 전체에 퍼진다.

개인의 영성에서도 이 장은 실천 가능한 지침을 준다. 정체성은 성과가 아니라 은혜에서 온다. 우리는 “잘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기에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패가 겹쳐도 성령은 우리에게 붙여 주신 “아들”이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으신다. 기도가 막힐 때는 어려운 수사를 찾기보다 “아바, 아버지”라는 단순한 호명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도 해야 할 목록을 늘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먼저 찾으라. 가정과 일터에서 상대를 상속자로 대하는 작은 배려를 반복하라. 그러면 삶의 리듬이 바뀐다. 쉼이 돌아오고, 감사가 습관이 되며, 평범한 하루가 예배로 변한다. 이것이 이미 주어진 “아들의 권세”가 일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다.

목회 현장에서 장재형 목사가 주는 조언은 땅에 닿아 있다. 설교는 죄책감을 자극해 억지 순종을 끌어내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복음으로 양심을 깨워 사랑의 힘을 흘려보내는 통로여야 한다. 제자훈련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정체성의 견고화—“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선교와 사회참여 역시 아들의 자유에서 출발할 때 가장 창의적이고 오래 간다. 십자가 앞에서 공의와 사랑을 함께 배운 사람만이, 세상 속에서 진리와 자비를 함께 실천할 수 있다. 복음의 공공성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정들에서 힘을 얻는다.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은 초대장이다. 종의 옷을 벗고 아들의 옷을 입으라는 초대, 흘러가는 시간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를 붙들라는 초대, 율법의 교실을 졸업하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 이 초대는 개인의 경건을 넘어 교회의 체질과 사회를 향한 태도까지 바꿀 힘을 지녔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시간 속에서 때를 채우신다. 그러니 오늘 작은 순종으로 그때를 맞이하자. 미뤄 둔 화해를 시작하고, 약한 이에게 손을 내밀고, 정직을 선택하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기도하며 섬기자.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선다. 거기서 아들의 노래가 시작되고, 자유의 호흡이 깊어진다. 복음은 우리의 이름을 바꾼다. 종에서 아들로, 낯선 손님에서 상속자로. 갈라디아서 4장이 선포하는 이 변화를 장재형 목사의 안내와 함께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 보자. 설명보다 선물, 성취보다 은혜, 율법보다 사랑—이 세 단어가 우리의 하루를 이끌게 하자. 그러면 크로노스의 풍랑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항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의 오심으로 열어 주신,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복음의 새 시대다.

www.davidjang.org

장재형 목사 에베소서 4장 강해|교회의 연합과 성숙,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4장을 통해 교회가 무엇을 붙들고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현실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그의 시선에서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휩쓸리기 쉬운 종교 조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준비하는 선봉대, 세상 속에서 복음의 길을 열어 가는 전초기지다. 이 정체성이 분명해질수록 교회는 유행하는 담론이나 일시적 감정의 파도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과 성령의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앞으로의 길을 또렷하게 그린다. 에베소서 4장이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정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 공동체의 구조와 삶의 방식에 관한 선언이다. 몸이 건강하려면 하나 됨과 다양함이 함께 숨 쉬어야 하듯, 교회도 한 분 주님 안에서의 연합과 각 지체에게 주어진 은사의 다양성이 동시에 존중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장재형 목사는 은사를 바라보는 태도를 먼저 바로잡는다. 눈에 잘 띄는 은사가 박수를 독점하고 보이지 않는 섬김이 하찮게 여겨질 때, 공동체는 곧 균형을 잃는다. 그는 어떤 은사도 우열을 매길 수 없다고 못 박는다. 모든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주어진 선물이며, 서열을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를 일으키는 도구다. 예배팀과 교육, 선교와 행정, 돌봄과 재정이 서로 연결되어 흐를 때 교회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강해진다. 이러한 협력은 경쟁의 문화를 협력의 문화로 바꾸고, 독점의 태도를 나눔의 태도로 교체한다. 그 결과 각 지체는 자리를 찾아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전체는 한 몸의 운동성을 회복한다. 장재형 목사는 리더십의 핵심을 “누가 더 많이 하느냐”가 아니라 “모두가 제 은사를 따라 섬기도록 길을 여는가”에 둔다.

직분의 목적에 대한 설명도 분명하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자와 교사는 모든 일을 대신하는 만능인이 아니다. 그들의 사명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는 일이다. 설교가 성경 공부와 멘토링으로 이어지고, 훈련이 실제 섬김과 선교의 현장으로 연결될 때 교회는 관람형 구조에서 참여형 구조로 전환된다. 이 전환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변화를 묵묵히 축적하면 체질이 달라진다. 한 사람이 떠맡던 일을 여러 사람이 나누고, 새신자가 초반부터 작은 책임을 경험하도록 돕는 것만으로도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감이 깊어진다. 실패가 생기면 좌절이 아니라 학습의 기회로 삼는다. 그러면 직분은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믿음과 지식의 균형은 장재형 목사가 가장 섬세하게 다루는 주제다. 그는 히브리적 전통에서 ‘안다(야다)’는 것이 정보 축적이 아니라 인격적 교제와 참여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머릿속 데이터를 늘리는 행위가 아니라, 그분의 마음과 뜻을 삶 속에서 배우는 과정이다. 그래서 믿음 없는 지식은 논쟁만 키우고, 지식 없는 믿음은 쉽게 열광하다 식어 버린다. 교회는 교리 교육과 성경적 세계관 훈련을 체계적으로 운영하면서도 예배와 기도, 성찬과 찬양 속에서 성령의 임재를 깊이 경험하도록 돕는 두 날개가 필요하다. 이론과 체험이 서로를 견인할 때 신앙은 건조한 관념도, 감정의 파고에 매이는 감상주의도 아니다. 배운 대로 살고 산 대로 배우는 선순환이 일상에서 자리 잡으면, 교회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성장을 맛본다.

영적 성숙은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사람으로 자라나는 여정이다. 장재형 목사는 초기의 뜨거운 열심을 귀하게 여기지만, 그 상태에 머무르는 위험도 경고한다. 가치관이 단단히 세워지기 전에 유행 사상과 왜곡된 가르침이 들어오면 미성숙한 신앙은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단계별 양육이 중요하다. 새신자에게는 복음의 기초와 공동체 생활을, 중간 단계의 성도에게는 성경의 큰 흐름과 교리의 체계를, 오래된 성도와 지도자에게는 해석학, 변증, 멘토링 역량을 가르친다. 이런 구조가 갖춰지면 “젖을 먹던” 사람이 “단단한 음식”도 소화하는 단계로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성숙의 표지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드러난다. 갈등에서 자기 주장만 앞세우던 사람이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줄 알게 되고, 인정받지 못해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 늘어날 때, 그 교회는 분명히 자라고 있다.

