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간증과 복음의 보편성 – 장재형목사

1.행 22장의 역사적 배경과 장재형목사의 신학적 해설

장재형 목사는 사도행전 22장을 해설하면서, 먼저 행 21장 마지막 절과 22장 초두에 드러난 역사적 배경을 깊이 살핀다. 이 본문은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포된 직후,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는 유대인 무리에게 히브리 방언(아람어)으로 변증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언어적 배경이 단순한 의사소통 차원을 넘어, 당시 유대 사회와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그리고 종교적 열심으로 가득 차 있던 무리들에게 심리적·정서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울이 자신이 정통 유대교 바리새파 출신이자,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고 밝힐 때 이들이 놀랐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언급하며, 이런 언급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배경과 정통성을 먼저 변증하는 일종의 서론을 제시했다고 본다.

장재형 목사는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몰려온 사람들의 분노가 왜 그토록 컸는지 주목한다. 바울이 성전에 들어갈 때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왔다는 오해를 받은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바울이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이 거부감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 사회 안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이 존재했는데, 사두개파, 바리새파, 엣센파, 열심당(제롯당) 등이 그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네 주요 흐름이 어떻게 로마와의 관계를 맺으며, 또한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는지를 설명한다. 사두개파는 귀족 계층과 제사장들이 중심이 되어 로마 권력과 일정 부분 협력하는 이들이었고, 바리새파는 철저한 율법 준수를 통해 정결함을 지키며, 결국 죄 없는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리라고 믿었다. 엣센파는 광야로 나아가 세속과 분리된 급진적 금욕 생활을 하면서, 죄로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에 들어가기보다 공동체의 순수함과 경건함을 유지하려 했다. 열심당은 무력 투쟁을 통해서라도 로마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려 한 집단으로, 극단적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으로서 자치와 율법을 중시했지만,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뒤에는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청종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종파적·정치적 배경을 좀 더 심층적으로 조명하면서, 그 갈등의 중심에 있던 바울이 어떤 논리와 간증을 통해 자신을 변증했는지를 꼼꼼하게 짚는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유대교에서 높이 존경받는 도시 다소 출신이라는 점을 밝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음을 언급한다. 이것은 자신이 단순한 이단적 견해를 가지고 활동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히 유대 전통과 율법교육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의도적 발언이었다고 장재형 목사는 설명한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5절을 인용하듯이, 자신이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대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스스로 밝힌다. 이것은 바울이 갖고 있던 자격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배교자’나 ‘이단 교주’가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을 가진 자였음을 강조하는 맥락이다.

바울은 자신을 변증하며 과거에 자기와 비슷한 열심 가운데 있었던 군중들을 향해 “나도 바로 당신들처럼 열심이 넘치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다. 바울은 과거에 예수의 길, 곧 ‘이 도’를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던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증언한다. 특히 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사실, 스데반을 죽이는 이들의 옷을 맡아 보관했고, 예루살렘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권한을 위임받아 사람들을 다메섹으로까지 체포해 오려 했다는 사실이 바울 자신의 입을 통해 재차 확인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바울이 얼마나 철저히 예수 공동체를 말살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석한다. 유대인 청중들은 이 진술을 들으면서도, 그간 알려진 바울의 경력이 사실임을 알고 있기에 쉽게 반박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은 사건을 매우 중요하게 설명한다. 여기에 나타난 “큰 빛”이 바울의 존재와 사고를 모두 뒤흔든다는 점, 이때 엎드러진 바울이 들은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직접적인 책망이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바울은 누구를 박해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 대상은 곧 ‘나사렛 예수’였다. 이것이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바울은 3일간 앞을 보지 못하며 깊은 회개와 침묵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 후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고, 회복과 함께 사명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선택과 계시의 신학을 함께 제시한다. 하나님은 죄 많고 악독한 자도 회심의 대상으로 삼으신다는 복음의 신비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바울 자신이 훗날 로마서에서 밝혔던 진리가 그 체험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다고 해설한다.

