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 -장재형목사

1.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 배경

요한복음 18장 12-22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간”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유대 종교 권력의 속성,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 예수님께서 겪으신 불법적이고 부당한 심문, 제자들의 두려움과 실패,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명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 강조해 온 ‘종교 권력의 부패와 그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은, 이 사건이 단순히 2,000년 전 일어난 종교재판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상당히 깊은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군대와 천부장,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곧바로 안나스에게 데려간 것은 그 자체로 여러 의미심장한 문제점을 노출한다. 당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를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장면이 주로 강조된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먼저 안나스에게로 연행되었다는 점을 추가로 언급함으로써, 그 재판 과정이 매우 불법적이며 배후에 거대한 종교권력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대제사장은 본래 종신직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로마 제국이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었고, 돈과 정치적 결탁을 통해 대제사장직이 자주 교체되는 부패가 일어났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안나스였다. 안나스는 A.D. 6년부터 15년까지 9년간 대제사장을 지냈고, 이후 자신의 다섯 아들에게도 연이어 대제사장직을 세습시키며 그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나스는 사위인 가야바가 공식적인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도 여전히 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는데, 요한복음 18장 13절이 바로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이 이에 부합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대목에 주목하며, 겉으로 드러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예수님을 잡고 심문한 실제 배후에는 안나스라는 거대한 종교적 카르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먼저 자기 집으로 데려오도록 함으로써, 합당한 절차나 공식적 자리(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적 재판) 대신 사적이고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심문하려 했다. 이는 율법에 충실해야 할 대제사장 가문이 스스로 율법을 파괴하며, 야음(夜陰)에 음모를 꾸민 부패상을 보여준다. 유대율법에 따르면 산헤드린 재판은 야간에 열 수 없었으며, 반드시 성전 뜰에서 하도록 규정되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아주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이 체포된 밤에 곧바로 심문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율법을 공공연히 깨뜨린 사건이었다.

문제는 이 재판이 단순히 밤에 열렸다는 절차적 하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하려던 죄목이 애초부터 억지였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여러 번 함정에 빠뜨리려 하거나 신성모독죄로 몰고 가려 했다.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부른 것(요 2:16),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요 2:19),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 등은 그들에게는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야 할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고, 은밀한 조직이나 거짓 교리를 전파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런 점을 요한복음 18장 20절에서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이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안나스는 예수님을 은밀히 불러내어 “네 제자들과 네가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이냐?”(요 18:19)라고 묻는다. 이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성모독의 증거’를 끄집어내려는 질문이었다. 복음서에 따르면, 유대의 공적 재판에서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일치하는 증인이 필요했고, 거짓 증언이나 강압적 증언은 무효였다. 게다가 현직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가 예수님을 신문할 권한 자체가 없었으며, 또 재판 장소가 성전 뜰도 아니었다. 정식 산헤드린 회의도 열리지 않은 시점에서 예수님이 결박된 채 밤에 안나스 앞으로 끌려간 것은, 명백히 법과 율법을 무시한 사건이었다.

이 지점에서장재형목사는 “안나스가 곧 부패한 종교 권력의 실체이며, 그의 내부에 자리한 죄성은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던 근본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안나스 가문이 장악했던 성전은 ‘제물을 팔아 이윤을 취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 성전 밖에서 흠 없는 제물을 사왔음에도 불합격 판정을 주고, 성전 안에서 비싸게 파는 제물만 구입하도록 유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당한 부담을 지우고, 대제사장 일족이 거대한 이익을 챙기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런 부패를 뒤엎기 위해 성전을 정화하셨고, 결국 그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애려는 음모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그 절정이 바로 이 밤의 체포와 신문이었다.

또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1:50)는 가야바의 말은, 정치적·종교적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공동 음모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음모의 배후에서 모든 실질적 권력을 쥐고 흔든 이가 안나스였다는 것이다. 결국 안나스에게 먼저 예수님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비극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종교권력의 은밀한 부패가 뿌리 깊었음을 드러내고, 예수님이 가시밭길을 홀로 걸으실 때 어떤 악의 연대가 작동했는지를 고발하는 장면이 된다.

이어서 본문은 시몬 베드로와 대제사장과 아는 다른 제자가 예수를 따르다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이끌어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가게 해 준 상황을 설명한다(요 18:15-16). 여기서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이 제자가 누구인지는 본문에서 명시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요한 자신일 가능성, 혹은 다른 친분이 있는 제자라는 견해가 있지만, 일각에서는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의 개연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하는 재판 절차’에서, 예수님 편에서 증언해 줄 수 있는 제자가 필요한 순간이었음에도,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18:17)고 부인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분 곁을 지키고자 했던 ‘용기’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증인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미 가야바 혹은 안나스 측은 ‘유다’라는 내부자를 통해 예수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었다. 공정한 재판이라면 유다의 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예수님을 변호할 증인이 필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진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이어 세 번 부인하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님께 불리한 증언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주님의 가르침의 진정성이 제대로 드러날 길이 막혀 버렸던 셈이다.

요한복음 18장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라는 폭력적 장면이 연출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불법적인 심문에 합법적 절차를 환기시키자, 그 자리에 있던 하속이 예수님을 때리며 모독하는 모습이다. 율법과 진리를 지켜야 할 자리에서, 종교지도자와 그의 하수인은 오히려 폭력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장재형목사는 “진리가 부재한 자리에 폭력이 난무한다”고 분석한다. 오직 거짓과 음모, 부패로 얼룩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묵묵히 그 ‘불법 재판’의 수모를 감당하셨고, 곧 이어 가야바,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십자가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는 여정이었다는 사실이 복음서 전체에서 드러난다.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간 사건이 담고 있는 교훈은, 한편으로는 성전을 ‘하나님의 전’이 아닌 ‘돈과 권력의 장’으로 만든 종교적 타락의 무서움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극심한 부패 구조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종국에는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셨다는 진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개인의 구원 이야기를 넘어 공동체의 갱신과 회복, 나아가 참된 성전(주님의 몸)으로서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정이었다는 점은 이후 초대 교회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의 해설에서 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님을 본받아 “어떠한 구조적 불의와 타락 앞에서도 진리를 선포하고자 하는 담대함이 필요함”을 역설해 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자칫 ‘안나스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고 권력과 탐욕에 물들 위험성도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모든 맥락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예수님을 통해 ‘헌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이 세워지는 구도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신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도전이 아니었다. 본래의 성전 제도가 죄악과 탐욕으로 오염되었기에, 예수님이 친히 ‘새로운 성전’으로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를 속량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참된 예배와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이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부딪친 근본 원인이다. 안나스는 자신과 일족(一族)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해 성전을 유지하려 했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새 성전의 비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그 어그러진 대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되, 그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계획임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처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간” 본문은 한없이 부패한 종교 권력의 민낯, 진리이신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태도, 두려움 속에서 무너지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모두를 초월하여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교차하며 드러나는 장면이다.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의 영적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짚으며,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겪는 내부적 부패와 권력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함을 권면한다. 특히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참혹한 고통과 모욕을 묵묵히 견디시면서도, 한마디 한마디로 율법의 정당성을 되짚고, 종교지도자들의 불법을 정확히 드러내신 장면은, 세상 권력 앞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는 길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초대한다. 나아가 성도들은 베드로처럼 실패와 부인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지만, 결국 주님의 사랑과 회복의 손길을 통해 다시금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묵상하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로 이어지는 불법 재판의 굴레를 통과하심으로써, 십자가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는 길의 시작점이 된다. 안나스에게 먼저 잡혀가심으로써, 예수님은 거짓 종교 권력의 본질을 조목조목 폭로하셨고, 동시에 성전과 예배의 참 의미를 다시 일깨우셨다.장재형목사는 “이 땅에 속한 어떤 권력도 진리를 막을 수 없으며, 진리는 그 어떤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끝내 빛을 발한다”는 점을 이 본문을 통해 설파한다. 안나스가 막후에서 획책한 불법 심문과 거짓 음모는 오히려 주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극명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고, 예수님은 승리자이시다”라는 복음의 선포다.