사랑은 연합의 비밀이다. 사랑 없는 활동은 소음이 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칼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을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의지이자 습관으로 설명한다. 모욕을 당했을 때 되갚지 않고,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며, 책임을 나누는 태도가 사랑이다.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성령의 바람과 사랑의 끈으로 서로 연결될 때 공동체는 큰 군대처럼 선다. 에베소서 4장의 권면은 짧지만 핵심을 찌른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자라게 하며”(엡 4:15–16). 이 말씀은 교회의 연합과 성숙이 감정의 친밀감이나 행정적 일치만으로 완성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 즉 진리와 사랑이 한 몸처럼 작동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자란다.

현대의 가치관이 뒤섞인 환경에서 분별력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대주의와 혼합주의는 그럴듯한 언어로 신앙을 잠식한다. 장재형 목사는 성경과 신앙고백의 골격을 탄탄히 세우라고 권한다. 분별은 의심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며 공동체를 지키려는 돌봄이다. 신앙고백의 전통과 교회사적 사례를 배우고, 오늘의 이슈를 성경적으로 해석하는 훈련을 받으면, 소셜미디어의 격한 여론과 즉흥적 감정에 덜 흔들린다. 상호 점검과 권면의 문화도 중요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며 지혜로운 피드백을 나누는 습관이 자리 잡으면, 교회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는 명령을 일상의 언어로 살게 된다. 묵상과 기도가 지적 탐구를 넓히고, 탄탄한 공부가 경건의 삶을 구체화하는 선순환이 여기서 생겨난다.

디지털 환경 속 사역 방식은 균형이 관건이다. 온라인은 복음을 빠르게 전하고 학습 자료를 넓게 공유하는 데 큰 장점이 있다.그러나 공동체성은 대면 관계에서 자란다. 장재형 목사는 온라인은 보조, 오프라인은 중심이라는 원칙을 제시한다. 현장 예배와 소그룹, 식탁 교제, 함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 같은 대면 경험이 교회 문화를 지탱하고, 온라인 콘텐츠는 그 경험을 확장하고 보완한다. 가정예배를 다시 세우고, 팀 사역에서 동료의 강점을 기록해 격려하고, 한 주에 한 번 이웃을 축복하는 습관 같은 구체적 실행이 대표적이다. 작은 실천이 쌓이면 분위기가 달라지고, 분위기가 변하면 구조가 바뀐다.

공공성을 향한 시선도 빼놓을 수 없다. 교회는 지역사회와 분리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연합과 성숙은 공적 책임을 통해 검증된다. 고통받는 이웃을 돌보고, 정의와 자비를 사랑하며, 창조 세계를 돌보는 작은 행위가 일상에 스며들 때 교회는 신뢰를 얻는다. 이 과정이 특정 이념의 구호로 흐르지 않도록 복음의 본질을 중심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은 이념을 넘어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새롭게 한다. 말의 크기보다 삶의 일관성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작은 선함이 오래 축적될 때 도시는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을 실천적으로 점검하자고 제안한다. 봉사 참여율, 선교의 실제적 열매, 지역사회 신뢰도 같은 항목을 정직하게 살펴보면, 교회가 빛과 소금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숫자 중심 성과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실제 열매를 확인하는 균형 감각이 여기서 빛난다.

교회 간 연대는 사역의 지평을 넓힌다. 같은 도시에 있는 여러 교회가 복음의 본질에서 손잡으면 교육과 돌봄, 선교와 자원봉사에서 시너지가 커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복음적 연합이라 부른다. 복음적 연합은 모든 사안에서 같은 의견을 요구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성경의 권위를 중심으로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협력하는 문화다. 강점과 약점을 솔직히 나누고, 자원을 공유하며, 서로의 경험을 배워 갈 때 적은 힘도 큰 파장을 만든다. 이 연합은 교회가 세상과 경쟁하는 집단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공적 주체임을 보여 준다. 더 나아가 교회의 다양한 전통이 조화롭게 어울릴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를 보게 된다.

현장에서 드러나는 리더십의 핵심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사랑 없는 진리는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진리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로 흐른다. 지도자는 단호함과 온유함을 함께 배워야 한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도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는 언어를 선택하고, 갈등을 해결할 때에도 공동체의 미래를 바라보는 넓은 시야를 잃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리더십 아래에서 성도들은 방어적 태도를 내려놓고 서로에게 배우며 더 나은 길을 찾는 토론 문화를 익힌다. 이 문화가 정착하면 혁신은 상처 없이 일어난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진행되는 변화는 공동체를 오히려 성숙하게 만든다. 그 결과 교회의 구조와 프로그램, 언어와 관계가 서서히 새로워진다.

결국 장재형 목사가 에베소서 4장으로 비추는 교회의 비전은 명료하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고,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로 서로를 세우며, 믿음과 지식의 균형 속에서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자라가야 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띠이며, 분별은 공동체를 지켜 주는 지혜다. 성숙은 화려한 행사로 측정되지 않는다. 오늘 더 온유한 말을 선택하고, 내일 더 기꺼운 헌신을 실천하며, 모레 더 정직한 결정을 내리는 작은 걸음이 성숙의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길이 이상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충분히 가능한 현실적 약속이며, 이미 많은 공동체가 경험한 복음의 능력이다. 필요한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응답하는 용기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찾아 봉사의 자리에 서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말씀과 기도로 분별을 연마하는 삶, 이것이 곧 교회의 연합과 성숙을 향한 실제적 발걸음이다. 이런 작은 순종이 내일의 문화를 만들고, 그 문화가 세상을 섬기는 교회를 세운다. 흔들림 많은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더 단단히 연결되고 더 따뜻하게 사랑하며 더 지혜롭게 자라가야 한다. 이 길을 안내하는 목회의 나침반으로, 장재형 목사는 에베소서 4장을 오늘의 언어로 번역해 주고 실천 가능한 계획으로 제시한다. 그 비전에 응답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 선명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다.

장재형 목사 공식 사이트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 요한복음21장 강해

1. 요한복음 21장의 구조와 의미

요한복음 21장은 흔히 ‘부록’ 혹은 ‘에필로그’ 장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이미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명시함으로써, 저자가 복음서를 쓴 목적과 그 결론을 충분히 전달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1차 목적이었다면, 21장은 그 복음서의 결론 이후에 덧붙여진 후일담, 혹은 결론 이후에 남겨진 제자들의 삶과 주님의 마지막 메시지,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선교적·목양적 방향을 제시하는 장으로 볼 수 있다.