아나니아의 권면은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로 요약된다. 이것은 단순한 눈의 회복을 넘어 신앙적 시각의 완전한 전환을 의미한다. 또한 “주저하지 말고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죄를 씻으라”는 요청은 기존 유대교적 의식과는 본질적으로 달라진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 고백을 전제한다.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회심 과정을 회중들 앞에서 세세히 증언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산헤드린의 종교재판권을 행사하던 당시의 유대 지도층이 과연 어떤 속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바울 자신이 얼마나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려 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간증이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는 행위가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빛 가운데서 근본적 회심이 가능하다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전도적 선언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특히 이 본문에서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온 이후 겪은 환상을 강조한다.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이들은 네 증언을 듣지 않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이 장면에서 예루살렘에서의 복음 전파가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가장 선호되는 선교지이자, 자신의 동족과 과거 동료들에게 새로운 길을 알리고 싶은 열망의 장소였다. 이때 “내가 핍박하던 예수를 이제 전하게 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고 싶었을 것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해석한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고 말씀하셨고, 그것이 유대 청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 선민사상과 충돌한다 판단하여, “이러한 놈은 살려둘 자가 없다”고 외치며 극단적 반응을 보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역사적 야만성과 종교적 편협이 결합된 대표적 사례임을 지적한다. 결국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언급해, 불법적 고문이나 채찍질을 면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세속 제국의 법이 종교적 극단주의로부터 바울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점이 두드러진다고 해설한다.

2. 바울의 간증과 선택 교리에 대한 장재형 목사의 해설

장재형 목사는 본문에 나타난 바울의 간증을 중심으로, 선택 교리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풍부하게 풀어낸다. 본문에서 바울은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경험한 극적인 회심을 생생히 증언한다. 과거 그는 열정적인 종교인이었으나, 그 열정이 자신의 백성과 전통을 지키고 확장하기 위한 폭력으로 나타났다. 예루살렘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공문을 받아 “이 도”에 속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며, 심지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데 관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큰 빛”과 음성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되었고, 3일간의 실명과 내적 고뇌의 시간을 통해 과거의 죄악된 행위를 돌이키고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 선택과 부르심을 결코 자신이 자의적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것임을 끊임없이 강조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바울은 항상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셨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다”라는 로마서 8장 말씀이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라는 요한복음 15장을 해석하면서, 자신의 회심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확립한다. 바울의 회심은 그 자신의 내적 성찰과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과 은총을 통하여 이루어진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라는 바울의 선언을 다시 인용한다.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수많은 크리스천을 감옥에 가두려 했던 바울이야말로 당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가장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바로 그를 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적인 기준이나 도덕적 자격을 뛰어넘는 은총을 보여 준다고 해설한다. 아나니아 역시 바울을 만나라는 주님의 지시를 들었을 때 망설였으나, “내가 택한 그릇”이라는 명령적 선포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우리의 성품이 아무리 악하고, 과거에 어떠한 죄를 범했든지 간에, 주님이 택하시면 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복음의 본질적 메시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선택이 왜 바울의 ‘자발적’인 부분과 결합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회심 후에 곧장 기도하며, 금식 상태에서 3일을 보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기간은 단순한 육체적 불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며, 앞으로의 삶을 내어드리는 전적인 복종의 시간이 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주여?”라는 물음은 선택받은 자가 취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응답이며,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셈이다. 장재형 목사는 회심이 곧 순종으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한다. 인간적인 노력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선택받은 자에게는 거룩한 책임과 새로운 정체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자기 자신을 증언할 때 일관되게 “나는 죄인이요, 예수를 핍박했던 자”라는 점을 되짚는 이유가, 바로 이 ‘은혜의 선택’을 부각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선택이 교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감사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도 세상적 자랑거리와 경력, 그리고 율법적 자부심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다. 이는 과거 자신의 지위나 학문적 명성, 열심 따위로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최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라고 해설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행 22장에서 간증하는 다메섹 도상 체험이며, 그 뒤 아나니아의 안내로 받은 세례와 눈의 회복이었다고 장재형 목사는 풀어낸다.

정리하자면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간증이 단순히 한 개인의 회심사가 아니라, 선택과 은혜가 어떻게 역사를 바꾸는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말한다. 한때 복음의 최대 박해자였던 바울이 가장 강력한 복음 전도자가 되는 과정은, 성령께서 어떻게 사람을 부르시고 변화시키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바울의 회심은 철저히 유대교적 소속감과 국수주의적 신앙 체계를 가진 사람이 이방인의 사도로 돌변하는 극적 반전을 이룬다. 이는 장재형 목사가 누차 강조하듯,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 사람을 얼마나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복음의 보편성을 세상에 알려 나가는 도구로 쓰이게 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는 결코 바울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복음의 능력이라는 점을 장재형 목사는 힘주어 말한다.

