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진노와 구원의 필요성 – 장재형목사

Ⅰ.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불경건·불의

로마서 1장 18-19절 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서의 본론을 시작하며 제시하는, 인간이 처한 죄의 현실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다루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여러 설교와 강해를 통해 이 본문이 로마서 전체의 구조와 구원론을 이해하는 중요한 기반임을 강조해 왔다. 사실 로마서를 읽다 보면, 복음이 선포되는 순서는 ‘죄’가 먼저 등장하고, 그다음에 ‘구원’이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이는 단순한 구조적 특징이 아니라,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실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살고 있던 수많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편지를 써 내려갔는데, 이 로마라는 도시는 당대에 문명과 세속적 번영의 상징이자 인간의 죄가 가장 부패한 양상으로 드러나고 있던 대표적 장소이기도 했다. 로마인들 역시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려한 문명과 지혜, 군사력, 부를 자랑삼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무슨 죄가 있는가? 이 찬란한 로마가 무얼 잘못했길래 굳이 구원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는 자세로 바울의 메시지를 의아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지를 말하기 위해, 먼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존재인지를 매우 논리적으로 펼쳐 보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8-19절 강해에서, 특히 18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죄의 결과이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 상태를 보여주는 말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진노”란 표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신의 분노나, 인간적 감정의 투영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하나님은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진노는 단순한 감정 폭발이 아니라, 거룩과 의로움에 기초하여 죄를 심판하시는 정당한 반응이다. 하나님 앞에 “불경건과 불의” 가운데 있는 인간은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그 결과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고 에베소서 2장 3절도 말한다.

여기서 “불경건”이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위배하는 죄를 의미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예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잊고 살거나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태도를 뜻한다. 반면 “불의”는 인간 관계에서의 수평적 죄의 양상으로, 서로를 해치고 타인을 억압하며, 부정직과 위선, 탐욕 등으로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8절에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지목하며, 이들은 의도적으로 진리를 가로막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억누르려 하거나, 자신들 안에 있는 본능적·양심적 하나님 인식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대부분의 사람은 죄의 문제를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시인한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와 수치를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므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왜 내가 죄인이냐”며 반발한다. 그렇기에 복음을 전할 때 ‘구원’이라는 용어가 주는 깊은 의미와 기쁨을 알려주려 해도, 먼저 “왜 구원이 필요한지”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으면 상대는 ‘나는 구원 같은 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에 대해 바울은 죄론을 자세히 전개하며, 인간의 실존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차근차근 파헤친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는 로마서 1장18절은, 죄가 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지 그 이유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구절들(1장 19-32절)을 통해 점차 죄의 본질과 결과를 설명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분석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저지르는 불경건과 불의가 결국 자기 파멸로 가는 길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점을 짚는다. 마치 사람이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때로는 진노하고 책망하여 바로잡으려 하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거룩의 불꽃이요 사랑의 경고이기도 하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말하지만, 그 사랑은 결코 인간이 죄를 지속적으로 저지르며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형태의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과 분리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 관계를 파괴하는 죄에 대해서는 응당한 심판과 진노가 뒤따르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 점을 자주 인용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시며, 단순히 철학적 개념의 ‘무감정적 신’이 아니라고 말이다. 고대 헬라의 철학적 신 개념은 전지전능하고 냉철한 본질로서, 인간적 감정과는 아예 무관한 존재로 그려진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이시며,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탄식하시고 격분하시기도 하신다. 예레미야와 호세아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인간을 향한 질투, 슬픔, 분노가 혼재되어 나타난다. 이는 절대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시기 때문이며, 이 사랑의 관계가 깨질 때 “진노”하시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사랑의 본성에서 나오는 필연적 반응이다.