이 21장에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 등장한다. 1절에서 14절에는 디베랴 호수(갈릴리 호수)에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기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후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 하심으로써, 베드로와 더불어 모든 제자(특히 교회 지도자)가 감당해야 할 목양의 사명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21장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심으로 종말론적 ‘때’와 ‘시기’에 대한 언급을 해주신다. 이는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그레잇 커미션(The Great Commission)’과는 또 다른, 매우 실존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의 말씀이다. 이로써 요한복음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라는 대전제 위에, 교회 공동체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주님의 재림’과 ‘역사의 끝’을 준비하는가를 깊이 있게 그려 낸다.

이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역시 디베랴 호수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요한복음에는 디베랴 호수라 지칭)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놀라움과 신비로 가득하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다시금 고기를 잡으러 떠났고, 밤새 그물을 내렸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물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라진 어떤 세상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들의 귀환’이라 불러도 좋을 이 모습은, 때로는 인간이 체감하는 영적 무기력, 기대한 대로 전개되지 않는 삶의 상황, 그 가운데서 옛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에서 고기를 잡던 그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즉시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명령하신다.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이었고, 앞도 뒤도 아니었다. 이를 두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여러 설교자들은, 그 방향이 곧 ‘주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복음에 있어서 ‘방향’이란 삶의 질서이자 순종의 태도다. 사람들은 쉽게 특정한 방식대로, 혹은 자신이 익숙한 쪽(왼편, 혹은 뒤편)으로 그물을 내리려 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분명하게 “오른편으로 던지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야 할 길, 즉 ‘선교와 목양’이라는 방향성을 재확인하라는 요청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은 크게 놀랄 만큼 풍성한 물고기로 가득 찼다. 심지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요21:6). 이 경험은 누가복음 5장 초반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사건과도 맞닿아 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요한복음 21장의 이 장면 역시 그 부르심이 ‘완성’ 혹은 ‘확증’되는 순간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큰 고기를 풍성히 잡도록 이끄신 건, 결국 이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가‘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듯 ‘온 열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선교’에 쓰임 받을 것임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21장 11절에 강조되는 부분이 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보통 그렇게 큰 물고기가 잡히면 그물이 찢어질 법도 한데, 여기서는 다소 ‘초자연적’이라 부를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된다. 교부 시대부터 이 상징성을 해석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또는 복음)은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신학적 해석이 많이 공유되었다. 어거스틴 같은 교부도 이 153마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번에 잡은 이 ‘153마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중요한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히브리어의 ‘수신학(Gematria)’ 전통에 따라 “베니 하 엘로힘(Bənē hāʾĔlōhīm)”, 즉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는 말의 숫자 합이 153이라는 설명도 제시되었다. 이것이 정확히 맞는지 여부는 다소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중요한 점은 초대교회가 이 숫자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소유가 된 자들’로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될 ‘크리스천 공동체’를 이 물고기 숫자가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초대교회에서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암호로도 쓰였다. ‘ΙΧΘΥΣ(익투스)’라는 헬라어 낱말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의미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어서, 박해 시대에는 물고기 모양을 그리거나 새김으로써 서로 ‘동지’를 인식했다고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바로 그런 상징성을 요약하여 보여 주는 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므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말은,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 사역에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는 확신을 던져 준다. 그러한 믿음은,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은 결코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넘치도록 역동적”임을 선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이 장면에서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예수님께서 이미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그 위에 떡과 생선을 준비해 두신 장면이다(요21:9).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따라 풍성한 고기를 잡아오긴 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식탁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는 흔히 ‘성찬’을 상징한다. 또한 누가복음 24장에 나타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떡을 떼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눈이 밝아졌던 사건,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치셨던 맥락과도 연결된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져온 물고기는 ‘인간의 수고와 순종의 열매’라 할 수 있지만, 애초부터 모든 것의 ‘시작’은 예수님의 베푸심이다. 이는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먼저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에 인간이 초청받아 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기에, 요한복음21장의 숯불 위에 준비된 생선과 떡은, 단순한 식사 이상으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노력이나 헌신이 분명 필요하지만, 모든 것의 기초는 ‘주께서 이미 준비해 두신 은혜’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후 21장 15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반복해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명령하신다. 누가복음 22장 3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받았고, 실제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공공연히 부인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상처와 실패를 회복시키시는 동시에, 그의 소명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 그 결과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 이후 담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인물로 변화한다. 특히 사도행전 4장에서는 안나스(대제사장) 앞에서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라고 예수의 유일성을 담대히 선포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즉, 요한복음 21장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갈래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선교’이며, 다른 하나는 ‘목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풍성한 물고기를 잡도록 하심으로써 ‘열방을 향한 전도와 구원의 역사’를 예시하고, 또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향한 돌봄(목양)의 사명’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이미 마련해 놓으신 식탁’을 기억하는 예배와 성찬, 그리고 주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 교회가 ‘전도’와 ‘목양’을 반드시 붙잡아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미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을 책임감 있게 돌보며 성장시키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 후반부에 있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1:23)라는 말씀이 묘사하듯,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임하는가?”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 등에서 ‘재림’ 혹은 ‘종말’을 예고하셨고, 사도행전 1장 6~7절에서도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21장 23절에도 반영된, ‘때와 시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희는 내가 맡긴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쩌면 본문의 핵심 주제이자, 교회가 이 땅에서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면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신앙적 태도를 보여 준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인 셈이다. 그 대답이 바로 “너희는 나가서 전도하라,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양떼를 돌보라”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메시지를 종합해 볼 때,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을 넘어,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복음 전파와 공동체 돌봄,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함축한 장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베드로 개인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는 곧,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라”, “주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라”, “2세들을 비롯해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양육하라”는 구체적 요청이다. 여기에 전도와 세계선교의 사명이 함께 들어 있는 까닭에, 많은 지도자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153마리 큰 물고기와 같이 세상 곳곳에서 주를 향해 돌아오는 사람들을 주의 교회가 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와 문서에서, 이 21장의 메시지를 기반으로 “세계를 품는 교회, 전 인류를 향해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 그리고 영적으로 목양하는 강건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교회의 최종적인 모습은 “사랑으로 양을 돌보는 목양”과 “열방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 전도”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 균형을 잃으면 교회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즉, 오직 교회 안에 있는 기존 성도들의 돌봄에만 몰두하다가 외부로 나아가는 ‘선교적 사명’을 소홀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도’에 치중하다가 교회 내부의 연약한 지체들이 상처 입고 방치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은 바로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라고 하심으로써 ‘위로부터 주어지는 방향’에 순종해야 할 것을 알려 주셨고, 또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써 목양을 함께 당부하신 것이다.

