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신학적 성찰: 낮고 곤고한 자리를 비추는 은총과 유기적 지체론

로마서 12장 4~8절: 각자 받은 선물로 서로의 침묵을 채우는 신령한 성전

프랑스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의 명작 「이삭 줍는 여인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화면을 관통하는 거룩한 빛은 화려한 왕관을 쓴 권력자의 정수리가 아니라, 대지의 거친 숨결을 마시며 허리를 낮게 굽힌 여인들의 손끝에 가장 오랫동안 머뭅니다. 추수가 끝난 거친 들판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누군가 흘리고 간 낱알과 흩어진 이삭을 묵묵히 줍는 그 숭고한 노동의 몸짓은, 하나의 공동체가 어떻게 이름 없는 이들의 조용한 수고와 헌신 위에서만 비로소 온전해질 수 있는지를 말없이 증언합니다.

올리벳대학교(Olivet University)의 설립자인 장재형 목사의 강해 설교가 깊이 파고드는 로마서 12장 4-8절의 말씀 역시, 우리를 저 화려한 지상의 높은 보좌가 아니라 가장 낮고 겸비한 자리로 이끌어 교회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이 말씀의 거울 앞에서 교회는 결코 파편화된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느슨하게 모여 있는 사교적 집합체가 아닙니다.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안에서 신비롭고 유기적인 ‘한 몸’을 이루며, 성령께서 각자에게 나누어 주신 고유한 은사(Charisma)를 통해 서로의 연약함을 살려내고 붙들어주는 신령한 운명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이 묵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이성적인 개념이나 추상적인 감동의 유희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늘 내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무거운 삶의 짐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려는 구체적인 행함이자,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믿음의 실체적 형체가 됩니다.

1. 은혜는 한 몸 안에서 서로의 낮은 자리로 흐른다 (로마서 12:4~5)

로마서 12장이 선포하는 참된 교회의 양식은 차갑고 경직된 관僚주의적 제도가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적인 정과 취미를 공유하는 느슨한 친목 단체도 아닙니다. 인간의 몸에 수많은 지체가 존재하고 그 지체들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생명을 유지하듯, 교회 안에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과 다채로운 기능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신비 안에서 이러한 ‘다름’과 ‘다양성’은 분열과 갈등의 빌미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생명력과 풍성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흘러 들어가는 가장 아름다운 은총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저울로는 눈에 띄는 화려한 은사도 있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깊은 음지에서 조용히 감춰진 섬김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오직 한 분이신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 전체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 주권적으로 배치하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우리로 하여금 ‘지체(肢體)’라는 단어가 품고 있는 영적인 심연과 그 무게를 오랫동안 묵상하게 만듭니다. 몸의 지체는 필요할 때 잠시 붙였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떼어내 버리는 기계의 부품이나 소모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나의 피와 생명을 실시간으로 함께 나누어 공급받는 신비로운 유기체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단단히 접붙여져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옆에 있는 지체들과도 힘써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지가 포도나무를 떠나서는 스스로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듯이, 기독교의 참된 믿음은 타인과 절絶된 채 홀로 상아탑 속에 갇혀 도달하는 고립된 자기 완성으로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의 은사는 결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은사는 그것을 받은 사람의 이름을 높이거나 그의 영적 우월감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오직 공동체 전체를 온전케 하고 약한 자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아래로 흘려보내야 하는 하늘의 위탁물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 섬김, 가르침, 권면, 구제, 다스림, 긍휼은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빛깔과 모양은 저마다 다를지라도, 언제나 단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정렬해 있습니다。그 방향은 오직 십자가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몸을 건강하게 세우고, 그 연대의 과정 속에서 천국의 생명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러한 복음적 이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작고 사소해 보이는 역할들을 완전히 새로운 신령한 눈으로 재발견하게 만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의 눈물의 기도, 거친 서류를 정리하는 묵묵한 행정, 공동체의 식탁을 위해 부엌에서 땀 흘리는 손길, 그리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차가운 손を 잡기 위해 달려가는 발걸음은, 그리스도의 몸의 움직임 안에서 결코 변두리나 주변부로 취급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화려한 무대 중심에 선 소수의 영웅뿐만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온 몸을 지탱하기 위해 허리를 굽힌 이름 없는 성도들의 신실한 수고를 통해서 가장 따뜻하고 선명하게 세상에 증언되기 때문입니다.