따라서 첫 번째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 종교·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심층적 의미”는, 단순히 배경사를 나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하는 악한 권력과 부패를 직시하며, 주님이 이를 어떻게 상대하셨는지를 주목함으로써 오늘의 교회와 성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장재형목사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예수께서 철저히 당하신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타락한 성전을 허무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한 구원을 이룩하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구원은 2,000년 전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다시금 새롭게 체현되어야 한다. 곧, 우리 자신과 교회가 ‘안나스와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예수님의 길’을 좇아 부패와 거짓을 버리고 진리와 공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안나스 앞에서 시작된 불법적 심문은 결국 가야바를 거쳐 빌라도 법정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국면에까지 치닫는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 고난이 단순히 종교적·정치적 음모의 희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는 결정적 통로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고난의 이야기는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금 예배와 성전의 의미, 권위와 진리에 대한 태도,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묻는 준엄한 목소리가 된다.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러한 교훈이 요한복음 18장 12-22절 이후로 이어지는 “십자가 길”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안나스의 뜰에서부터 이미 예수님은 고난받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셨고, 그 고난이 곧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복음서 전체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이자, 동시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안나스가 취한 불법 재판, 가야바의 음모, 빌라도의 우유부단 등, 인간의 악과 어리석음이 극단으로 치닫는 국면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내가 말하였노라.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며 담대하게 대응하셨지만, 곧이어 주님께 가해진 것은 모욕과 폭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메시아가 왕이시면서도 고난의 종으로 오실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53장 등)을 상기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힘으로 이 악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스스로 종의 모습이 되셔서,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침묵 가운데 고난을 받으셨고, 그 길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이 고난은 성전 제도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 그분이 “참된 성전”임을 드러낸다는 점이 요한복음에서 매우 강조된다.장재형목사는 “안나스가 장악하고 있던 그 낡은 성전 체제, 즉 동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약적 제사 시스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롭게 갱신되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 직후,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마태복음의 기록(마 27:51)은 구약적 희생 제도의 종결과 예수님을 통한 직접적이고 참된 예배의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안나스의 성전”은 결국 무너지고, “예수님이 친히 성전 되시는” 은혜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지도자들처럼, 지금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보다도 자신들의 전통이나 권위를 더 우선시한다면, 안나스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셋째로,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드러나는 제자들의 연약함은 오늘 우리에게도 거울이 된다. 인간은 아무리 충성을 다짐해도, 혼자 힘으로는 극한의 두려움과 위험 속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가 쉽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수제자라는 명예를 누렸으며,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자를 만큼 과감했다. 그러나 막상 안나스의 뜰에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는 질문 한 마디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요 18:17).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내면을 헤아려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알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베드로가 이 부인의 죄를 끌어안고 통곡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그를 회복시키셨다(요 21장). 이는 제자가 비록 깊이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다시금 제자로 세우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 생활 속에서 “때로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태도나 말로 부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를 주님은 한없이 받아주시고, 다시금 큰 일을 맡기신다.

넷째로,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 권력과 맺는 관계, 그리고 내부적 권위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부패하고 타락한 안나스와 그 일족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욕심의 방편으로 삼은 자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거짓 종교심과 막대한 부로 성전을 오염시켰다. 예수님은 이들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전을 정화하시며 진리로 그들의 죄를 고발하셨다(요 2장).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세상의 권위(정치, 경제, 문화 등)와 부딪히거나 협력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 교회가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안나스 일가처럼 “거룩한 외양”만 취한 채 실상은 이익과 권력에 영합한다면, 오늘날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교회의 순수함과 투명성,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며, 성도 각자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하여, 결코 교권주의나 세속적 욕망으로 복음을 가리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결국 ‘승리의 관문’이 된다. 안나스의 음모, 가야바의 재판, 빌라도의 심문을 거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 이미 사단과 죄의 세력이 패배하였음을 의미한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교회 시대를 여셨다(요 20장). 이는 종교적·정치적 권력이 협잡하여 예수님을 죽였지만, 참된 진리는 결코 꺾이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수난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이며, 결과적으로는 보화(寶貨) 같은 부활의 소식을 안긴다는 점에까지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

결국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부패한 종교 권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진정한 예배와 신앙이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든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고 용납하셨듯이, 실패한 자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새롭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철저히 주님의 은혜로만 회복되고 재무장될 수 있으며,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역설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기틀이자 반석이 되시므로, 어떤 인간적 실수나 부패, 악행이 일시적으로 발호할지라도, 결국 진리의 길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종교적 시스템과 충돌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성전을 뒤엎으신 사건(요 2:13-22)을 통해, 성전이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다면 단호하게 바꿔야 함을 보이셨다. 그 결과 종교 권력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으나, 결코 주저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개혁’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결기를 떠올려야 한다. 안나스 같은 부패 지도자가 자리하고, 그 주변에 간신배와 부당한 하수인이 가득하다면, 교회는 스스로를 갱신하고 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철저히 복음과 진리의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적인 수단만으로는 교회의 타락을 막기 어렵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개혁이 추진될 때, 그 길은 힘들고 외로워 보여도 궁극적으로 승리로 귀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빛을 비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에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만일 교회 내부가 타락하고, 지도자들이 욕심과 권력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복음 전파의 문이 막히게 된다. 안나스에게 붙들린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히 묵상하면, 교회의 부패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깨닫게 된다. 주님이 직접 도마뱀 굴 같은 성전 기득권자들의 손에 넘겨지셨듯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 도사린 욕망은 스스로 교회를 병들게 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가장 우선적인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대제사장이나 권위자에게도 타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집중하셨다(요 4:34). 오늘날 교회가 전통이나 인간 지도자의 지시에 매몰되어, 성경의 본래 정신과 벗어난 길을 걷고 있다면, 과감히 되돌아와야 한다. 

둘째,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공동체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완전히 변했던 모습(행 2장)은 교회가 살아나는 핵심 동력이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교회가 인간적 계획이나 프로그램보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지고, 죄를 회개하며 돌이킬 때,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셋째, 서로를 정죄하거나 상처 주는 일보다, 말씀의 진리에 근거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요 13장)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것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이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행동이다. 안나스 같은 폭정형 리더십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종이 되신 리더십의 본을 보이셨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권력을 쥐고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본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넷째, 교회 재정이나 권한구조 등 제도적 측면에서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고대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악용했던 안나스 일가는, 거짓 관행을 제도적으로 고착화시켜 큰 이득을 취했다. 교회 역시 예산·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으면, 권력과 부를 탐하는 자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고, 결국 내적 부패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적·영적 차원의 개혁을 통해, 교회는 다시금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예수님이 “은밀하게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요 18:20)고 당당히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 역시 공의롭게 행하고 빛 가운데 일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의 비난과 의심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제자들이 결국 두려움을 벗고 오순절 이후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도구로 쓰임받게 된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에 담긴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단지 1세기 유대교의 부패만을 탓하며 끝낼 일이 아니다. 안나스가 보여 준 부패와 왜곡된 종교 권력의 작동 방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되풀이되는 인간 죄성의 대표적 사례다. 교회사의 여러 어두운 국면에서, 그리고 오늘날도 세계 각지의 교회나 종교 조직 안에서 “안나스 유형의 지도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자신 역시 부패한 시스템에 가담하고 있지 않은지, 예수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서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장재형목사는 줄곧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며, 외형적 성공이나 수적 부흥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에 충성함이 최우선 기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동시에 성도 개인의 차원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인간적 연약함을 깊이 실감한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어도, 막상 우리에게 불이익이 닥치거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예수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도사린다. 그렇기에 우리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회복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에서 베드로는 우리의 자화상이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요 21:15-17)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된다. 설령 우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해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은 그 부인을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결론적으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요 18:13)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 고난 서사의 시작이며, 동시에 기득권 종교권력의 사악함과 예수님의 참된 권위가 극명히 대비되는 결정적 장면이다.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찰하며,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의 길을 본받아 구조적 부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진리를 증거해야 하며, 부패한 모습을 발견할 때에는 성전정화의 심정으로 회개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고난의 순종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의 사명 완성의 길이었으며, 이 길이 궁극적으로는 부활과 승리로 이어진다는 복음의 소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당하시는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절대적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인간 권력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해 온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는 완성될 수 없고,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핵심 축을 이루며, 이 사건을 통해 인류가 새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안나스와 같은 부패한 영적 리더십을 경계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 복음을 지키고 전파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부당한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진리를 주장하셨던 장면을 기억하면서, 세상과의 타협과 자기합리화를 부숴 버리고, 성령 안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살아 내야 한다. 그리고 혹여 실패하거나 두려움에 져서 주님을 부인한 자들이 있다 해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섰듯이, 누구든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면 새 출발이 가능하다는 소망을 붙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의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차원의 성찰을 제공한다. 부패한 종교권력의 민낯,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신 예수님의 고난과 담대함, 연약한 제자들의 실패와 회복, 그리고 ‘헌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여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함께 어우러진 텍스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통해, 교회란 오직 예수님을 머리로 삼아야 하며, 어떤 인간 권위도 진리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재차 깨닫게 된다. 또한 믿음생활에서 실패와 부끄러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길,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기에, 성도와 교회도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 모든 세속적·종교적 부패를 뛰어넘는 영적 승리를 누릴 수 있다”고 요약한다. 이것이 곧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본문이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다. 그 길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늘 기억하며, 오늘의 시대 속에서 복음의 빛을 계속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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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와 구원의 필요성 – 장재형목사

Ⅰ.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불경건·불의

로마서 1장 18-19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본론을 시작하며 제시하는, 인간이 처한 죄의 현실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루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해를 통해 이 본문이 로마서 전체의 구조와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반임을 강조해 왔다. 사실 로마서를 읽다 보면, 복음이 선포되는 순서는 ‘죄’가 먼저 등장하고, 그다음에 ‘구원’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이는 단순한 구조적 특징이 아니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실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는데, 이 로마라는 도시는 당대에 문명과 세속적 번영의 상징이자 인간의 죄가 가장 부패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던 대표적 장소이기도 했다. 로마인들 역시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려한 문명과 지혜, 군사력, 부를 자랑삼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찬란한 로마가 무얼 잘못했길래 굳이 구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는 자세로 바울의 메시지를 의아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지를 말하기 위해,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존재인지를 매우 논리적으로 펼쳐 보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8-19절 강해에서, 특히 18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 상태를 보여주는 말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진노”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의 분노나, 인간적 감정의 투영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진노는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니라, 거룩과 의로움에 기초하여 죄를 심판하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하나님 앞에 “불경건과 불의”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고 에베소서 2장 3절도 말한다.