이 메시지는 초대교회가 지닌 역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현대 교회의 비전 및 사명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의 문제는 종종‘때와 시기를 자기 방식으로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속히 오시리라고 믿으면서도, 정작 그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멀리할 때가 있다. 혹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 안에만 갇혀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21장의 말씀은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너희는 맡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그 사명은 곧, 열방을 제자 삼는 선교와, 주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목양이다. 주님의 진정한 최후 명령(‘내 양을 먹이라’와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의 결합)은 단 한쪽만으로는 교회를 온전히 세울 수 없다는 점을 알려 준다.

더욱이 여기에 덧붙여, 역사관과 세계관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는다. 21장에서 베드로는 일곱 제자 중 하나로서 다시금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았으나, 결국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야 풍성한 열매를 보았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역사란 인간이 자기 노력만으로 개척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순종할 때에 열리는 장’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깊이 탐구하고, 세계가 결국 어떤 결말(종말)로 나아가는지를 성경의 시각으로 이해해야만 흔들리지 않고, 소시민적인 이기심에 빠지지 않으며, 달팽이가 달팽이집에 들어가듯 자기 안에만 갇히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청년들과 2세대들에게 성경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르쳐야 한다. 인류 역사가 단지 우연이나 물질적 흐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궁극적 구원과 심판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 21장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제자들이 맞닥뜨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선교적 순종과 목양적 책임을 다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선교와 목양의 긴장 속에서 교회가 견지해야 하는 사명의 에센스”로 요약하면서, 실제 사례로서 교회 개척, 학교 설립, 미디어 사역, 문화 사역 등을 통해 전 세계 153개 지역(이른바 ‘153 비전’)에 복음을 전하고, 다양한 영혼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비전을 품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이는 명단상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상징하듯, 궁극적으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비전과 중첩된다.

실제로 교회가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려 할 때, 세상은 여러 경로로 교회를 압박하고, 복음 전파의 방향성을 흐리게 만들고자 한다. 그 가운데 교회는 무엇보다도 주님이 말씀하신 ‘오른편’—즉 ‘하나님이 이끄시는 정확한 방향성’을 붙들고 떠나야 한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세계선교에 뜻을 둔 여러 지도자는 이러한 원리로, 각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도전을 교회가 수용하면서도 본질인 복음을 결코 타협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그물)은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나아가 수많은 영혼을 건져 올려도, 그 그물은 능히 감당해 낸다. 다만 교회가 방향을 잃어 그물을 다른 쪽으로 던지려 할 때, 혹은 아예 던지지 않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 메시지를 기억하는 것만이, 요한복음 21장이 전하는 ‘풍성함’과 ‘생명’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는 길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몰라본 제자들의 눈이 다시금 뜨이고, “주님이시라!”(요21:7)라는 감격의 고백으로 이어진 장면은,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부활절 이후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암시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머리로만 아는 믿음’에 멈추지 말고, 실제 생활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을 체험하며, 그분이 지시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이다. 이때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는” 베드로의 모습은, 실로 열정적이다. 신학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회복의 열정을 소유한 존재로 거듭났다”고 해석한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과거가 있지만, 그 실패를 넘어서 주님께 달려가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20장까지 전개된 복음서의 결론 뒤에 놓인 ‘새로운 시작’에 관한 기록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이제 제자들은 이전에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에서의 수고와 책임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 몫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고, 양들을 먹이는 사명’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결정적 사건 이후에 감당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으셨고, 여전히 앞서 숯불과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으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다. 이 내용을 묵상하는 오늘의 교회 역시,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말에 가까울수록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은 “선교와 목양, 역사와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리고 다음 세대를 책임감 있게 양육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 전도와 목양의 실천 그리고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두고 설교하면서, 특별히 “선교와 목양”이라는 두 축을 강조한다. 그는 이 장을 “전도와 목양의 장”이라고 부르며, 실제로 초대교회부터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공동체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핵심 과제임을 누누이 역설해 왔다. 전도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오른편으로 던지라”—에 순종함으로써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목양이란,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베드로를 지명하시어“내 양을 먹이라”고 거듭 세 번 부탁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돌봄의 의무를 교회 안팎에서 실행해 가는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한쪽이 과도하게 강조되면 교회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먼저 선교에 대해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복음서들의 공통된 흐름 중 하나다. 마태복음 28장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하신 ‘그레잇 커미션’ 장면을 기록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는 선언에서, 예수님은 선교 사명의 근거와 그 결과 모두를 제시하셨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심으로써, 교회가 계속해서 ‘열방’을 향해 전진해야 함을 역설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흐름,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를 통합적으로 묵상하며,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풍성한 전도의 결실을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주님의 지시하시는 방향, 즉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순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선교 현장에서 우리는 때로 인간적 전략, 통계나 노하우만을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세대와 문화권이 다르며, 지역에 따라 선교 접근 방식은 다양하다. 결정적으로,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그저 자신들의 계산과 경험으로 선교 전략을 세운다면 오히려 깨어진 그물만 남길 수도 있다. 반대로,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허락하신 방향과 방법에 순종하며 전할 때, 우리는 초대교회가 보았던 ‘놀라운 부흥’과 ‘생명력 있는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렇듯 전도와 선교는 교회 본질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세계선교”를 이루기 위한 비전도 제시해 왔다. 153마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기반으로 ‘153 비전’을 말하거나,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지구촌 곳곳에 학교나 신학교, 병원, 미디어 센터 등을 세워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거점으로 삼는 등의 계획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물이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에 기초한,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사역 비전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가 이런 거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본문의 제자들도 한 번에 153마리를 건져 올리기 전까지 ‘밤새 헛수고’한 경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셔서 오른편에 던진 그물”은, 상상 못 할 풍성함을 가져왔다. 이 사실이 바로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일이며, 그분이 직접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전도의 과업을 감당함과 동시에, 교회는 목양에도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묻고, 세 번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한 사랑 고백의 회복을 넘어, “너는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맡길 양들을 책임지고 돌보라”는 준엄한 요구였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는, 양들을 안전하게 이끌고, 바른 말씀과 진리로 먹이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곧 목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양이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늘려 간다 해도, 결국 영적 돌봄이 부재하여 자라지 못하거나 상처 입고 떠나는 이들이 속출할 수 있다. 선교와 목양은 반드시 함께 진행되어야 하며,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특별히 “베드로-교회 지도자-모든 성도”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시는 음성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강력한 호출이다.