3. 예루살렘 갈등, 이방인 포용, 그리고 복음의 보편성

장재형 목사는 행 22장의 후반부에서 폭발적으로 분노하는 유대 군중의 모습을 통해,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역설적 메시지를 발견한다.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라는 바울의 말이 나온 순간, 이들은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외친다. 이는 단지 이방인과의 교제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범위를 한 민족·한 종교 공동체 안에만 가두어 두려는 독선이 얼마나 깊은 반감을 드러내는지를 보여 준다. 장재형 목사는 그들의 분노가 ‘열심’의 반대 급부이기도 하다고 해설한다. 그토록 선민의식을 지키고, 율법을 최우선으로 하며, 모세의 전통을 수호해온 이들에게, 이방인도 동일하게 은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거부할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무리의 손에 붙잡혀 곤욕을 치르던 바울을 지켜 준 것은 로마 제국의 법적 질서였다. 천부장은 바울의 로마 시민권을 확인한 후, 합당한 신문 절차 없이 채찍질할 수 없음을 알고 두려워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누가 문명이고 누가 야만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당대 가장 세련된 법 체계와 제도적 틀을 갖춘 로마가 정작 ‘이단’으로 몰린 복음 전도자를 보호해 주었고, 반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던 유대인들은 편협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인간 제도나 민족적 배경이 자동으로 참된 신앙이나 진리를 보증하지 못함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더욱이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던 이들 안에서, 이미 선민사상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버린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장재형 목사는 지적한다.

장재형 목사는 본문과 관련하여, 교회가 ‘새로운 백성’을 지향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신학적 구도에서 설명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택하신 목적은, 그들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을 복 주고자 하심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구별됨을 이웃을 섬기고 진리를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기보다, 자기 보존과 종교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근거로 삼기 쉬웠다. 이러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 행 22장 후반부의 집단적 폭력과 분노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민족·언어·계층의 장벽을 뛰어넘는 보편적 성격을 지닌다. 바울이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고 밝혔을 때 로마 당국자가 그를 보호하려 한 사건은, “복음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심지어 로마 제국의 체제 안에 있든지 간에 모두에게 열린 기회”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결국 이 법적 보호를 등에 업고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되며, 나중에는 황제 앞에서까지 자기 사명을 증언하는 과정을 뒤이은 본문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 어떤 갈등이나 반발이 있어도 복음이 마침내 ‘땅끝까지’ 전파된다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예언을 이루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뜻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가 제국의 제도, 군대, 행정 시스템 등을 역설적으로 사용하여 복음 전파를 추진하신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문에 장재형 목사는 복음 전파에 있어 ‘세속 권력’ 자체를 절대 선으로 바라보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때로 그 권력의 구조를 통로로 삼아 택한 자들을 보호하고, 또 복음이 더 넓은 지역으로 퍼지게 하신다는 사실을 교회가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이 본문을 대할 때, 무엇보다도 예루살렘 군중 안에 있는 폭력성과 편협함을 남의 이야기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고 권면한다. 현대에도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배타주의, 민족 우월주의, 교파 중심주의가 교회 안팎에서 갈등을 일으키고 있고, 심지어 복음 자체를 왜곡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울이 받은 부르심, 즉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실제로 선교 역사의 원점이라 할 수 있으며, 교회가 계속해서 추구해야 하는 보편적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장재형 목사는 역설한다. 유대 성전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는 복음은, “누구든지 이 복음을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라는 약속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여정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이 바울이었고, 그 바울을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장재형 목사는 정리한다.

종합하자면, 장재형 목사가 행 22장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종교적 열심과 율법적 엄격함이 곧 참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둘째, 바울의 극적인 회심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과 은혜의 표본이며, 누구도 자신의 경력이나 공로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셋째,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문화에 국한되지 않고, 이방인까지 포용하는 보편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분노한 군중이 이를 거부했을 때, 오히려 로마 체제가 바울을 보호했다는 역설은, 하나님의 섭리가 정치·사회·역사 구조까지도 뒤흔들며 복음을 완수하게 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확인시킨다. 결국 행 22장을 읽는 독자들은 “우리 안에 숨은 편협함은 없는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고민을 지속적으로 일깨움으로써, 교회가 “새로운 백성”으로 거듭나는 데 필요한 성찰과 순종을 요청한다. 이런 맥락에서 행 22장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할 소명을 새롭게 자각하게 하는 본문이라고 장재형 목사는 결론지으며, 오늘날에도 해당 본문이 갖는 의의가 결코 작지 않음을 강조한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 – 장재형(장다윗)목사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라고 선포한다. 이는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몸으로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해석하며, 교회가 다양한모습과 문화를 품고 있을지라도 그 근원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몸이 하나라는선언은 단순히 조직이나 제도상의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적·실질적으로 “연합”된다는본질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됨의 기초”