“불경건과 불의”로 묶이는 인간의 죄는, 십계명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죄로 요약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이 진보하고 과학 문명이 발전해도,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참된 선과 의를 실현하기가 불가능하다. 심지어 로마 제국처럼 강력한 법 체계를 지니고, 스토아 철학이나 에픽쿠로스 학파 등 여러 윤리적·철학적 전통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경건과 불의는 극단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타락한 인간은 철학적 지식이나 도덕적 훈련만으로 근본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죄가 단지 개인적 일탈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데서 비롯된 실존적 타락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어서 이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표현이 인간의 죄가 누적되어 정점에 이를 때,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임하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많은 기회를 주시지만, 결국은 공의롭게 죄를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거룩과 정의를 드러내신다. 구약에서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 등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결코 공허한 경고가 아님을 입증해준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 심판의 경고나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등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진노를 잘 보여준다.

이 “진노”라는 개념을 우리 시대 일부 신앙인들은 불편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다가 왜곡시킬 때가 있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노가 없다면, 사실상 하나님의 사랑도 공허한 개념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시고, 죄가 인간에게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죄를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것을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자주 비유한다. 자녀가 위험한 길로 가고 있는데, 부모가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전혀 징계나 책망을 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그 아이에게 영원한 해가 닥쳐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역시 죄로 인해 멸망 가운데 떨어진 인간을 향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고, 돌이킬 기회를 허락하시며, 결국 죄의 결과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이다.

바울이 말하는 ‘이방인의 죄’는 곧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의 죄를 총칭하지만, 그중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불경건”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즉 수직적 관계의 파괴가 곧 수평적 관계의 파괴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회적 불의, 전쟁, 폭력, 착취, 성적 타락 등은 궁극적으로 ‘불경건’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는 삶, 혹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이 모든 악행의 뿌리가 된다. 로마서 1장 후반부를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긴커녕 우상에게 절을 하고, 거짓된 이미지와 이념에 헌신하며, 자기 욕망을 우상화한 결과로 온갖 죄악과 부패가 만연해진다.

장재형 목사는 이런 맥락에서, 죄가 드러나는 것을 교회나 성도들이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죄를 직면하고 드러낼 때에만, 비로소 죄에서 돌아설 기회와 구원받을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죄가 숨겨지면, 결국 그것이 곪아서 더 심각한 병으로 발전한다. 한 개인도 그렇고, 한 나라나 사회도 그렇다. 죄를 애매하게 덮는 것은 사랑의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죄의 뿌리를 더 깊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방치하지 않으시며, 때가 되면 반드시 진노로 심판하실 것을 성경 전반에서 거듭해서 알려주신다.

이러한 죄론은 로마서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간략히 구분하면, 바울은 첫째 1장 18-32절에서 이방인의 죄를 말하고, 둘째 2장 1절-3장 8절에서 유대인의 죄를 고발하며, 셋째 3장 9-20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음을 선언한다. 요약하자면, 이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바울의 결론이다(롬 3:10).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에서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 됨을 강조하기 위한 전제 논증으로, 바울은 죄의 보편성을 철저히 파헤쳐 놓는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진노”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진노를 경험하지만, 인간의 분노는 대개 죄된 감정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형태이다. 반면 하나님의 진노는 죄를 향한 공의로운 정죄이며, 인간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방책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로마서가 시작부터 죄와 진노를 다루는 근본 이유라고 설명한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진노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만,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18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결코 가볍게 지나칠 부분이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 본론을 시작하며 제시하는 핵심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이 하나님의 진노이며, 이것이 인간의 불경건과 불의, 곧 죄를 향해 임한다는 것이다. 로마시대에도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했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하기를 꺼렸다. 현대인 역시 과학과 기술, 경제 발전 등을 자랑하며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느냐?”고 되묻는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의 필요성 역시 절대 절감하지 못한다. 따라서 장재형 목사는 이 로마서 1장 18절 말씀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바울의 선포가 현대에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러한 진노의 배경에는, 사람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다”는 구체적인 죄가 놓여 있다. 진리가 선포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환영하기보다 되려 적대시할 때가 많다. 진리가 빛을 비출수록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므로, 죄를 사랑하는 자들은 진리가 전해지는 입을 틀어막으려 든다. 교회 역사를 보아도, 복음이 전파될 때 그것을 탄압하는 세력은 항상 있어 왔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막히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과 믿음의 증인들이 계속해서 복음을 외치고, 교회는 여러 핍박 속에서도 진리를 지켜내며 확장되어 왔다. 이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라는 성경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한편, 바울이 전했던 하나님의 진노 메시지는 결코 사람들을 위협하거나 죄책감에만 사로잡히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궁극적으로는 ‘죄에서 돌아서라’, ‘하나님께로 나오라’는 초대의 성격이 더 강하다. 인간이 죄를 깨닫지 못하면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기에, 바울은 가차 없이 죄를 지적한다. 교회가 죄의 지적을 회피하거나 적당히 넘어가면,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게 된다. 구원 또한 당연히 개인에게 절실하지 않게 되고, 복음은 ‘좋은 말’ 이상의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과 초대교회는 철저한 죄 인식을 강조했고,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유효하다고 장재형 목사는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장 18절에 명시된 “하나님의 진노”는 그 자체로 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처한 죄의 실상과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를 직면해야 한다. 이것을 외면하면, 결국 복음의 능력과 은혜 또한 절실히 깨달을 길이 없다. 구원은 죄에서의 구원이고,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