이러한 목양은 교회 내부를 넘어, 세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확대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 또한 여러 설교와 글에서, 교회가 세상의 가난하고 외로운 영혼들을 찾아가 섬기고, 그들에게 복음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문화적 자원을 제공하며 실질적으로 돕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사회적 발전에 기여했던 선례가 있으며, 초대교회도 로마 제국 치하에서 박해받으면서도 병자와 고아, 과부를 돌보는 데 앞장섰다. 이는 결국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적용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더 넓은 역사적·세계적 시야를 가져야 하며, 결코 자기 교회나 자기 민족 안에만 갇히지 않고, “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공유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강조하면서,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한 번2세대를 세우고, 그들에게 성경적 역사관을 가르치며, 열방을 꿈꾸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나’를 중심으로 한 문화—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고,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삶과 커리어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사고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라고 명령하며, 더불어 “이 세대의 흐름을 본받지 말라”(롬12:2)고도 명한다. 이는 개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동참하라는 초대다. 교회가 2세들을 향해 이러한 성경적 역사관과 세계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때, 다음 세대들은 점점 세상 안에서 자기만족과 세속적 풍조를 좇다가 ‘물고기 잡는 사명’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의 교훈—“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단지 ‘제자 시대’나 ‘교회 지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부모와 교육자, 그리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붙들어야 할 진리가 된다.

“주여, 제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베드로의 이전 고백(눅5장)과도 같이, 우리가 현실에서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해도, 주님이 정하신 시점과 방향에 순종하면 “153마리의 큰 물고기”와 같은 결실을 얻게 된다. 이는 경제적 풍요를 넘어, 영혼 구원과 세계선교라는 측면에서 더욱 참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 설교 중, 이 153마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은 우리가 붙든 복음의 망(net) 안으로 들어올 하나님의 아들들의 총체이며,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들의 상징이다. 그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절대 찢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물이 약해질까 염려할 게 아니라, 어떻게 더 많은 영혼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처럼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복음이 단단히 견고하고, 그 안에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고백이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전도와 목양의 동시적 요청, 그리고 종말론적 인식 속에서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 준다.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가 끝없이 확장되면서도, 동시에 안으로는 깊이 돌보는 사역이 이뤄지길 바라는 주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 교회 역사는 실제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로마 제국 시대, 중세 시대, 종교개혁,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낚임 받은 영혼들’과 그들을 목양하는 ‘교회 공동체’가 세워져 왔다. 물론 세상의 도전과 오류도 많았고, 교회가 그 사명을 오해하거나 실행하다가 실패한 부분도 많았지만, 핵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물을 던져야 하고, 양들을 먹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 언제 오시나?”라는 호기심이나 ‘시기 계산’에 함몰되지 말고, “때와 시기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맡겨진 오늘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21:2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함의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시점을 두고 논쟁하던 초대교회 공동체들에게도, 그리고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재림 날짜를 추측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충성스럽게 이 복음을 전하고 서로 사랑하며, 목양을 통해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이 지닌 종말론적이고, 동시에 선교적이며 목양적인 초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매년 총회를 준비하거나 새로운 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되새기며“역사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다시금 각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자칫 내부만 바라보고 자기 울타리 안에 안주한다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왼편이나 뒷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세상에서 조금만 풍요로워지면,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을 잊고 오락과 유흥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영역이니 네가 함부로 간섭하지 말고, 종말론적 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라.” 이 명령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며, 교회가 맡은 사명은 ‘안으로는 서로 돌보며 키우고(목양), 밖으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삼는 것(선교)’이다. 이것이 매년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의 사역과 총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어떤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 그 지역 특유의 문화와 계절,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며, 서로를 돌본다. 도버의 아름다운 사계절, 단풍이 물드는 가을 풍경이나 눈 내리는 겨울 풍광이 더 인상 깊게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교회의 사역과 기도, 예배와 교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교회가 “건설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은, 물리적 건물의 건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지역과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가자”는 의지를 담는다. 그 시작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것”이요, “양을 먹이기 위해 필요한 영적·실천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요한복음 21장 말씀을 따라 선교와 목양을 함께 꿈꾸는 모든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바로 이 원리로 다음 세대를 기를 학교를 세우고, 열방에 파송된 선교센터를 운영하며, 복음과 사랑을 전파하고자 한다. 결국 이 모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행보는 요한복음 21장의 “153마리의 큰 물고기”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베니 하 엘로힘)인 크리스천 공동체를 전 세계에 확장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주님의 물음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었다면, 이제 세상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몰라도, 교회와 성도들은 눈앞에 놓인 선교와 목양의 기회를 붙잡아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그 수고의 결과로 우리가 사역하는 각 지역(도버를 포함하여 전 세계 어디든)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2세들은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춘 믿음의 세대로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의 결론이자,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서들의 그랜드 피날레’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의 결말에 이어 21장이 ‘부록’처럼 존재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20장 결론)는 분명한 복음의 핵심 진술 뒤에, 그 믿음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지침이 21장에 담겨 있다. 그 지침이란 바로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되, 때와 시기에 연연하기보다는 너희가 가야 할 방향(오른편)과 해야 할 책임(내 양을 먹이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말씀이다. 교회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사역하다가, 종국에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신랑이신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룰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153마리의 물고기’처럼 수많은 영혼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그물(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찢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핵심—전도와 목양—이 요한복음 21장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통해 강조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세 번째 중요한 흐름인 ‘재림과 종말론적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은 “종말이 언제 도래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살아 있건 어찌하건 네가 알 바 아니니,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말씀을 남겨 둔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주님이 이미 주신 사명(선교·목양)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지, 종말의 때와 시기를 정확히 계산하거나, 그 논쟁에 매몰되는 게 아니다. 초대교회나 현대교회나, 인간은 종종 “주님, 언제 다시 오십니까?”라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되묻으신다.

그렇다면 교회는 실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21장이 제시하는 길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양을 먹이듯, 교회 안에서 서로 돌보되, 바깥으로는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리듯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육과 선교를 병행할 때,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교회는 ‘찬양’과 ‘감사’의 공동체로 거듭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일이 곧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요한복음 21장의 핵심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요약한다. 나아가 교회가 세상 문화와 교육, 사회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와 세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자녀들에게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그리고 종말의 비전을 깨닫지 못하면, 젊은이들은 세상의 유혹과 풍조에 쉽게 동화될 것이며, 교회의 사명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 이후에 주어진 추가적인 장이자,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기적과 사랑의 대화, 그리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 사명을 담고 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했던 베드로의 일상적인 고백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열어 가는 계기가 됐다.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셔서 풍성한 어획을 경험하게 하셨고, 숯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가 지닌 과거의 실패를 회복시키셨으며,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명을 부여하셨다. 이 대목은 곧 ‘교회 지도자’에게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전도와 목양’의 공동 소명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교회가 맡은 일은 “그물을 던져 열방을 구원하고,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양들을 성실히 먹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이며,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 본문을 통해 받고 있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마지막 구절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고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 풍성함의 핵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 그리고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직접적인 명령으로 요약된다. 교회가 이 명령에 충실히 따를 때, 우리는 개인 구원을 넘어 역사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하고 선한 섭리를 조금이나마 함께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천하 만민” 중에서 구원을 얻은 많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그날을 바라보며, 각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그 방향—오른편”과 “목양”이라는 소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이 오늘, 그리고 내일의 교회에게 던지는 도전이자 초청이며, 결코 흘려듣지 말아야 할 최후의 권면이다.