2. 비교의 소음が 멎을 때 믿음은 은사를 바르게 쓴다 (로마서 12:3, 6)

하나님의 거룩한 은사가 공동체와 개인에게 임할 때,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필연적으로 두 가지 치명적인 영적 유혹이 고개를 듭니다。하나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은근히 과시하며 타인 위에 군림하려는 교만이고, 다른 하나는 내게 주어진 은사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하하며 냉소와 절망에 빠지는 열등감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이 두 가지 인간적인 소음을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엄히 꾸짖으며 영적인 질서를 다시 정돈합니다。은사는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스펙이 아니며, 누군가에 대해 주눅 들어야 할 열등감의 근거도 아닙니다。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주권과 은혜의 분량을 따라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게 나누어 주신 거룩한 선물일 뿐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강해는 특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사도의 권勉을 통해 은사의 영적 질서와 겸손을 강력히 촉구합니다。예언이나 가르침처럼 대중 앞에서 돋보이고 두드러져 보이는 은사일수록, 자기 확신이나 혈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한계와 교회의 덕을 세우는 질서 안에서 철저히 통제되어야 합니다。아무리 탁월한 하늘の 능력이라 할지らい, 그것이 공동체를 유기적으로 세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통ロ로 전락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영혼을 살리는 사랑の 언어가 아니라 공동체를 찢는 날카로운 흉기가 됩니다. 은사의 외적인 크기나 화려함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사용하는 내 내면の 자아가 지금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권위 앞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는가 하는 영적 실제의 문제입니다.

이 엄숙한 지점에서 성도가 마주하는 회개는 단순히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감정의 정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게 일시적으로 맡겨진 주님의 선물을 내 이름의 사유재산으로 꽉 붙잡았던 탐욕의 손を 펴고, 다시 온 몸의 유익과 형제의 살아남을 향해 전 존재의 스탠스를 바꾸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Metanoia)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과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기의 분량과 한계를 정확히 아는 겸손의 토양 위에서 가장 정결하고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경 묵상은 매일 아침 우리의 양심을 향해 날카롭고도 고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은사와 직분을 통해 필사적으로 나를 증명하고 내 성을 쌓으려 하는가, 아니면 상처 입은 누군가를 살려내기 위해 조용히 수건을 두르고 낮은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의 은사가 인간의 가공되지 않은 고집이나 정제되지 않은 명誉욕과 결합하게 되면, 그 공동체는 아무리 은사가 많아도 쉽게 영적 무질서와 혼란의 아수라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가르치는 은사가 사사로운 지식의 자랑이나 타인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고, 다스리는 은사가 부지런한 책임과 헌신을 잃어버린 채 권력의 행사가 되며, 예언의 은사가 교회의 공동체적인 덕보다 자기의 영적 영리함을 앞세울 때, 그 은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성도들에게 깊은 상처와 실족을 안기는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거룩한 흐름은 우리의 능력이나 사역의 규모 자체를 묻기 전에, 우리의 내면적 태도와 영혼의 중심을 더 깊이 심문합니다。철저한 자기 부인의 순종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허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에만 은사는 비로소 교회를 진정으로 살려내는 생명의 통로가 됩니다。

타인과의 비교는 내 입술의 감사를 메마르게 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지만, 조건 없는 은혜에 대한 자각은 내게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탐내지 않게 만듭니다。내가 갖지 못한 타인의 화려한 달란트만을 바라보며 마음이 시기와 질투로 굳어질 때, 공동체는 서서히 천국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은 치열한 경쟁과 서열의 언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러나 나 같은 죄인에게 이 과분한 자리를 맡겨주신 것을 온전한 은혜로 인정하고, 나보다 더 탁월하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다른 지체의 은사를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할 때, 교회는 비로소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는 냉혹한 법정이 아니라, 서로의 허물을 덮고 함께 세워져 가는 거룩한 집, 즉 교회의 소망이 됩니다. 회개의 진정한 열매는 결국 내 자리를 정확히 아는 겸손과, 다른 지체의 존재를 존귀히 여기는 사랑의 실천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3. 섬김과 권면과 긍휼이 복음의 살결이 되다 (로마서 12:7~8)

로마서 12장 6절에서 8절에 나열된 수많은 은사들은 결코 구름 위에 떠 있는 추상적인 신학 사조나 관념의 목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죄로 가득한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구체적인 살결을 입고 성육신(Incarnation)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천적 지침입니다。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관념적인 구호가 아니라 교회와 이웃의 실제적인 결핍과 아픔을 예민하게 살피고 구체적으로 움직이는 부지런한 손과 발이 되는 것이며, 가르침은 인간의 현학적인 철학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사도적 진리를 왜곡 없이 바르게 전수하는 생명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또한 권면은 율법적인 정죄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무게에 짓눌려 낙심하고 절망한 영혼의 곁에 묵묵히 찾아가 함께 앉아, 그가 다시 삶을 시작할 수 있도록 따뜻한 위로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는 거룩한 동행입니다.