여기서 “불경건”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위배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잊고 살거나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태도를 뜻한다. 반면 “불의”는 인간 관계에서의 수평적 죄의 양상으로, 서로를 해치고 타인을 억압하며, 부정직과 위선, 탐욕 등으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에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이들은 의도적으로 진리를 가로막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억누르려 하거나, 자신들 안에 있는 본능적·양심적 하나님 인식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대부분의 사람은 죄의 문제를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수치를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왜 내가 죄인이냐”며 반발한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할 때 ‘구원’이라는 용어가 주는 깊은 의미와 기쁨을 알려주려 해도, 먼저 “왜 구원이 필요한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 상대는 ‘나는 구원 같은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죄론을 자세히 전개하며, 인간의 실존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차근차근 파헤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는 로마서 1장18절은, 죄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지 그 이유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구절들(1장 19-32절)을 통해 점차 죄의 본질과 결과를 설명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저지르는 불경건과 불의가 결국 자기 파멸로 가는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점을 짚는다. 마치 사람이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때로는 진노하고 책망하여 바로잡으려 하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의 불꽃이요 사랑의 경고이기도 하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인간이 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르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 관계를 파괴하는 죄에 대해서는 응당한 심판과 진노가 뒤따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 점을 자주 인용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며, 단순히 철학적 개념의 ‘무감정적 신’이 아니라고 말이다. 고대 헬라의 철학적 신 개념은 전지전능하고 냉철한 본질로서, 인간적 감정과는 아예 무관한 존재로 그려진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시며,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탄식하시고 격분하시기도 하신다. 예레미야와 호세아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인간을 향한 질투, 슬픔, 분노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는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시기 때문이며, 이 사랑의 관계가 깨질 때 “진노”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사랑의 본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반응이다.

“불경건과 불의”로 묶이는 인간의 죄는, 십계명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죄로 요약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진보하고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선과 의를 실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로마 제국처럼 강력한 법 체계를 지니고, 스토아 철학이나 에픽쿠로스 학파 등 여러 윤리적·철학적 전통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경건과 불의는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타락한 인간은 철학적 지식이나 도덕적 훈련만으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죄가 단지 개인적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데서 비롯된 실존적 타락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어서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표현이 인간의 죄가 누적되어 정점에 이를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임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많은 기회를 주시지만, 결국은 공의롭게 죄를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과 정의를 드러내신다. 구약에서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 등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공허한 경고가 아님을 입증해준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 심판의 경고나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등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진노를 잘 보여준다.

이 “진노”라는 개념을 우리 시대 일부 신앙인들은 불편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다가 왜곡시킬 때가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노가 없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도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고, 죄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죄를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것을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자주 비유한다. 자녀가 위험한 길로 가고 있는데, 부모가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전혀 징계나 책망을 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 아이에게 영원한 해가 닥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역시 죄로 인해 멸망 가운데 떨어진 인간을 향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허락하시며, 결국 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의 죄’는 곧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죄를 총칭하지만, 그중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불경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즉 수직적 관계의 파괴가 곧 수평적 관계의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회적 불의, 전쟁, 폭력, 착취, 성적 타락 등은 궁극적으로 ‘불경건’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삶,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이 모든 악행의 뿌리가 된다. 로마서 1장 후반부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긴커녕 우상에게 절을 하고, 거짓된 이미지와 이념에 헌신하며, 자기 욕망을 우상화한 결과로 온갖 죄악과 부패가 만연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맥락에서, 죄가 드러나는 것을 교회나 성도들이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죄를 직면하고 드러낼 때에만, 비로소 죄에서 돌아설 기회와 구원받을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죄가 숨겨지면, 결국 그것이 곪아서 더 심각한 병으로 발전한다. 한 개인도 그렇고, 한 나라나 사회도 그렇다. 죄를 애매하게 덮는 것은 사랑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죄의 뿌리를 더 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방치하지 않으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진노로 심판하실 것을 성경 전반에서 거듭해서 알려주신다.

이러한 죄론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간략히 구분하면, 바울은 첫째 1장 18-32절에서 이방인의 죄를 말하고, 둘째 2장 1절-3장 8절에서 유대인의 죄를 고발하며, 셋째 3장 9-20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한다. 요약하자면,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다(롬 3:1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 됨을 강조하기 위한 전제 논증으로,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철저히 파헤쳐 놓는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노를 경험하지만, 인간의 분노는 대개 죄된 감정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형태이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로운 정죄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방책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로마서가 시작부터 죄와 진노를 다루는 근본 이유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노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만,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18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본론을 시작하며 제시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이며, 이것이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 곧 죄를 향해 임한다는 것이다. 로마시대에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했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렸다. 현대인 역시 과학과 기술, 경제 발전 등을 자랑하며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의 필요성 역시 절대 절감하지 못한다. 따라서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8절 말씀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선포가 현대에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러한 진노의 배경에는, 사람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구체적인 죄가 놓여 있다. 진리가 선포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환영하기보다 되려 적대시할 때가 많다. 진리가 빛을 비출수록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므로,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진리가 전해지는 입을 틀어막으려 든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탄압하는 세력은 항상 있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막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과 믿음의 증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외치고, 교회는 여러 핍박 속에서도 진리를 지켜내며 확장되어 왔다. 이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한편, 바울이 전했던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는 결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죄책감에만 사로잡히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죄에서 돌아서라’,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초대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인간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바울은 가차 없이 죄를 지적한다. 교회가 죄의 지적을 회피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구원 또한 당연히 개인에게 절실하지 않게 되고, 복음은 ‘좋은 말’ 이상의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과 초대교회는 철저한 죄 인식을 강조했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18절에 명시된 “하나님의 진노”는 그 자체로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처한 죄의 실상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직면해야 한다. 이것을 외면하면, 결국 복음의 능력과 은혜 또한 절실히 깨달을 길이 없다.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고,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불러온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 문제이다. 죄의 문제 앞에, 죄로 인해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인간은 비로소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로마의 화려한 문화와 성공, 번영도 이 문제를 덮을 수 없었고, 오늘날 어떤 세속적 안정과 풍요도 죄와 진노의 문제를 가볍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 실존의 절박함이며, 동시에 복음이 필요한 이유다.

Ⅱ.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과 구원의 필요성

로마서 1장 19절은 이러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용에 이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바울은 불신자, 곧 아직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불경건과 불의 가운데 있으나, 여전히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인식하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 구절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죄로 타락했어도 완전히 망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물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편이라 할 수 있는 이성, 자유의지, 도덕적 감각, 종교적 본성 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탐색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알 만한 것”을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피조세계’를 통한 일반계시 차원이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도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우주, 세상의 질서를 통해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어느 정도는 인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시사철 바뀌는 계절, 질서 정연한 자연의 이치, 태양과 별의 운행, 생명의 경이로움 등은 우연이나 혼돈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섭리와 계획 아래 움직이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조차, 우주가 무질서한 혼돈이 아니라 정교한 질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절대자를 인정하기도 한다.

둘째, ‘인간 내면’의 양심과 이성 차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선과 악을 구분하며,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으려는 움직임 등을 통해 이미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면서 근본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에 부딪힌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영적 공허, 불안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을 알 때만이 해갈될 수 있는 이 목마름이, 바로 인간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 갈망’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처럼, “하나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혼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았다”(롬 1:21)고 이어서 말한다. 즉 하나님을 알 만한 증거와 내면의 소리가 있음에도, 인간은 죄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배척한다. 혹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하고, 진리보다 거짓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불경건과 불의는 더욱 가속화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함으로 생겨나는 결과를 “불안, 고독, 허무, 절망” 등으로 요약한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세속적 욕망으로 일시적 만족을 얻으려 해도 근본적 허무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엄습하는 고독감,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서 생겨나는 절망감 등은, 결국 인간 영혼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를 스스로 고통스럽게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깊은 고뇌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신’ 혹은 ‘절대자’를 찾게 된다.