요한복음 21장 본문의 흐름과 그것이 지닌 신학적·실천적 의미를 중심으로, 장재형 목사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과제(전도와 목양, 다음 세대 교육, 세계관 확립)를 아우른다. 그 핵심 결론은 “복음서의 결론 이후에 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전도와 목양이며, 그 방향과 능력은 주님이 이미 마련해 놓으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1. 전도서와 지혜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전도서를 ‘지혜서’로 분류하여 성경 속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말하는 지혜서로서의 전도서는 인간의 지혜가 단순한 ‘지식 축적’이나 ‘삶의 경험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므로써 얻게 되는 영적 통찰임을 드러낸다. 특히 전도서와 잠언서가 가진 공통된 분류인 지혜서의 특성과, 또 각각이 보여주는 독특한 메시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잠언서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지침을 “여호와 경외”라는 큰 주제를 기반으로 제시하며, 전도서는 좀 더 존재론적인 질문, 곧 ‘인생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헛되다는데 그것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근본적이고 직설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다.

전도서의 대표적인 키워드는 ‘허무(헛됨)’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허무라는 단어를 종종 영어 성경에서 번역된 ‘meaningless’와 비교하여 설명하며, 그 의미가 단순히 “모든 것이 의의나 가치가 없다”라는 수준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간 실존이 가진‘무(nothingness)’로 돌아가는 운명적 속성을 지적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무’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전도서의 서두와 결말에서 동일하게 선언되며, 저자인 ‘전도자(전도서 저자)’가 인생의 본질에 대해 비관적이고 삭막한 통찰을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비관적 결론이 오히려 영적 의미를 가장 깊이 드러내는 장치라고 설명한다. 전도서는 계속해서 인간이 지적 능력(전 1장)과 육체적 쾌락 및 재물(전 2장)을 다 누릴지라도 결국에는 모두 헛됨으로 귀결된다고 강조한다. 이 ‘헛됨’은 시간을 소유한 인간이 결국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을 놓아야 하는 ‘유한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하나님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나 영원한 가치를 찾기 어려움을 드러낸다.

따라서 전도서는 지혜서로서 인간이 쉽게 놓칠 수 있는 두 가지 전제를 상기시킨다. 하나는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9장 27절 말씀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모든 인류에게 변함없이 주어진 원리임을 장재형목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언급한다. 이는 전도서가 말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주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인간이 가진 시간, 재능, 물질, 어느 것 하나도 죽음 이후에 가져갈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근본을 성찰하게 만든다. 다른 하나는,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 3:11)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동물이 자신의 죽음 이후의 세계나 본질적 목적에 대해 사색하지 않는 반면, 인간은 누구나 ‘죽음 너머는 어떻게 되는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궁금해한다는 점을 들어, 이것이 곧 하나님이 넣어주신 영원의 갈망이라고 주장한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가 “인생이 헛되다”라는 선언에서 시작해 마지막 12장에 이르러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권고로 이어지는 전개가 지혜서의 특징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고 본다. 이처럼 자신의 존재가 결국 헛됨으로 끝나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살아있는 ‘청년의 때’—이는 단순히 나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수성과 신앙의 열정이 가장 생생히 발현되는 때를 상징한다—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 곧 참된 지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전도서 12장 8절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결론 역시, 인생의 모든 것(소유, 지식, 명예 등)이 마침내 헛됨을 확인시켜주고, 이것을 반면교사 삼아 인간의 영적 본질을 깊이 일깨우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잠언서의 핵심 명제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또는 지혜)의 근본”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뛰어나고 학문이 발전한다 해도, “여호와 경외”라는 영적 기초가 없다면 결국 그 지식은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것에 그치며,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에 포섭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결국 ‘전도서와 잠언서’라는 지혜서의 쌍은, 경외함(잠언서)과 허무(전도서)라는 상이해 보이는 개념이 긴장과 균형을 이루며 인간의 실존과 신앙을 통찰하도록 돕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지혜서의 가르침을 각 시대와 세대에 맞추어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청년뿐 아니라 모든 연령대가 인생의 무상함을 외면하지 말고, 그 자각을 통해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전도자의 메시지를 귀담아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 덧붙여, 전도서 3장 1절과 3장 11절을 연결해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전 3:11)라는 두 본문은 모두 인생의 유한한 시간과 하나님의 영원하심, 그리고 인간이 직면하는 신비와 경외심을 말한다. ‘때’는 단순히 흐르는 시간(Time)만을 말하지 않고, 목적을 이루는 특정 시점(Date)의 도래를 포함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 안에 있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결국 이 땅의 일시적이고 유한한 시간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영원 안으로 들어가도록 인도하는 동력이 된다고 풀이한다. 이처럼 전도서는 지혜의 책으로서 기독교 신앙인에게 ‘우리 삶을 통찰하라, 죽음을 인식하라, 영원을 바라보라’라는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전할 때, 청년이나 노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사실은, 결국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으며, 그 앞에서 모든 소유와 지식, 명예가 무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는 전도자가 선언하듯 허무이지만, 동시에 그 허무함을 깨달은 이들에게는 하늘의 지혜가 임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오히려 이러한 허무와 죽음을 의식하는 것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beyond tragedy)을 열어준다고 말한다. 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의 해답은 전도서의 맥락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신약 성경에 이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라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따라서 전도서가 보여주는 헛됨의 선언은 마치 인간이 갈증을 느껴야 물을 찾듯이, 영적인 갈급함을 깨닫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의 길을 발견하도록 이끌어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과학자들의 관점에도 주목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섬세한 질서와 그 거대함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고, 그 경외심이 결국 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이끌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로마서 1장 20절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라는 말씀이 이를 뒷받침한다.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 세계를 보면, 그 질서를 부인할 수 없게 되고, 그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는 인간 존재의 미약함을 상기시키고, 동시에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그 안에 담긴 영원한 섭리를 인식하도록 안내하는 통로가 된다. 삶의 본질을 깨닫고자 하는 지혜자의 길이 곧 전도자가 강조하는 “죽음을 인식하고 창조주를 기억하는 길”이라는 점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전도서가 ‘늙기 전에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선언하는 장면에서, 인간의 구체적 노화 과정(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다리가 떨리고, 이가 빠지는 등)을 예로 들어 삶이 얼마나 빠르게 쇠퇴해가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황혼기에 비로소 삶의 목적을 고민하는데, 그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시들어버려 움직임이 어려울 때가 많다. 결국 하나님을 믿고 영원을 바라보는 지혜는 청년기부터, 곧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인 시기에 시작되어야 한다는 성경적 권고가 여기에 담겨 있다. 즉 ‘헛됨’을 알되 그 헛됨에 갇혀 비관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디딤돌 삼아 참된 생명의 길을 찾게 하는 것이 전도서가 주는 궁극적 가르침이라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메시지다.