구제와 다스림과 긍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이것들은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단지 구변이나 말이 아니라,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삶의 실제적 현실로 시각화하는 강력한 통로들입니다。구제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거나 상대방에게 모욕감을 주는 생색내기가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성실함과 순전함이어야 합니다. 다스림은 자기가 가진 영적·행정적 권위를 과시하며 사람들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가장 어두운 곳을 먼저 살피고 책임을 지는 부지런한 헌신이어야 합니다。그리고 긍휼은 병든 자, 외로운 자, 그리고 인생의 모진 풍파에 치여 신음하는 자들을 향해 마지못해 의무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신 아버지의 자비로운 마음을 품고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자비의 손길입니다。

이 모든 천국의 은사들은 결코 서로 더 높아지기 위해 시기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마치 정교하게 조율된 오케스트ラの 악기들처럼, 가르침이 진리의 빛으로 갈 바를 밝히면 섬김은 그 빛이 비추는 길 위를 묵묵히 걸으며 현장을 지탱하고, 권면이 지쳐 쓰러진 영혼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면 구제는 그 영혼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삶의 구체적인 필요를 채워주며 복음의 실제를 손에 쥐여줍니다。이처럼 은사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메우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룰 때, 교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가장 깊고 넓은 복음의 표정을 짓게 됩니다。

만약 공동체 안에 구체적인 섬김의 손길이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매하고 뛰어난 진리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성도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구체적인 발을 얻지 못하고 공허한 지식으로 굳어질 것입니다。또한 지친 영혼을 향한 따뜻한 권면과 위로가 사라진다면, 아무리 조직이 체계적이고 건물이 거대할지라도 낙심한 사람은 공동체라는 거대한 인파 속에서 철저한 고독과 소외감을 느끼며 홀로 죽어갈 것입니다。더 나아가 아픔을 내 아픔으로 여기는 애끓는 긍휼의 마음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입술로 외치는 ‘은혜’라는 거룩한 단어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찢어진 심장 곁에 단 한 걸음도 가까이 다가지 못하는 차가운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할 것입니다。그러므로 은사는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빛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철저히 서로의 연약함을 보완하고 연대할 때 비로소 세상의 거친 풍파を 막아내는 복음의 튼튼한 성벽이 됩니다。

이 설교가 정직하게 비추는 교회 공동체의 참모습은 세상의 잘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캐리어를 자랑하고 능력을 과시하는 화려한 전시장이 결코 아닙니다。오직 스스로의 힘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본질적 죄인들이 예수의 공로를 의지하여 모여, 서로의 연약함과 허물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따뜻한 이불로 덮어주고 살려내는 자비의 집(Bethesda)입니다。공동체 안에서 어떤 은사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음지의 영역에 있다고 해서 그 가치가 하찮거나 낮아지는 것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어떤 은사가 대중 앞에 중요하고 거대해 보인다고 해서 그 은사를 가진 개인이 홀로 교회를 독점하거나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교회는 완벽하고 강한 자들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깨어짐과 부족함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촘촘히 잇고 기워가는 신비로운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4. 산 제사의 자리에서 소망은 일상의 예배가 된다 (로마서 12:1)

로마서 12장에서 사도가 쏟아내는 은사 공동체의 유기적 원리는, 더 거대하고 본질적인 신학적 틀 안에서 해석되어야만 그 참뜻이 살아납니다。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는 거룩한 소명(Vocation)입니다。기독교의 참된 예배는 일주일 중 특정한 한 시간, 구별된 종교적 공간의 장막 안에만 갇혀 있는 박제된 의식이 결코 아닙니다。그것은 주일 예배의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육체와 삶의 전 영역, 즉 우리의 매일의 일상과 선택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드려지는 거룩한 방향성이자 존재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께 받은 은사는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잠시 경건한 모양으로 빛나다가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지는 일시적인 종교적 역할극이 아닙니다。그것은 내가 발を 딛고 살아가는 가장 세속적인 공간인 가정과, 치열한 생존의 경쟁이 벌어지는 일터와,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사회의 한복판에서도 그리스도의 향기와 복음의 생명력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는 성도의 삶 전체에 대한 거룩한 책임이자 사명입니다。