하지만 진리는 분명하다. 인간은 어떠한 도덕 수련이나 철학적 사유로만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찾도록 돕는 도구일 수는 있지만, 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은 불가능하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다. 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이 주어진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로마서의 핵심 구원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내면에 있으나, 그 불씨만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복음이 필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외치셨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대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초대는 종교 의식이나 공로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문제는 종교조차도 때로는 ‘장사꾼’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곤 한다는 점이다. 구원의 조건을 규정하고, 여러 행위나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스스로 어떤 자격을 갖춰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한 예수님의 가르침(누가복음15장 탕자의 비유)을 강조한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겠다”는 마음만 먹었을 때, 그가 무슨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던 게 아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그의 죄를 용서해주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 과정에서는 어떤 복잡한 절차나 대가가 개입되지 않았다.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죄책감이나 교만, 또는 세상의 왜곡된 종교관 때문인지, 자기가 뭔가를 더 준비해야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듯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이미 인간 안에 있는 상태에서,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서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 즉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처럼 우리 영혼이 하나님 없이는 갈급하고 불안하고 허무하다는 것은, 인간 존재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어떤 세속적 성취나 오락거리도 이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지 못한다. 고대 로마의 지식인들, 예컨대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철학자들도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몰두했고, 스토아 철학으로 내면의 평안을 추구했지만, 결국 죄 문제 자체를 해결할 길은 없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진정한 해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는 구절을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코 인간을 모르쇠로 방치하는 데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신다. 자연을 통해, 양심을 통해, 역사를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다. 문제는 인간이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불경건과 불의를 책망하시고, 결국 진노로 심판하신다(롬 1:18).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회복된 관계인 ‘화목’이 이뤄진다(롬 5장). 화목은 곧 구원이며, 거듭난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로 깨진 관계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이킬 때,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나 자신을 되찾는다”고 설교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소속을 바꾸거나 예배 형식을 갖추는 차원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온전해질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 “하나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내 영혼이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는 고백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인간 실존의 본질을 관통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안과 기쁨, 사랑,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온갖 대체물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돈, 권력, 명예, 쾌락, 온갖 우상적 대상들이“이것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일시적 만족과 더 큰 갈증을 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영혼의 방황을 지속한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한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는 특정 종교에 입문하거나 제도권에 소속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본래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깨닫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세상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에서든 인류는 끊임없이 신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왜곡되거나, 우상 숭배로 흐르거나,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신 개념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당신들이 지금 섬기는 무수한 우상이나 철학의 신, 제국 신격화가 아니라,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1장 19절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선언을 통해, 인간 내면의 종교적·영적 본질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1장 18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진노”와 나란히 제시되어, 인간의 이중적 실존을 보여준다. 즉, 한편으로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갈망과 양심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발심이 함께 존재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원죄와 하나님의 형상’의 혼재라고 볼 수도 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책망하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가능성을 믿어 주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작정 “당신들은 지옥 갈 죄인”이라고만 말하면, 그들은 귀를 닫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죄를 정확히 지적하되, 그 이유는 결국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함께 전하기 위함이다. 인간에게 죄가 있지만 동시에 구원에 이를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길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자격을 갖출 필요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죄 사함과 영생이 주어진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듯, 죄인 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참된 아들·딸로 회복시키신다. 로마서는 이후에 이 구원론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칭의와 성화,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단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항상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마음이다.

한편, 이를 전하는 교회의 사명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교회 역시 무수한 유혹과 세속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교회 안에서조차“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진리로 빛을 비추어야 할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결국 복음의 순수성과 능력을 잃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막아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복음이 지닌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를 전하는 대신, 인간적 자랑이나 행위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면, 영혼들이 참 자유를 경험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인 네가 이방인을 판단하느냐? 너희도 똑같다”고 선언하듯이,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스스로 죄에 빠져 있다면 위선이 된다. 교회 공동체가 진리를 막는 일, 즉 불경건과 불의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죄를 적당히 눈감아 주거나, 죄를 지적할 때 사랑 없이 정죄만을 하는 극단적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죄를 밝혀 회개로 인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장 19절은, 결국 “인간이 마음만 열면 언제든 하나님을 인식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울은 1장 후반부에서 이 희망을 버리고 계속해서 죄를 즐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셨다”는 표현을 쓴다(롬 1:24, 26, 28). 인간이 끝까지 거부하니, 하나님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시되, 그 결과가 어떠한 파멸을 가져오는지 결국 당사자 스스로가 맛보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이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사는 길을 택하면, 파멸의 책임도 자신이 지게 된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그 답을 로마서 3장 이후에 바울이 밝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벗어나 영생의 길에 들어가는 길이 제시된다. 이 복음이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로마서 1장 18-19절의 무거운 죄론과 진노 선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죄가 크고 인간이 절망적일수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명확하게 정리한다. 일반계시나 양심의 기능만으로는 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본능”을 주셨다는 사실은, 복음이 선포될 때 영혼이 그 음성에 반응할 수 있는 영적 토양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분출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1장 18절과 19절은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을 나란히 보여주는 말씀이자, 인간이 왜 구원받아야 하고,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서론을 제공한다.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되는 죄 때문에 인간은 진노 아래 놓여 있으나, 동시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만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전개하는 복음의 정수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는 각자 어느 누구도 “나는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가 없음을 성경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그 무게감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존재 깊숙이 당신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심어 놓으셨고,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완전하게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나 자신을 찾아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올바르게 붙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은 오직 죄 아래 있는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인간이 죄를 깨닫는 길은 이미 하나님이 내면에 심어두신 갈망과 자연계시를 통해 가능해진다”고 거듭 강조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아, 내가 늘 갈급했던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인식하거나, 혹은 마음속에 숨어 있던 죄책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회개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돌이킴’과 ‘주님께 나아옴’이야말로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의 출발점이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손길을 거두지 않으시며, 다만 인간이 그 손길을 뿌리칠 때, 죄에 대한 진노를 면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바울의 시대 로마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과학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내면 깊은 곳의 불안과 허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내재되어 있으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다.

그러나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을 열면,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는 길이 열려 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하고, 세상은 이를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되고,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구원의 논리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 1장 18-1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 문제는 단지 바울 시대나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죄가 있는 한, 이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동시에 복음의 답변도 계속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되었고, 그 갈망을 죄가 가려버려서 스스로 길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다시 열어 두셨다. 교회와 성도는 바로 이 길을 세상에 소개하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강해할 때마다 핵심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참된 자신을 회복하였는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 구원의 은혜를 붙들 것인가?”이다. 이는 로마서가 주는 매우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복음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죄를 핑계 삼거나 회피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공포가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오게 만드는 ‘구원의 기회’가 된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죄와 구원, 진노와 은혜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결코 참 자아도, 참된 평화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할 때, 죄 가운데 머무를 수밖에 없고, 그 죄로 인해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며, 복음이야말로 죄 사함과 영생, 하나님과 화목되는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메시지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세상 속에서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임을 전제해야, 죄를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회복을 믿고 기다릴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전제해야,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만일 교회가 죄나 진노를 회피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가 진정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구원 또한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반대로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을 무시한다면,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대방은 아예 희망이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두 구절(롬 1:18, 1:19)이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죄와 진노의 심각성을 직시하면서도,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소망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당신 안에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루속히 돌이켜야 합니다”라고 권면할 수 있다. 이 권면을 듣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복음은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된다.

결과적으로 로마서는 죄를 지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죄가 드러나야 구원이 임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1장 후반부와 2-3장에서 인간의 죄를 철저히 폭로한 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의 복음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로움이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가 임한다. 이것이 로마서가 펼치는 위대한 복음이다. 그리고 1장 18-19절은 바로 그 위대한 복음의 문을 열어 주는 시작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에게 “스스로 죄를 깊이 인정하고 회개하며, 이미 내면에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게 창조되었고, 그렇기에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게 마련이다. 그 갈망이 결국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 갈망을 부정하고 진리를 막으면,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반대로 갈망을 인정하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된다.