이처럼 “경건치 않음과 불의”가 불러온 “하나님의 진노”는,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본질적 문제이다. 죄의 문제 앞에, 죄로 인해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인간은 비로소 회개와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로마의 화려한 문화와 성공, 번영도 이 문제를 덮을 수 없었고, 오늘날 어떤 세속적 안정과 풍요도 죄와 진노의 문제를 가볍게 할 수 없다. 이것이 바울이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 실존의 절박함이며, 동시에 복음이 필요한 이유다.

Ⅱ.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과 구원의 필요성

로마서 1장 19절은 이러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내용에 이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라고 말한다. 놀랍게도 바울은 불신자, 곧 아직 예수를 모르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어떤 불가분의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불경건과 불의 가운데 있으나, 여전히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인식하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이 구절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으며, 설령 죄로 타락했어도 완전히 망가진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물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의 파편이라 할 수 있는 이성, 자유의지, 도덕적 감각, 종교적 본성 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인류 역사 전반에 걸쳐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탐색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바울은 “알 만한 것”을 두 가지 차원에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첫째, ‘피조세계’를 통한 일반계시 차원이다. 로마서 1장 20절에서도 이어지는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과 우주, 세상의 질서를 통해 그분의 신성과 능력을 어느 정도는 인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시사철 바뀌는 계절, 질서 정연한 자연의 이치, 태양과 별의 운행, 생명의 경이로움 등은 우연이나 혼돈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주의 섭리와 계획 아래 움직이는 것임을 직관적으로 알려준다. 많은 철학자나 과학자들조차, 우주가 무질서한 혼돈이 아니라 정교한 질서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절대자를 인정하기도 한다.

둘째, ‘인간 내면’의 양심과 이성 차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선과 악을 구분하며,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으려는 움직임 등을 통해 이미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살면서 근본적인 물음,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에 부딪힌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영적 공허, 불안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을 알 때만이 해갈될 수 있는 이 목마름이, 바로 인간 영혼에 새겨진 ‘하나님을 향한 본능적 갈망’이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처럼, “하나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인간의 영혼이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여 계속 이어져 내려온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않았다”(롬 1:21)고 이어서 말한다. 즉 하나님을 알 만한 증거와 내면의 소리가 있음에도, 인간은 죄로 인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배척한다. 혹은 하나님을 우상으로 대체하고, 진리보다 거짓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하다. 그 결과, 불경건과 불의는 더욱 가속화된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배척함으로 생겨나는 결과를 “불안, 고독, 허무, 절망” 등으로 요약한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세속적 욕망으로 일시적 만족을 얻으려 해도 근본적 허무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엄습하는 고독감, 미래에 대한 불투명함에서 생겨나는 절망감 등은, 결국 인간 영혼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상태”를 스스로 고통스럽게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불신자들도 깊은 고뇌의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신’ 혹은 ‘절대자’를 찾게 된다.