이렇게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 죽음, 그리고 ‘창조주 기억’의 구도는 청년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전 과정을 꿰뚫는 보편적이면서도 강렬한 주제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를 반복해서 설명하며, 교회 안팎의 모든 사람이 전도서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영원에 대한 갈망’을 마음 깊이 새기길 촉구한다. 특별히 교회가 어린 시절부터 이 진리를 가르쳐야 하며, 자라나는 세대가 어릴 때부터 인생의 본질과 그 마지막을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적 존재이며, 진리를 사모하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의 소망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잠언서로 대표되는 “여호와 경외”의 길과 전도서가 보여주는 “인생의 허무와 창조주 기억”이라는 길은 본질적으로 같은 열매를 맺는다고 장재형목사는 주장한다.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것이다. 그 경외심으로부터 모든 참된 가치와 의미가 흘러나오기에, 인간의 지식이 아무리 위대해도 하나님이 없는 지식은 결국 부분적 성찰이나 일시적 유익을 넘어 eternal value(영원한 가치)로 승화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강조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인간은 유한하고, 죽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고, 그 안에서 참된 지혜는 창조주를 기억하여 영원을 붙드는 것이다”로 정리된다. 그는 이를 각종 비유와 성경 예시를 들어 설파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뿐 아니라 세상 속에서도 전도서의 메시지가 유효함을 역설한다. 만약 우리가 이 깨달음을 놓치고 살면, 한평생 애써 쌓아 올린 것들이 어느 순간 허무하게 사라지는 과정을 맞닥뜨리며,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서가 말하는 진정한 지혜를 붙들 때, 우리 삶은 하나님이 만드신 때(Time)와 목적(Date)를 향해 열려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비로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의 진정한 의미를 누리며 살게 될 것이라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2. 인간의 유한성과 영원에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통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인간의 삶이 왜 헛된가?”, 그리고 “그 헛됨을 넘어서는 길은 무엇인가?”이다. 이는 곧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의 소망을 대비시킴으로써 더욱 선명해진다. 그가 말하는 유한성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 안에 있는 인간의 본성을 가리킨다. 아무리 높은 지식을 쌓고, 재물을 거두고, 쾌락을 누려도, 인생의 종국에 닥쳐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전도자는 이를 ‘헛됨’이라는 단어로 반복해서 강조했고, 장재형목사는 그 ‘헛됨’을 성경적 언어로 ‘무(無)에 대한 회귀’ 또는 ‘궁극적 소멸’로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렇게 ‘허무함’을 주셨는가? 여기에 대한 답으로 장재형목사는 전도서 3장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라는 구절을 중심에 둔다. 인간 안에 있는 영원에 대한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이라고 보는 것이다. 동물은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색하지 않고,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만은 왜 존재하고, 왜 죽어야 하며,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는지 늘 궁금해 한다. 이런 영적 갈망이 바로 전도서가 말하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일종의 ‘내면화된 신앙 본능’으로도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신앙을 배우지 않았더라도, 우주적 경이로움이나 생명의 신비를 깨닫는 순간, 신적 존재를 자연스레 궁금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갈망을 때로는 세상적 쾌락, 재물, 권력으로 채워보려 시도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적한다. 전도서 1~2장에서 전도자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낙과 즐거움을 누려보았지만, 모두 일장춘몽처럼 사라지고 또 헛되었음을 고백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현대 사회가 제공하는 각종 물질적 풍요와 오락, 정보의 홍수는 인간의 영적 갈망을 온전히 채워주지 못한다. 오히려 그 갈망은 점점 더 큰 갈증을 낳을 뿐이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삶은 맹목적인 ‘노력’과 ‘축적’을 계속하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된다는 사실을 결국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때, 전도서가 선언하는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결론이 다시금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한다. ‘허무’를 자각했다는 것은, 그 자각을 통해 진리이신 하나님을 향해 갈 수 있는 기회가 열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한계를 깨달았을 때, 우리의 눈은 자동으로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에게 돌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성적인 계몽이나 도덕적 완벽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해결책을 통해서만 극복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한다. 구체적으로 신약성경이 전하는 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죄와 죽음의 권세가 깨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복음이야말로 전도서가 제기한 허무 문제의 최종 해답이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재형목사는 “인생을 사는 것이냐, 죽어가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시시각각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비극적 실존이다. 그러나 이 비극을 넘어서는 길(beyond tragedy)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생’과 ‘천국’의 소망을 붙드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할 때, 전도서가 지적한 허무의 심연을 통과하여 오히려 참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전환이 일어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두 가지 시각으로 설명한다. 첫 번째로, “우리 안에 더 귀한 것이 이미 있다.” 이는 사도행전 3장 6절에서 베드로가 말한 “은과 금은 내게 없으되 내게 있는 것을 네게 주노니”라는 표현에 착안한 것이다. 즉, 물질적 소유나 세상적인 권력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는 이미 참되고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현재가 영원과 이어져 있다.” 이는 우리의 순간적 삶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인식이다. 믿음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된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영원한 지금(eternal now)’이라는 개념이 여기 해당한다. 결국 인간이 겪는 모든 비극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고, 그 비극적 현실이 영원을 향해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관점을 전하며, 교회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의 본질을 깨달은 신앙인은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 4:19)고 하셨고, 마지막으로 승천하시기 전에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명하셨다. 이른바‘대사명(Great Commission)’이다. 그러나 소유에 묶여 물질적 안일만을 추구한다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상황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기독교 신앙인의 메시지를 “소유를 극복하라”로 압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에서 우리가 필요를 위해 노동하고 재화를 벌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더 큰 가치—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마 6:33)—를 추구해야 비로소 참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길이 바로 “이 땅의 시한부 삶”을 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관점”을 품고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공동체로서 이 같은 진리를 실천하려면, 갈라디아서 6장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는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가르친다. 믿음 안에서 함께 짐을 지는 태도가 바로 ‘그리스도의 법’이며, 이 법이 지켜질 때 교회는 세상과 다른 사랑과 섬김의 문화를 이뤄갈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착각은, ‘힘든 짐을 남에게 지우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오히려 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희생적 사랑”이었음을 상기시키며, 우리가 서로에게 그렇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태도를 보일 때 교회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의 선교와 전도를 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때 장재형목사는 역사적 맥락에서도 시선을 확장한다. 교회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조직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님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셨고, 또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마28:19~20)고 하셨기에, 실제로 선교와 전도의 기초를 다질 만한 본부(센터)나 시설, 문화적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재정적, 조직적 기반이 갖춰지는 것을 ‘소유의 축적’이라 비판할 수도 있으나, 장재형목사는 주어진 목적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 모든 것을 적절히 활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그 소유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느냐, 아니면 개인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붙들고 있느냐 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장재형목사는 자신이 속하거나 혹은 이끌어온 공동체 역사에서, 아무것도 없던 시절부터 달려온 28년의 과정(혹은 그 이상의 세월)을 종종 언급한다. 그는 “처음에는 가진 것이 없었을 때, 하박국 3장 17절~18절 말씀을 붙들고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라는 찬양을 불렀다”고 간증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다양한 터전이 마련되었을 때, 그 모든 것이 단순한 부가 아니라 ‘사람들을 케어하고, 문화권별로 복음을 나누며, 전 세계를 향해 선교하기 위한 도구’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도서를 통해 배우는 인간 삶의 허무, 그 허무 앞에서 우리가 필사적으로 의지해야 할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잃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소유했을 때도 겸손히 그 소유를 하나님의 목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직시하면, 인생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올바로 구분할 수 있게 된다고 강조한다. 전도서 12장에서 말하는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는” 장면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 돌아간다”(전12:7)는 말씀은, 사람에게 ‘언젠가 닥칠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종말 인식이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교만과 욕심을 내려놓고, 참된 가치인 ‘영적인 것’을 붙잡게 만드는 동인이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 12장 전체가 보여주는 노화 과정의 묘사(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지며, 이가 빠지고, 살구나무 꽃이 필 정도로 백발이 된다는 상징) 속에서 우리 각자가 결국 늙고 쇠퇴해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주변 사람들을 살리고 사랑하는 쪽으로 향해야 함을 깊이 깨닫게 된다고 해설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역설하는 핵심은, 전도서가 말하는 ‘허무’가 결코 허무주의의 교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통찰의 매개체다. 죽음을 아는 사람은 삶의 가치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소유나 권력에 매달리는 우매함을 피할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영적 필요를 보면서, 갈라디아서 6장 2절의 말씀처럼 서로 짐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려는 동기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주님 오심을 예비하는 강림절(성탄절) 같은 절기를 맞을 때마다, 이 메시지를 더욱 강하게 선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영원으로 초대하셨다”라는 사실을 되짚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함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세계, 즉 천국의 시민권을 얻게 되었다는 소식이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이니,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축하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인생이 화살같이 지나간다”라는 인식을 가질 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게 된다고 강조한다. 전도서 3장이 말하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다’는 원리는, 신앙인이라면 더욱 엄중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위 말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오늘 하라. 오늘 할 수 있는데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경구가, 영적 차원에서 비롯된 진리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교회 사역과 선교 전략에도 적용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는, 주어진 때와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청년 전도를 먼저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 인생의 결정을 하기 전에, 비교적 마음이 열려 있고, 세상의 경험에 깊이 물들지 않은 청년들이 복음을 영접했을 때 그 열매가 크다고 본다. 물론 모든 연령대가 필요하지만, 전도서 12장 1절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는 말씀처럼,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지녔고, 그 영원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핵심 요약에 맞닿아 있다. 인간의 유한성을 모른 척하거나 애써 부인하는 삶은 결국 헛된 욕망과 맹목적 활동으로 가득 차게 되고, 마지막에는 허무로 끝난다. 반면 자신의 유한함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거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영생을 붙드는 자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하게 되며, 이웃을 살리고 복음을 전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진정한 지혜의 길이며, 전도자가 본래 강조했던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선언이 우리에게 던지는 역설적 선물이다.