이렇듯 로마서 1장 18-19절은 복음의 전말을 보여주는 서곡이다. 죄의 현실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내면적 가능성이 교차하면서, “왜 구원이 필요한가?”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자연스레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는 이 물음에 대한 최종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으로 제시한다. 교회와 성도는 이 답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돌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 길을 열어 두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야말로 죄와 진노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길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복음의 핵심이다. 교회는 죄를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되, 정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해야 한다. 또한 세상이 이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본적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죄와 은혜, 진노와 구원이 함께 드러날 때,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은 오늘날에도 생생한 능력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의 가장 핵심은, 인간이 ‘본래의 나’를 되찾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등을 지고 불화 관계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불의한 인간관계 역시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갈 길이 열린다. 수직적 관계가 회복되어야 수평적 관계도 회복된다는 것이 로마서의 핵심 논리다. 불경건을 해결해야 불의의 문제들도 점차 치유된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짧은 두 구절 안에 복음 신학의 중요한 전제가 다 들어 있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이 없으나, 동시에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씨앗이 있어 복음을 받아들일 잠재력이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과학, 철학, 예술, 사상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하지만, 참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 교회는 이 해답을 가진 공동체로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은혜의 길을 안내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점은, 인간이 처한 영적 현실이 얼마나 엄중한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동시에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현실이지만,그분의 은혜와 구원도 현실이다.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복음의 초대에 온전히 응답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라는 두 축을 한눈에 보여주는 본문(롬 1:18-19)은, 로마서 전체의 서론이자 복음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바울은 이를 통해 독자들을 죄의 심연으로 안내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의 문을 열어 준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이 본문을 심도 있게 강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를 인식해야 구원이 보이고,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음을 깨달아야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열리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2장의 핵심 주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찬송과 감사의 이유를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넘어선 ‘역사의 큰 방향성’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역사의 흐름이B.C(주전)와 A.D(주후)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핵심적 사건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는“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거대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종말론적 비전’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보통 ‘창조-죄-그리스도-구원’으로 요약되는 사영리(四靈理)를 가르치지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추가하여 ‘창조-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소개한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의 구원”이라는 광범위한 차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바라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하듯,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찬양과기도가 넘치게 된다고 해설한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가 바로 바울의 기도”라며, 특히 에베소서 1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 내용을 주목한다. 그기도는 피상적인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영적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높은 차원의 요청이다. 즉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뜻 깨달음을구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타락과 죄 문제로 시선을 옮긴다. 원래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심히 좋았다’고 평가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다”고 한 말씀과 비견되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깊은 세계”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로 진노 아래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아들을 보내셨고,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복음으로 인류를 초대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Redemption)’의 사건임을 특히 강조한다.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가진 고대적 배경(노예를 돈으로 사서 자유를 선물하는 개념)처럼,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창조-죄-그리스도-구원’이라는 전형적인 사영리에 이어,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장대하고도 명확한 것인지를 설파한다.

그 결과,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은 ‘찬송’과 ‘기도’로 요약된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듯,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넘치는 찬양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닫고 체험하기를 구하는 ‘거룩한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 구원을지향하는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이 에베소서가 가진 독특한 규모감, 즉 ‘역사와 구원’을 동시에 관통하는 서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Ⅱ. 허물과 죄,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에베소서 2장으로 넘어가면서, 2장 1절에 등장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이지닌 극적인 반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 마지막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선언했는데, 2장에 이르러 그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παράπτωμα, 파라프토마)’과 ‘죄(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구분에 주목한다. 장재형목사는허물은 ‘궤도를 이탈함(fall away)’을 의미한다고 전하면서, 본래 인간이 가야 할 길(궤도)이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났다는 점을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 공전 궤도를 지니고 있고, 자연계나 동식물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창조 질서와 길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감(missing the mark)’이라는 어원을 갖는데, 이는 과녁 중심을 맞히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이 엉켜버린 상태,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전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단지 개인적 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구조적 죄악임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즉 사람들은 죄의 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있으며, 그 세력이 세상 풍속(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 등)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죄의 기류’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거대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성적 퇴폐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당시 사람들이 “우상 숭배와 음란, 부패한 문화 속에서 그 길을 좇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모습’이 결코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할 때,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불의와 우상숭배를 행하며, 서로를 해치는 죄악 가운데 빠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라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질적 태도이자, 회복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간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해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구원할 길을 내신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반전 메시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라는 구절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인류를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은 아들을 내어주는 극단적 희생을 통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구원을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의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의 본질은 ‘행위 이전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장재형목사는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언급하며, 종교개혁 시기부터 강조되어 온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먼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엡2:9)고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물을 타면 안 되듯, 절대 은혜에 행위 공로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유하며, 구원의 절대성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표현(엡2:10)을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로 분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음을 재차 언급하며, 구원은 단순히 죄사함이나 형벌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근본적 재창조라고 본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는 말로 이어간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신‘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결국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서 빛과소금이 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 2장 1-10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은, 허물과 죄로 궤도를 이탈하고 과녁에서 빗나간 인간을 주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심’으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복음의정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죄인 인생에게, 하나님의 극진한 긍휼과 사랑이 임하여 ‘함께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에 참여시키셨으므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확신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2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 정리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할 때, 이는곧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종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결론이자 신약의 시작, 곧 “알파요 오메가”라는 계시록의 선언처럼 역사의 시발점이자 완성점으로서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개념에 빗대어, “구약의 오메가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오메가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결국 종말은 “낡은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물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수렴”되는 계획된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속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된 것을상기시킨다(행28:3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는 말 속에도 “나라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해설한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참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낡은 죄악의 역사는 십자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는 선포는, 곧 오늘날 교회가 “어떤 역사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자신의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게 된다”는 비유를 들며, 크리스천은 “명확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며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금씩 자라나며, 누룩처럼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듯 영향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다(마13:31-33).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역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적 태도가 “찬송과감사”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삶 자체를 찬송으로 고백했듯, 그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찬양의 이유는 단지 심리적 위로 수준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었던 자를 “은혜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습과 공중 권세에 붙들려 허우적대며, 결코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줌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은 “값 없이” 구원받았으며, 그 결과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여기에 대한 감사가 곧 찬양이 된다.

또한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의 태도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감사와 찬송은 결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해석한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도 바울이 그 은혜를 깨닫고 온 인생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 선을 행하게 함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결국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장(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으니 “새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에베소서가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이며, 또한 “장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구원 계획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요약한다. 과거에 죄로 인해 궤도를 이탈해 죽어 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소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사단의 권세가 커 보일지라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워졌다”는 복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노래와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교회 공동체를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목표로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가는 종착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낡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끝이 나며, 새로운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 은혜로 구원받은 너희는 선한 일을 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라”라고 결론지어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2장의 메시지는 곧 교회의 정체성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이다. “너희가죽었었다, 그러나 이제 산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서 나온 감사와 찬양, 그리고 확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위에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죽음에서 생명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옮겨진 모든 사람의 고백이요 간증이 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고한 비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이 장대한 역사의 행진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그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마땅하다는 결론이,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에베소서 2장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구원의 은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2장의 핵심 주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찬송과 감사의 이유를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넘어선 ‘역사의 큰 방향성’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역사의 흐름이B.C(주전)와 A.D(주후)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핵심적 사건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는“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거대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종말론적 비전’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보통 ‘창조-죄-그리스도-구원’으로 요약되는 사영리(四靈理)를 가르치지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추가하여 ‘창조-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소개한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의 구원”이라는 광범위한 차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바라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하듯,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찬양과기도가 넘치게 된다고 해설한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가 바로 바울의 기도”라며, 특히 에베소서 1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 내용을 주목한다. 그기도는 피상적인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영적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높은 차원의 요청이다. 즉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뜻 깨달음을구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타락과 죄 문제로 시선을 옮긴다. 원래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심히 좋았다’고 평가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다”고 한 말씀과 비견되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깊은 세계”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로 진노 아래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아들을 보내셨고,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복음으로 인류를 초대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Redemption)’의 사건임을 특히 강조한다.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가진 고대적 배경(노예를 돈으로 사서 자유를 선물하는 개념)처럼,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창조-죄-그리스도-구원’이라는 전형적인 사영리에 이어,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장대하고도 명확한 것인지를 설파한다.

그 결과,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은 ‘찬송’과 ‘기도’로 요약된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듯,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넘치는 찬양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닫고 체험하기를 구하는 ‘거룩한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 구원을지향하는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이 에베소서가 가진 독특한 규모감, 즉 ‘역사와 구원’을 동시에 관통하는 서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Ⅱ. 허물과 죄,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에베소서 2장으로 넘어가면서, 2장 1절에 등장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이지닌 극적인 반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 마지막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선언했는데, 2장에 이르러 그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παράπτωμα, 파라프토마)’과 ‘죄(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구분에 주목한다. 장재형목사는허물은 ‘궤도를 이탈함(fall away)’을 의미한다고 전하면서, 본래 인간이 가야 할 길(궤도)이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났다는 점을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 공전 궤도를 지니고 있고, 자연계나 동식물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창조 질서와 길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감(missing the mark)’이라는 어원을 갖는데, 이는 과녁 중심을 맞히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이 엉켜버린 상태,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전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단지 개인적 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구조적 죄악임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즉 사람들은 죄의 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있으며, 그 세력이 세상 풍속(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 등)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죄의 기류’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거대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성적 퇴폐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당시 사람들이 “우상 숭배와 음란, 부패한 문화 속에서 그 길을 좇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모습’이 결코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할 때,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불의와 우상숭배를 행하며, 서로를 해치는 죄악 가운데 빠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라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질적 태도이자, 회복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간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해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구원할 길을 내신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반전 메시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라는 구절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인류를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은 아들을 내어주는 극단적 희생을 통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구원을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의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의 본질은 ‘행위 이전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장재형목사는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언급하며, 종교개혁 시기부터 강조되어 온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먼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엡2:9)고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물을 타면 안 되듯, 절대 은혜에 행위 공로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유하며, 구원의 절대성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표현(엡2:10)을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로 분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음을 재차 언급하며, 구원은 단순히 죄사함이나 형벌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근본적 재창조라고 본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는 말로 이어간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신‘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결국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서 빛과소금이 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 2장 1-10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은, 허물과 죄로 궤도를 이탈하고 과녁에서 빗나간 인간을 주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심’으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복음의정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죄인 인생에게, 하나님의 극진한 긍휼과 사랑이 임하여 ‘함께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에 참여시키셨으므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확신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2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 정리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할 때, 이는곧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종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결론이자 신약의 시작, 곧 “알파요 오메가”라는 계시록의 선언처럼 역사의 시발점이자 완성점으로서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개념에 빗대어, “구약의 오메가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오메가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결국 종말은 “낡은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물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수렴”되는 계획된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속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된 것을상기시킨다(행28:3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는 말 속에도 “나라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해설한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참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낡은 죄악의 역사는 십자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는 선포는, 곧 오늘날 교회가 “어떤 역사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자신의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게 된다”는 비유를 들며, 크리스천은 “명확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며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금씩 자라나며, 누룩처럼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듯 영향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다(마13:31-33).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역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적 태도가 “찬송과감사”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삶 자체를 찬송으로 고백했듯, 그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찬양의 이유는 단지 심리적 위로 수준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었던 자를 “은혜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습과 공중 권세에 붙들려 허우적대며, 결코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줌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은 “값 없이” 구원받았으며, 그 결과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여기에 대한 감사가 곧 찬양이 된다.