하지만 진리는 분명하다. 인간은 어떠한 도덕 수련이나 철학적 사유로만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찾도록 돕는 도구일 수는 있지만, 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은 불가능하다. 이는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강조하는 메시지다. 죄는 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것이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이 주어진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 은혜에 참여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로마서의 핵심 구원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내면에 있으나, 그 불씨만으로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복음이 필요하다. 장재형 목사는 죄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 그리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역설한다. 예수님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고 외치셨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고 초대하셨다. 이런 예수님의 초대는 종교 의식이나 공로 조건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문제는 종교조차도 때로는 ‘장사꾼’ 역할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곤 한다는 점이다. 구원의 조건을 규정하고, 여러 행위나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마치 인간이 스스로 어떤 자격을 갖춰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낳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따르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서도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비유한 예수님의 가르침(누가복음15장 탕자의 비유)을 강조한다. 탕자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겠다”는 마음만 먹었을 때, 그가 무슨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던 게 아니다. 아버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와 그의 죄를 용서해주고,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 과정에서는 어떤 복잡한 절차나 대가가 개입되지 않았다. 그냥 돌아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죄책감이나 교만, 또는 세상의 왜곡된 종교관 때문인지, 자기가 뭔가를 더 준비해야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듯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이미 인간 안에 있는 상태에서,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먼저 인간을 찾아오셔서 돌아오기를 촉구하신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그 즉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죄 사함과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처럼 우리 영혼이 하나님 없이는 갈급하고 불안하고 허무하다는 것은, 인간 존재가 하나님께 속했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표현이다. 어떤 세속적 성취나 오락거리도 이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주지 못한다. 고대 로마의 지식인들, 예컨대 세네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같은 철학자들도 인생의 의미를 찾는 데 몰두했고, 스토아 철학으로 내면의 평안을 추구했지만, 결국 죄 문제 자체를 해결할 길은 없었다. 바울은 이들에게, 진정한 해답은 하나님께 있음을 강력히 피력한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는 구절을 두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코 인간을 모르쇠로 방치하는 데 있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고 계신다. 자연을 통해, 양심을 통해, 역사를 통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보여주셨다. 문제는 인간이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달려 있다.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그 불경건과 불의를 책망하시고, 결국 진노로 심판하신다(롬 1:18).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회복된 관계인 ‘화목’이 이뤄진다(롬 5장). 화목은 곧 구원이며, 거듭난 인생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상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죄로 깨진 관계가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는, “죄가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께 돌이킬 때,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된 나 자신을 되찾는다”고 설교한다.

이는 단순히 종교적 소속을 바꾸거나 예배 형식을 갖추는 차원이 아니라,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온전해질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출발한다. 어거스틴의 유명한 말, “하나님 안에 안식하기 전에는 내 영혼이 참된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는 고백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인간 실존의 본질을 관통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었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진정한 평안과 기쁨, 사랑,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온갖 대체물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다고 유혹한다. 돈, 권력, 명예, 쾌락, 온갖 우상적 대상들이“이것이 너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말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일시적 만족과 더 큰 갈증을 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영혼의 방황을 지속한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한다는 것,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본래의 나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는 특정 종교에 입문하거나 제도권에 소속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본래 누구이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깨닫는 과정이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지니고 있기에, 언제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세상 어느 지역, 어느 문화권에서든 인류는 끊임없이 신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종종 왜곡되거나, 우상 숭배로 흐르거나,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낸 신 개념에 갇히기도 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당신들이 지금 섬기는 무수한 우상이나 철학의 신, 제국 신격화가 아니라,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외치는 것이다.