장재형목사는 전도서와 잠언서가 함께 이루는 지혜서적 통찰을 통해 교회와 성도들에게 ‘헛됨’을 두려워하거나 외면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바로 그 ‘헛됨’을 마주하는 순간, 하나님의 존재, 천국, 그리고 영생이라는 소망이 얼마나 소중한지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자각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라’는 대사명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게 하는 가장 큰 동기이다. 죽음 앞에서 허무할 수밖에 없는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영원으로 연결되어 궁극적 승리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삶을 진정 의미 있게 사는 길은, 바로 이 영원에 대한 갈망과 신앙적 확신을 붙드는 데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 메시지를 날마다 전하며, 믿지 않는 이들까지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일깨우도록 부름받은 존재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비로소 청년들도, 중장년과 노인들도, 자신의 생애가 결코 우연한 여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안에 있는 섭리의 일부임을 깨닫게 되고, 전도서가 말하는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쌓아도, 자신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거듭 일깨운다. 성경 전체가 증언하듯이,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른다. 그렇기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이고 부패하는 가치를 초월해, 영적 진리에 접근하도록 안내한다. 이 마음이 없다면, 사람은 금세 자기만의 기준(norm)을 만들고, 타인의 기준과 충돌하며, 인생을 공허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의 질서를 인정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붙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절망 대신 소망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전도서가 말하는 헛됨은 결국 우리를 진리이신 하나님께로 이끄는 통로이며, 이 통찰을 주는 지혜서의 가르침은 모든 세대를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말씀임을 장재형목사는 끝까지 강조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도서가 전하는 영원에 대한 갈망, 그리고 잠언서가 제시하는 여호와 경외의 원리를 항상 함께 가르쳐야 하며, 양 떼가 이 진리를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전도서를 풀어내는 방식은 인생의 유한성과 영원 사이에 가로놓인 간극을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전도서가 선언하는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반복된 고백은, 우리로 하여금 삶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 때에만 참된 의미를 얻을 수 있음을 환기시킨다. 그 은혜는 구약 시대 전도자의 탄식에 멈추지 않고, 신약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완성된다. 이는 신앙에 있어 결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라는 점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주장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 12:1)는 권고에 담긴 시급함과 소중함, 그리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는 시간적 유한성의 경고 속에서, 우리는 지금 숨 쉬는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 영적 기회인지 재인식하게 된다. 그 기회를 붙들어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 성탄절의 의미, 신앙인의 삶, 교회의 공동체성을 더욱 빛나게 한다고 장재형목사는 가르친다. 무엇이 참으로 중요한지 분별하고, 한계 속에서도 영원을 바라보며, 복음 전파와 섬김을 위해 ‘서로 짐을 지는’ 교회가 될 때, 전도서가 말하는 지혜가 실제로 구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결국 모든 헛됨을 넘어 궁극적 생명의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