또한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의 태도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감사와 찬송은 결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해석한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도 바울이 그 은혜를 깨닫고 온 인생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 선을 행하게 함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결국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장(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으니 “새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에베소서가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이며, 또한 “장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구원 계획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요약한다. 과거에 죄로 인해 궤도를 이탈해 죽어 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소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사단의 권세가 커 보일지라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워졌다”는 복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노래와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교회 공동체를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목표로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가는 종착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낡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끝이 나며, 새로운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 은혜로 구원받은 너희는 선한 일을 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라”라고 결론지어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2장의 메시지는 곧 교회의 정체성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이다. “너희가죽었었다, 그러나 이제 산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서 나온 감사와 찬양, 그리고 확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위에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죽음에서 생명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옮겨진 모든 사람의 고백이요 간증이 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고한 비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이 장대한 역사의 행진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그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마땅하다는 결론이,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에베소서 2장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바울의 간증과 복음의 보편성 – 장재형목사

1.행 22장의 역사적 배경과 장재형목사의 신학적 해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2장을 해설하면서, 먼저 행 21장 마지막 절과 22장 초두에 드러난 역사적 배경을 깊이 살핀다. 이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직후,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유대인 무리에게 히브리 방언(아람어)으로 변증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언어적 배경이 단순한 의사소통 차원을 넘어, 당시 유대 사회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 차 있던 무리들에게 심리적·정서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이 자신이 정통 유대교 바리새파 출신이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고 밝힐 때 이들이 놀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런 언급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배경과 정통성을 먼저 변증하는 일종의 서론을 제시했다고 본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몰려온 사람들의 분노가 왜 그토록 컸는지 주목한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갈 때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오해를 받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 거부감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사회 안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이 존재했는데,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센파, 열심당(제롯당) 등이 그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네 주요 흐름이 어떻게 로마와의 관계를 맺으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는지를 설명한다. 사두개파는 귀족 계층과 제사장들이 중심이 되어 로마 권력과 일정 부분 협력하는 이들이었고, 바리새파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 정결함을 지키며, 결국 죄 없는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엣센파는 광야로 나아가 세속과 분리된 급진적 금욕 생활을 하면서, 죄로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에 들어가기보다 공동체의 순수함과 경건함을 유지하려 했다. 열심당은 무력 투쟁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려 한 집단으로, 극단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으로서 자치와 율법을 중시했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는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청종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종파적·정치적 배경을 좀 더 심층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갈등의 중심에 있던 바울이 어떤 논리와 간증을 통해 자신을 변증했는지를 꼼꼼하게 짚는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유대교에서 높이 존경받는 도시 다소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음을 언급한다. 이것은 자신이 단순한 이단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유대 전통과 율법교육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의도적 발언이었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한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을 인용하듯이, 자신이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이것은 바울이 갖고 있던 자격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배교자’나 ‘이단 교주’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였음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증하며 과거에 자기와 비슷한 열심 가운데 있었던 군중들을 향해 “나도 바로 당신들처럼 열심이 넘치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과거에 예수의 길, 곧 ‘이 도’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증언한다. 특히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 스데반을 죽이는 이들의 옷을 맡아 보관했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사람들을 다메섹으로까지 체포해 오려 했다는 사실이 바울 자신의 입을 통해 재차 확인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예수 공동체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석한다. 유대인 청중들은 이 진술을 들으면서도, 그간 알려진 바울의 경력이 사실임을 알고 있기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설명한다. 여기에 나타난 “큰 빛”이 바울의 존재와 사고를 모두 뒤흔든다는 점, 이때 엎드러진 바울이 들은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직접적인 책망이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바울은 누구를 박해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대상은 곧 ‘나사렛 예수’였다. 이것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바울은 3일간 앞을 보지 못하며 깊은 회개와 침묵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후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고, 회복과 함께 사명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선택과 계시의 신학을 함께 제시한다. 하나님은 죄 많고 악독한 자도 회심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복음의 신비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바울 자신이 훗날 로마서에서 밝혔던 진리가 그 체험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고 해설한다.

아나니아의 권면은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로 요약된다. 이것은 단순한 눈의 회복을 넘어 신앙적 시각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주저하지 말고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는 요청은 기존 유대교적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 고백을 전제한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회심 과정을 회중들 앞에서 세세히 증언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산헤드린의 종교재판권을 행사하던 당시의 유대 지도층이 과연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바울 자신이 얼마나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간증이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는 행위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근본적 회심이 가능하다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전도적 선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본문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온 이후 겪은 환상을 강조한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이들은 네 증언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이 장면에서 예루살렘에서의 복음 전파가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가장 선호되는 선교지이자, 자신의 동족과 과거 동료들에게 새로운 길을 알리고 싶은 열망의 장소였다. 이때 “내가 핍박하던 예수를 이제 전하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싶었을 것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해석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유대 청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선민사상과 충돌한다 판단하여, “이러한 놈은 살려둘 자가 없다”고 외치며 극단적 반응을 보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역사적 야만성과 종교적 편협이 결합된 대표적 사례임을 지적한다. 결국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언급해, 불법적 고문이나 채찍질을 면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세속 제국의 법이 종교적 극단주의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해설한다.

2. 바울의 간증과 선택 교리에 대한 장재형 목사의 해설

장재형 목사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간증을 중심으로, 선택 교리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풍부하게 풀어낸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극적인 회심을 생생히 증언한다. 과거 그는 열정적인 종교인이었으나, 그 열정이 자신의 백성과 전통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공문을 받아 “이 도”에 속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며, 심지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관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큰 빛”과 음성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고, 3일간의 실명과 내적 고뇌의 시간을 통해 과거의 죄악된 행위를 돌이키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 선택과 부르심을 결코 자신이 자의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항상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다”라는 로마서 8장 말씀이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라는 요한복음 15장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확립한다. 바울의 회심은 그 자신의 내적 성찰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과 은총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인용한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수많은 크리스천을 감옥에 가두려 했던 바울이야말로 당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바로 그를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적인 기준이나 도덕적 자격을 뛰어넘는 은총을 보여 준다고 해설한다. 아나니아 역시 바울을 만나라는 주님의 지시를 들었을 때 망설였으나, “내가 택한 그릇”이라는 명령적 선포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의 성품이 아무리 악하고, 과거에 어떠한 죄를 범했든지 간에, 주님이 택하시면 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선택이 왜 바울의 ‘자발적’인 부분과 결합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회심 후에 곧장 기도하며, 금식 상태에서 3일을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기간은 단순한 육체적 불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의 삶을 내어드리는 전적인 복종의 시간이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여?”라는 물음은 선택받은 자가 취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응답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셈이다. 장재형 목사는 회심이 곧 순종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선택받은 자에게는 거룩한 책임과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증언할 때 일관되게 “나는 죄인이요, 예수를 핍박했던 자”라는 점을 되짚는 이유가, 바로 이 ‘은혜의 선택’을 부각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선택이 교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감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도 세상적 자랑거리와 경력, 그리고 율법적 자부심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이는 과거 자신의 지위나 학문적 명성, 열심 따위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행 22장에서 간증하는 다메섹 도상 체험이며, 그 뒤 아나니아의 안내로 받은 세례와 눈의 회복이었다고 장재형 목사는 풀어낸다.