이 연합은 외적인 형태나 특정 공동체만의 색깔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바울은 “성령이 하나”임을강조함으로써, 교회 내 모든 성도의 궁극적 출발점이 어디인지 분명히 한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자체가 성령께서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끄시고 그분의 몸 안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뜻한다. 그결과,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독점하거나 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고, 한 몸 안에서 함께성장하는 동등한 지체라는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는 이 개념이 다양성의 무시나 획일적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설명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은사와 사역을 조화롭게 엮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다양한 지체가 있다”고 언급한 사상과도상통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각자의 위치와 사명을 온전히 인정받고, 서로경쟁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함으로써 진정한 하나 됨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4장 4~6절을 보면 몸·성령·소망·주·믿음·세례·하나님 등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가 제시된다. 몸이하나, 성령이 하나, 소망이 하나, 주가 하나, 믿음이 하나, 세례가 하나, 하나님이 하나. 바울은 이를 통해 교회가분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렇게분명한 기초를 제시했음에도, 교회는 여러 사소한 문제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분열을 반복해 왔다”고지적하면서, 오직 복음의 근본을 붙드는 것만이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위험 요소 중 하나는 세속화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각종문화적·사상적 흐름이 교회에도 파급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열정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세속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겼다. 장재형 목사는 “세속화신학”이 모두 그르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관점”을 긍정적으로수용하되,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자기 배타적 형태를 취해도 문제가 된다. 특정 교단이나 신앙 전통만이 완전하고옳다고 주장할 때, 복음의 본질과 하나 됨의 정신은 무시되고 외형적 기준만을 내세우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그러한 편협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에베소서 4장에 제시된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를날마다 되새길 것을 권면한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역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임하는 데 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작이자 마침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교회는그 방향을 더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교회 안의 화합을 위해서만이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칼과 창이 낫과 보습으로 바뀌는 진정한평화와 회복은 이 땅의 어떠한 제도나 인간적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을하나로 묶고 세상으로 흩어 보낼 때, 그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동시에 복음 전파와 봉사를 통해 세상에 소금을 뿌리고 빛을 비추는‘파송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세상속으로 나가 그 은혜를 나누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하나 됨의 이유가 교회 외부로 확장되는선교적 목적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점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담긴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며, 소망이 하나이고, 주·믿음·세례·하나님이모두 하나이시다”라는 일곱 가지 선언을 붙드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됨을 온전히 이루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질적 진리 위에교회가 다시 서면, 아무리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복음의 힘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2. “은혜와 선물의 신비—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본질”

에베소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밝혀낸다.

이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 수 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한 품꾼도, 오후 늦게 불려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품꾼도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 이 장면에서 오래일한 이들은 불평하지만, 주인은 “내가 너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준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받아 버리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설명하신것이다.

포도원 주인에 해당하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선한 공로도 쌓을 수 없었던 죄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을베푸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대반전”이며, 구원을 자격으로 환산하려는 인간의 모든오만한 시도를 일거에 부정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의 결과’로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일방적호의를 의미한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값을 치르지 않는다. 오직 베푸는 이의 호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뿐이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뿐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역시 이를 잘 그려낸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방탕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조건 없이 환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오기만하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이런 은혜를 모르는 이들이나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도 그 은혜 안에머무름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야말로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할 때 감사와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역설한다. 교회가 만약 이 은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가 행했으므로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정죄와 배제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복음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죄인을 향한 자비와 구원의 초청장을준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복음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이유도,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배타적인 클럽이 되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포장하며 세상을재단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교회의 하나 됨도 마찬가지로 이 은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값없이 받은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더 낫다”는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서로를 존중하게 될 때,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역사를 실제로 누리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접착제 역할을 하는 한 몸의 공동체가 교회”라고가르치며, 은혜의 신비가 사라지면 곧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고 덧붙인다.

이렇듯 은혜에 대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영혼들조차도 함께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커진다.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기억한다면, 교회 안에는 결코 서열이나 차별이 자랄 자리가 없다.

3.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은사의 목적과 직분”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시편 68편을 인용하여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을 언급한다. 이는 구약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수가 전리품을 얻게 되고, 그것을 나누어 갖는 장면에서 따온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걸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낮아지시고(성육신과 고난), 죽음을 통해 승리하신(부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사 교회에게 은사를‘전리품’처럼 분배하셨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사역이 곧 주님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강조하며, 하나님이 교회에 은사를 주심은 인간적 자격과 능력에 근거한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이 은사의 다양성을 잘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는 은사들이 다채롭게 언급되는데, 이러한다양성은 교회 안에서 상호 보완을 통해 더 큰 통일성을 이룬다. 장재형 목사는 “은사의 목표는 교회를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섯 가지 대표 직분을 언급한다. (일부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묶어 네 가지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을반영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늘날 교회도 이 다섯 직분이 제시하는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사도는개척하고 파송되는 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는 곳곳에 복음을 퍼뜨리는자, 목사는 양을 돌보는 자,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각각 지칭한다.