장재형 목사의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낙심하고 주저앉은 이 시대 공동체의 소망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일으켜 세웁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문법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외적인 스펙과 성과로 등급을 매겨 평가하고, 끝없는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어 소외를 조장하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위로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을 따라 서로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세워주는 전혀 다른 천국의 대안적 질서를 이 땅 위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맡겨진 말씀의 은사로 공동체가 걸어가야 할 진리의 방향을 새벽녘 등대처럼 밝히고, 또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이름 없는 섬김으로 사역의 거친 현장을 묵묵히 온몸으로 지탱하며, 또 누군가는 뜨거운 권면과 애끓는 긍휼의 손길로 세상에서 상처받아 무너진 지체의 마음을 붙들어줍니다。그렇게 서로의 다른 은사들이 인간의 계산을 지우고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촘촘히 이어질 때, 교회는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단 한 사람의 소외된 영혼도 외롭게 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책임지고 품어주는 하늘의 진짜 가족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 공동체는 세상이 사용하는 권력과 마케팅의 방식이 아닌,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상의 심장에 복음의 충격을 던집니다。상대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정죄보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한 회복을 먼저 가슴에 품고, 자기 자신의 영적 의를 세우기보다 연약한 다른 이의 삶의 무게와 눈물을 함께 짊어지며, 하나님의 조건 없는 은혜가 실제로 우리의 깨어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매일의 삶으로 증명해 보입니다。로마서의 위대한 서사가 그토록 강조하는 은사 공동체의 핵심 본질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은사는 나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목에 거는 화려한 보석 장식품이 아니라, 죽어가는 교회와 이 어두운 세상을 살려내기 위해 왕이신 주님께서 내게 잠시 맡겨주신 거룩한 선물입니다。

설교가 가리키는 참된 교회의 종착지는 그래서 마침내 ‘이 땅 위에 도래한 천국의 모형’이라는 장엄한 표현에까지 다다릅니다。이 선언은 교회가 아무런 흠도 죄도 없는 완전한 의인들만 모여 있는 도피성이나 비현실적인 이상향(Utopia)이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로, 여전히 허물 많고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사람들이 오직 예수의 무조건적인 은혜의 통치 안에서 서로의 부끄러움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장차 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하늘 질서를 오늘이라는 현실 속에서 미리 배우고 연습하는 은총의 훈련소라는 뜻입니다。

비교와 시기 대신 존중과 축복이, 율법적인 정죄와 배격 대신 보혈을 통한 용서와 회복が, 고립된 이기주의 대신 끈끈한 상호 의존의 연대가 지체의 삶 속에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 천국으로 가는 복음의 길을 더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한 연대의 자리에서 우리의 소망은 저 먼 미래의 구름 위에 떠 있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오늘 내 곁에서 숨 쉬는 형제를 살려내는 구체적인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는 은사의 종국적인 방향성이 개인의 영적 성취나 명예가 아니라, 오직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살아나는 십자가의 사랑에 있음을 다시 한번 엄숙하게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거룩한 영적 예배가 된다는 주님의 요청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단지 주일 오전의 거룩한 종교적 언어와 예배당의 의자 위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성가신 가사 노동과 갈등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내, 거짓과 타협이 판치는 일터에서 손해を 감수하더라도 끝까지 지켜내는 정직, 공동체 안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무언의 섬김, 그리고 행색이 초라하고 약한 이를 향해 내 주머니를 열어 다가가는 애틋한 긍휼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우리의 은사가 사사로운 소유를 떠나 하나님께 온전히 연락되는 거룩한 산 제사의 제단입니다。 이러한 작은 순종들이 매일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리 없이 반복될 때, 교회는 세상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부터 거대하게 자라나고, 세상은 그 조용한 영적 지각변동 속에서 마침내 썩어지지 아니할 복음의 진정한 향기를 맡게 될 것입니다。

결어: 새 아침을 깨우는 영적 예배의 질문 (로마서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로마서 12장 1절)

마지막으로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질문은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밤잠을 설치게 할 만큼 조용하고 강력합니다。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건강과, 시간과, 재능과, 은사를 과연 어느 방향을 향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여전히 타인보다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내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자아의 바벨탑입니까, 아니면 머리 되신 주님의 주권 앞에 무릎을 꿇고 상처 입은 지체의 발을 씻기며 한 몸을 살려내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십자가의 자리입니까? 복음은 우리를 거친 광야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나는 고립된 영웅으로 부르지 않으셨고, 오직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소중하고 필연적인 지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나의 보이지 않는 작은 양보와, 따뜻한 말 한마디와, 손길과, 이름 없는 순종이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있다면, 우리는 거창한 사역의 성공을 외치기 전에, 이미 내가 서 있는 그 평범한 일상의 척박한 자리에서 천국을 향한 영적 예배의 장엄한 첫걸음을 시작한 것입니다。

davidja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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