정리하자면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간증이 단순히 한 개인의 회심사가 아니라, 선택과 은혜가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말한다. 한때 복음의 최대 박해자였던 바울이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 과정은,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고 변화시키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바울의 회심은 철저히 유대교적 소속감과 국수주의적 신앙 체계를 가진 사람이 이방인의 사도로 돌변하는 극적 반전을 이룬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누차 강조하듯,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사람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복음의 보편성을 세상에 알려 나가는 도구로 쓰이게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결코 바울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복음의 능력이라는 점을 장재형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3. 예루살렘 갈등, 이방인 포용, 그리고 복음의 보편성

장재형 목사는 행 22장의 후반부에서 폭발적으로 분노하는 유대 군중의 모습을 통해,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역설적 메시지를 발견한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는 바울의 말이 나온 순간, 이들은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외친다. 이는 단지 이방인과의 교제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범위를 한 민족·한 종교 공동체 안에만 가두어 두려는 독선이 얼마나 깊은 반감을 드러내는지를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그들의 분노가 ‘열심’의 반대 급부이기도 하다고 해설한다. 그토록 선민의식을 지키고, 율법을 최우선으로 하며, 모세의 전통을 수호해온 이들에게, 이방인도 동일하게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거부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의 손에 붙잡혀 곤욕을 치르던 바울을 지켜 준 것은 로마 제국의 법적 질서였다. 천부장은 바울의 로마 시민권을 확인한 후, 합당한 신문 절차 없이 채찍질할 수 없음을 알고 두려워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당대 가장 세련된 법 체계와 제도적 틀을 갖춘 로마가 정작 ‘이단’으로 몰린 복음 전도자를 보호해 주었고, 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던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인간 제도나 민족적 배경이 자동으로 참된 신앙이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들 안에서, 이미 선민사상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장재형 목사는 지적한다.

장재형 목사는 본문과 관련하여, 교회가 ‘새로운 백성’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신학적 구도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을 복 주고자 하심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구별됨을 이웃을 섬기고 진리를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보존과 종교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삼기 쉬웠다. 이러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행 22장 후반부의 집단적 폭력과 분노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민족·언어·계층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고 밝혔을 때 로마 당국자가 그를 보호하려 한 사건은, “복음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심지어 로마 제국의 체제 안에 있든지 간에 모두에게 열린 기회”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결국 이 법적 보호를 등에 업고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며, 나중에는 황제 앞에서까지 자기 사명을 증언하는 과정을 뒤이은 본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 어떤 갈등이나 반발이 있어도 복음이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된다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언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가 제국의 제도, 군대, 행정 시스템 등을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복음 전파를 추진하신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문에 장재형 목사는 복음 전파에 있어 ‘세속 권력’ 자체를 절대 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때로 그 권력의 구조를 통로로 삼아 택한 자들을 보호하고, 또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지게 하신다는 사실을 교회가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을 대할 때,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군중 안에 있는 폭력성과 편협함을 남의 이야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다. 현대에도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배타주의, 민족 우월주의, 교파 중심주의가 교회 안팎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 복음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이 받은 부르심, 즉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실제로 선교 역사의 원점이라 할 수 있으며, 교회가 계속해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역설한다. 유대 성전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는 복음은,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약속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여정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바울이었고, 그 바울을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장재형 목사는 정리한다.

종합하자면, 장재형 목사가 행 22장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종교적 열심과 율법적 엄격함이 곧 참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바울의 극적인 회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과 은혜의 표본이며, 누구도 자신의 경력이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셋째,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포용하는 보편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분노한 군중이 이를 거부했을 때, 오히려 로마 체제가 바울을 보호했다는 역설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치·사회·역사 구조까지도 뒤흔들며 복음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확인시킨다. 결국 행 22장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 안에 숨은 편협함은 없는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일깨움으로써, 교회가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성찰과 순종을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행 22장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소명을 새롭게 자각하게 하는 본문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결론지으며, 오늘날에도 해당 본문이 갖는 의의가 결코 작지 않음을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 – 장재형(장다윗)목사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라고 선포한다. 이는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몸으로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해석하며, 교회가 다양한모습과 문화를 품고 있을지라도 그 근원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몸이 하나라는선언은 단순히 조직이나 제도상의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적·실질적으로 “연합”된다는본질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됨의 기초”

이 연합은 외적인 형태나 특정 공동체만의 색깔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바울은 “성령이 하나”임을강조함으로써, 교회 내 모든 성도의 궁극적 출발점이 어디인지 분명히 한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자체가 성령께서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끄시고 그분의 몸 안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뜻한다. 그결과,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독점하거나 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고, 한 몸 안에서 함께성장하는 동등한 지체라는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는 이 개념이 다양성의 무시나 획일적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설명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은사와 사역을 조화롭게 엮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다양한 지체가 있다”고 언급한 사상과도상통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각자의 위치와 사명을 온전히 인정받고, 서로경쟁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함으로써 진정한 하나 됨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4장 4~6절을 보면 몸·성령·소망·주·믿음·세례·하나님 등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가 제시된다. 몸이하나, 성령이 하나, 소망이 하나, 주가 하나, 믿음이 하나, 세례가 하나, 하나님이 하나. 바울은 이를 통해 교회가분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렇게분명한 기초를 제시했음에도, 교회는 여러 사소한 문제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분열을 반복해 왔다”고지적하면서, 오직 복음의 근본을 붙드는 것만이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위험 요소 중 하나는 세속화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각종문화적·사상적 흐름이 교회에도 파급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열정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세속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겼다. 장재형 목사는 “세속화신학”이 모두 그르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관점”을 긍정적으로수용하되,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자기 배타적 형태를 취해도 문제가 된다. 특정 교단이나 신앙 전통만이 완전하고옳다고 주장할 때, 복음의 본질과 하나 됨의 정신은 무시되고 외형적 기준만을 내세우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그러한 편협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에베소서 4장에 제시된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를날마다 되새길 것을 권면한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역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임하는 데 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작이자 마침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교회는그 방향을 더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교회 안의 화합을 위해서만이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칼과 창이 낫과 보습으로 바뀌는 진정한평화와 회복은 이 땅의 어떠한 제도나 인간적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을하나로 묶고 세상으로 흩어 보낼 때, 그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동시에 복음 전파와 봉사를 통해 세상에 소금을 뿌리고 빛을 비추는‘파송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세상속으로 나가 그 은혜를 나누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하나 됨의 이유가 교회 외부로 확장되는선교적 목적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점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담긴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며, 소망이 하나이고, 주·믿음·세례·하나님이모두 하나이시다”라는 일곱 가지 선언을 붙드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됨을 온전히 이루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질적 진리 위에교회가 다시 서면, 아무리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복음의 힘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2. “은혜와 선물의 신비—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본질”

에베소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밝혀낸다.

이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 수 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한 품꾼도, 오후 늦게 불려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품꾼도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 이 장면에서 오래일한 이들은 불평하지만, 주인은 “내가 너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준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받아 버리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설명하신것이다.

포도원 주인에 해당하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선한 공로도 쌓을 수 없었던 죄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을베푸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대반전”이며, 구원을 자격으로 환산하려는 인간의 모든오만한 시도를 일거에 부정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의 결과’로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일방적호의를 의미한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값을 치르지 않는다. 오직 베푸는 이의 호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뿐이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뿐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역시 이를 잘 그려낸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방탕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조건 없이 환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오기만하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이런 은혜를 모르는 이들이나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도 그 은혜 안에머무름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야말로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할 때 감사와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역설한다. 교회가 만약 이 은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가 행했으므로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정죄와 배제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복음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죄인을 향한 자비와 구원의 초청장을준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복음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이유도,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배타적인 클럽이 되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포장하며 세상을재단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교회의 하나 됨도 마찬가지로 이 은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값없이 받은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더 낫다”는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서로를 존중하게 될 때,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역사를 실제로 누리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접착제 역할을 하는 한 몸의 공동체가 교회”라고가르치며, 은혜의 신비가 사라지면 곧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고 덧붙인다.

이렇듯 은혜에 대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영혼들조차도 함께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커진다.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기억한다면, 교회 안에는 결코 서열이나 차별이 자랄 자리가 없다.

3.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은사의 목적과 직분”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시편 68편을 인용하여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을 언급한다. 이는 구약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수가 전리품을 얻게 되고, 그것을 나누어 갖는 장면에서 따온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걸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낮아지시고(성육신과 고난), 죽음을 통해 승리하신(부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사 교회에게 은사를‘전리품’처럼 분배하셨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사역이 곧 주님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강조하며, 하나님이 교회에 은사를 주심은 인간적 자격과 능력에 근거한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이 은사의 다양성을 잘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는 은사들이 다채롭게 언급되는데, 이러한다양성은 교회 안에서 상호 보완을 통해 더 큰 통일성을 이룬다. 장재형 목사는 “은사의 목표는 교회를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섯 가지 대표 직분을 언급한다. (일부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묶어 네 가지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을반영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늘날 교회도 이 다섯 직분이 제시하는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사도는개척하고 파송되는 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는 곳곳에 복음을 퍼뜨리는자, 목사는 양을 돌보는 자,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각각 지칭한다.