이 직분들 중 어느 것도 우열이 없으며, 모두가 귀하다.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바울은 “몸의 다양한 지체”에 비유했다. 눈과 손, 발, 귀 등 각 지체가 서로 다른기능을 담당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으로서의 활동이 제한된다.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획일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통해 풍성한 하모니를 이룬다는 데 진정한아름다움이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주신 목적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우려 하심이라”고 요약한다. 이를 조금 더 풀면 첫째,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교회의몫이다.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가 지닌 “꿰매고 교정한다”는 의미처럼, 교회는 죄와 아픔으로 갈라진 영혼들을보살피고 수선하는 작업에 부름받았다. 둘째, 그 회복된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도록준비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교육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돌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활동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견고히 세우는데 있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파송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은사를 제대로 발견하고 활용하도록 돕는 일이 교회 리더십의 핵심 과제”라고 말한다. 은사는 때로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성도가 “내 은사가 더영적이다”라며 우월감을 갖거나,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은사가 없으니 쓸모없다”고 낙담하면, 교회는 건강한기능을 잃고 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눈이 손에게, 손이 발에게 우열을 논할 수 없음을 언급한 이유가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서 각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개인의 명성과자부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은사를 나누고 협력하는 교회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존중과 겸손”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대형교회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는, 주목받기 쉬운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 간의 간극이 크게 벌어질 수있다. 그러나 서비스팀, 행정팀, 재정팀, 주차 안내 봉사, 각종 돌봄 사역 등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들의헌신 없이는, 결코 교회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서로 다른 은사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함께협력할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은사가 다양해도, 그 목적과 방향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 온전한 통일성을이룰 수 있다. 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야말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하는 교회론적 핵심이다.

4. “교회의 참된 사명—세상 속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방향성을 논할 때 자주 “In and Ou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교회가 모이는 것(In)과흩어지는 것(Out)의 두 가지 축을 균형 있게 잡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내부적으로 뜨거운 예배 공동체가 되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전했다. 교회가 이 두 측면 중 어느 한 쪽만 강조해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직 안에만 머문다면 세속과단절된 종교 집단이 되고, 밖으로만 나간다면 영적 교제와 예배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세속화 신학’이 대두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활발해졌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도 같은 시기에 부각되었다. 이는 선교가 교회의 전략이나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사역을 펼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그저‘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아 동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서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리스도께서이미 만물을 통일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어느 민족이나 문화 안에서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급변하고 있는 지금, 교회가 더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지역 안에 공존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도발생하지만, 동시에 복음 전파의 기회도 열린다. 교회가 만약 지역과 민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은혜와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는 곧 에베소서 1장10절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우주적그리스도론과 결을 같이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종종 교회 사명 하면 전도와 예배만을 떠올리기쉽지만,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낙은애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초대 교회도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약자들을 보살폈다. 장재형 목사는 “수직적 영성(예배와 기도)만 강조하면 세상과 분리된 종교 생활로 전락하기 쉽고, 수평적사랑(사회적 봉사)만 강조하면 영적 뿌리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두 축을 균형 있게붙들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공동체다. 교회가 서로 하나 되고, 각자의 은사를 최대한발휘하여 상호 보완하고, 동시에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긴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체험하게 된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희락이라”고 했던 말처럼, 교회는 이 세 가치(의·평강·희락)를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증인이다.

장재형 목사는 가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세속적 표현을 빌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세상 구조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앞에서 해체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종말론적 확신을 자주전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거나 더디게 느껴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고 있고 또 결국 완성에 이를것이다. 교회는 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조금씩 펼쳐 보이는 모델 하우스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교회가 은혜에 기초하고, 다양성 속 통일성을 추구하며, 세상으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의 몸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 됨과 거룩함을 교회 안에만 가두지 않고, 세상속에 해방과 치유와 축복의 통로로 가져가는 것이 참된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때때로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에베소서 4장의 교훈, 즉 통일성과 다양성, 은혜와 선물, 그리고 파송된 공동체라는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다시금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결국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전초 기지이다. 값없이 받은 은혜로하나 되어,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아픈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초대받은 품꾼들이며, 결코 자격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은혜 덕분에 자리를 얻은사람들이다.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엿보고, 장차 완전하게임할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적 순환이 멈추지 않을 때, 닭의 모가지를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