이 직분들 중 어느 것도 우열이 없으며, 모두가 귀하다.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바울은 “몸의 다양한 지체”에 비유했다. 눈과 손, 발, 귀 등 각 지체가 서로 다른기능을 담당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으로서의 활동이 제한된다.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획일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통해 풍성한 하모니를 이룬다는 데 진정한아름다움이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주신 목적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우려 하심이라”고 요약한다. 이를 조금 더 풀면 첫째,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교회의몫이다.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가 지닌 “꿰매고 교정한다”는 의미처럼, 교회는 죄와 아픔으로 갈라진 영혼들을보살피고 수선하는 작업에 부름받았다. 둘째, 그 회복된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도록준비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교육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돌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활동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견고히 세우는데 있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파송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은사를 제대로 발견하고 활용하도록 돕는 일이 교회 리더십의 핵심 과제”라고 말한다. 은사는 때로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성도가 “내 은사가 더영적이다”라며 우월감을 갖거나,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은사가 없으니 쓸모없다”고 낙담하면, 교회는 건강한기능을 잃고 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눈이 손에게, 손이 발에게 우열을 논할 수 없음을 언급한 이유가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서 각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개인의 명성과자부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은사를 나누고 협력하는 교회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존중과 겸손”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대형교회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는, 주목받기 쉬운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 간의 간극이 크게 벌어질 수있다. 그러나 서비스팀, 행정팀, 재정팀, 주차 안내 봉사, 각종 돌봄 사역 등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들의헌신 없이는, 결코 교회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서로 다른 은사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함께협력할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은사가 다양해도, 그 목적과 방향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 온전한 통일성을이룰 수 있다. 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야말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하는 교회론적 핵심이다.

4. “교회의 참된 사명—세상 속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방향성을 논할 때 자주 “In and Ou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교회가 모이는 것(In)과흩어지는 것(Out)의 두 가지 축을 균형 있게 잡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내부적으로 뜨거운 예배 공동체가 되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전했다. 교회가 이 두 측면 중 어느 한 쪽만 강조해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직 안에만 머문다면 세속과단절된 종교 집단이 되고, 밖으로만 나간다면 영적 교제와 예배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세속화 신학’이 대두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활발해졌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도 같은 시기에 부각되었다. 이는 선교가 교회의 전략이나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사역을 펼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그저‘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아 동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서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리스도께서이미 만물을 통일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어느 민족이나 문화 안에서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급변하고 있는 지금, 교회가 더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지역 안에 공존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도발생하지만, 동시에 복음 전파의 기회도 열린다. 교회가 만약 지역과 민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은혜와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는 곧 에베소서 1장10절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우주적그리스도론과 결을 같이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종종 교회 사명 하면 전도와 예배만을 떠올리기쉽지만,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낙은애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초대 교회도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약자들을 보살폈다. 장재형 목사는 “수직적 영성(예배와 기도)만 강조하면 세상과 분리된 종교 생활로 전락하기 쉽고, 수평적사랑(사회적 봉사)만 강조하면 영적 뿌리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두 축을 균형 있게붙들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공동체다. 교회가 서로 하나 되고, 각자의 은사를 최대한발휘하여 상호 보완하고, 동시에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긴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체험하게 된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희락이라”고 했던 말처럼, 교회는 이 세 가치(의·평강·희락)를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증인이다.

장재형 목사는 가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세속적 표현을 빌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세상 구조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앞에서 해체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종말론적 확신을 자주전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거나 더디게 느껴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고 있고 또 결국 완성에 이를것이다. 교회는 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조금씩 펼쳐 보이는 모델 하우스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교회가 은혜에 기초하고, 다양성 속 통일성을 추구하며, 세상으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의 몸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 됨과 거룩함을 교회 안에만 가두지 않고, 세상속에 해방과 치유와 축복의 통로로 가져가는 것이 참된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때때로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에베소서 4장의 교훈, 즉 통일성과 다양성, 은혜와 선물, 그리고 파송된 공동체라는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다시금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결국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전초 기지이다. 값없이 받은 은혜로하나 되어,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아픈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초대받은 품꾼들이며, 결코 자격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은혜 덕분에 자리를 얻은사람들이다.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엿보고, 장차 완전하게임할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적 순환이 멈추지 않을 때, 닭의 모가지를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경영대학원 박사학위 승인 획득 프로그램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캘리포니아 주 사립 고등 교육국(BPPE)이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박사 학위 제공을 승인했습니다. 이 학위는 경영학 프로그램을 전공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박사 학위 프로그램은 경영학 학사 학위의 우수한 졸업생과 MBA 프로그램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며, 학생들을 학계 및 경영학 연구 분야에서의 경력을 쌓도록 준비합니다.

Olivet Business School의 경영학 박사 과정은 엄격한 연구와 혁신적인 통찰력 형성을 목표로 하며, 학생들이 최고 수준의 교육 기관에서 모범적인 교사가 되도록 장려합니다.

이 프로그램의 후보자들은 경영, 시장, 재무, 조직 등과 관련된 넓은 주제를 조사하며, 비즈니스 실무와 관련된 경영 이론과 지식을 창출하는 연구에 중점을 둡니다.

올리벳 경영대학원의 제이콥 채터지 학장은 이 프로그램의 승인이 학생들의 노력과 학문적 우수성을 증명한다며, 이제 학생들이 변화하는 경영학 세계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더욱 강력하게 준비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학교는 새로운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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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JCM MIDI 과정은 학생들이 자신의 노래를 출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Jubilee College of Music(JCM)에서는 겨울학기에 맞춰 MIDI(악기 디지털 인터페이스)에 관한 음악 제작 과정을 새롭게 개설했습니다.

MIDI는 현대 음악가와 프로듀서들에게 균형 잡힌 도구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은 학생들에게 MIDI 노트 작성, 오디오 트랙 녹음, 다양한 종류의 가상 악기 설치 등 음악 제작의 기초를 소개합니다.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디지털 오디오 워크스테이션(DAW)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곡을 작곡, 편곡하고 출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것입니다.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인 Coco Chang은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MIDI 기술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악기 선택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에 대한 취향을 개발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코스 강사인 Jerry Park은 모든 JCM 학생들이 기독교 예술가로 성장할 것이며, MIDI 코스가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음악을 출판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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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 수업에서 학생들이 사역 준비 상태를 보여줄 수 있도록 설계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겨울 분기가 시작되면서 OSAD(Olivet School of Art and Design)의 2021년 학생들은 6월 졸업에 맞춰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과정의 정규 MA 외에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는 OSAD 졸업 요건 중 하나입니다. 2분기에 걸쳐 진행되며, 각 학생은 웹 디자인, 브랜딩, UI/UX 디자인, 제품 모형 등 전문 분야 하나에 대한 프로젝트를 제안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은 사역과 협력하여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궁극적으로 발표 가능한 제품을 생산하게 됩니다.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에서 성공하려면 학생은 그래픽 디자인 과정 석사 과정에서 다루는 실용적인 디자인 기술을 숙달해야 합니다. 또한,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통해 학생들은 프로젝트 관리, 연구, 커뮤니케이션, 리더십 교육을 통해 점차적으로 아트 디렉터의 역할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OSAD 프로그램 디렉터인 Rodem Hwang은 “우리는 학생들이 최종 포트폴리오 프로젝트를 위해 교회, 파라처치 조직, 기업 또는 교육자와 긴밀히 협력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들은 디자인을 넘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사역에 준비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싶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OSAD는 2021년 졸업생들의 성공을 기원하며 이번 여름에 결실을 맺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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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 OSMC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대한 연간 커리큘럼 검토를 실시합니다.

장재형목사
올리벳대학교


장재형목사가 세운 올리벳대학교의 Olivet School of Media and Communication(OSMC)은 여름 분기에 저널리즘 프로그램의 연례적인 커리큘럼 검토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검토를 통해 검토 위원회는 최신 업계 표준을 반영하여 몇 가지 주요 변경 사항을 제안하였습니다.

새로운 프로그램은 보다 전문적이고 기술 중심적인 교육 모델을 채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전히 저널리즘과 보도의 기본 원칙은 유지되지만, 학생들은 텍스트, 사진, 비디오, 그래픽 등 다양한 형식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을 학습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특정 매체에 초점을 맞춘 보다 심층적인 교육 과정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또한, 새로운 커리큘럼은 최신 장비와 생산 시설을 활용하여 보다 현실적인 학습 경험을 제공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업계에서 요구하는 벤치마크에 맞춰 전문 장비에 대한 교육을 받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예를 들어, Associated Press는 최근 Sony 이미징 제품을 전 세계 시각 저널리스트에게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미러리스 카메라는 학생들의 작업에서 표준 장비로 사용될 것입니다.

또한, 정보 기술을 적용하는 새로운 학습 트랙이나 인증 프로그램도 도입될 예정입니다. 학생들은 빅 데이터, 인공 지능(AI), 가상 현실(VR) 제작, 라이브 스트리밍 등과 같은 최신 주제를 선택하여 공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심사위원회는 특정 교과목 교수진 및 컨설턴트들과 추가 회의를 거친 후 다음 달에 새로운 교육과정 초안을 완성할 예정입니다. 이러한 변경 사항은 학생들에게 보다 현실적이고 산업에서 요구되는 기술과 지식을 제공하여 미디어 및 저널리즘 분야에서의 경쟁력을 향상시킬 것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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