결국, 로마서 1장 19절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는 선언을 통해, 인간 내면의 종교적·영적 본질을 확인시켜 준다. 동시에 1장 18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진노”와 나란히 제시되어, 인간의 이중적 실존을 보여준다. 즉, 한편으로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향하는 갈망과 양심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로 인해 하나님을 거부하는 반발심이 함께 존재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원죄와 하나님의 형상’의 혼재라고 볼 수도 있다.

장재형 목사는 설교에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를 책망하되,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가능성을 믿어 주는 시선”이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무작정 “당신들은 지옥 갈 죄인”이라고만 말하면, 그들은 귀를 닫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보여준 것처럼, 죄를 정확히 지적하되, 그 이유는 결국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소중한 능력이 있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변화될 수 있다”는 소망을 함께 전하기 위함이다. 인간에게 죄가 있지만 동시에 구원에 이를 가능성도 열려 있다. 그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길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의 본질은, 인간이 어떤 자격을 갖출 필요가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구주로 영접할 때, 죄 사함과 영생이 주어진다. 탕자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듯, 죄인 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우리를 참된 아들·딸로 회복시키신다. 로마서는 이후에 이 구원론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칭의와 성화,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의 단계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항상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마음이다.

한편, 이를 전하는 교회의 사명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교회 역시 무수한 유혹과 세속화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교회 안에서조차“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왜곡되는 일이 벌어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진리로 빛을 비추어야 할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이면, 결국 복음의 순수성과 능력을 잃고,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막아버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복음이 지닌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인 은혜를 전하는 대신, 인간적 자랑이나 행위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면, 영혼들이 참 자유를 경험하기 어렵다.

따라서 교회와 성도는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2장에서 “유대인인 네가 이방인을 판단하느냐? 너희도 똑같다”고 선언하듯이,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스스로 죄에 빠져 있다면 위선이 된다. 교회 공동체가 진리를 막는 일, 즉 불경건과 불의에 빠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죄를 적당히 눈감아 주거나, 죄를 지적할 때 사랑 없이 정죄만을 하는 극단적 태도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죄를 밝혀 회개로 인도하고, 궁극적으로는 용서와 구원의 길을 열어주는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장 19절은, 결국 “인간이 마음만 열면 언제든 하나님을 인식하고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바울은 1장 후반부에서 이 희망을 버리고 계속해서 죄를 즐기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셨다”는 표현을 쓴다(롬 1:24, 26, 28). 인간이 끝까지 거부하니, 하나님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시되, 그 결과가 어떠한 파멸을 가져오는지 결국 당사자 스스로가 맛보도록 허용하신다는 뜻이다.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스스로 욕망에 따라 사는 길을 택하면, 파멸의 책임도 자신이 지게 된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인가? 그 답을 로마서 3장 이후에 바울이 밝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벗어나 영생의 길에 들어가는 길이 제시된다. 이 복음이 바로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16). 로마서 1장 18-19절의 무거운 죄론과 진노 선언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의 영광스러운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죄가 크고 인간이 절망적일수록,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더 분명해지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명확하게 정리한다. 일반계시나 양심의 기능만으로는 죄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본능”을 주셨다는 사실은, 복음이 선포될 때 영혼이 그 음성에 반응할 수 있는 영적 토양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는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으며, 그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분출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로마서 1장 18절과 19절은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하나님 인식의 가능성을 나란히 보여주는 말씀이자, 인간이 왜 구원받아야 하고,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지에 대한 서론을 제공한다. “불경건과 불의”로 요약되는 죄 때문에 인간은 진노 아래 놓여 있으나, 동시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마음만 돌이켜 복음을 받아들이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전체에서 전개하는 복음의 정수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원한 진리이다.

우리는 각자 어느 누구도 “나는 죄와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자가 없음을 성경을 통해 배운다. 그러나 그 무게감 속에서도 희망을 갖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존재 깊숙이 당신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심어 놓으셨고, 그 길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완전하게 열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참된 나 자신을 찾아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으로써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올바르게 붙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복음은 오직 죄 아래 있는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인간이 죄를 깨닫는 길은 이미 하나님이 내면에 심어두신 갈망과 자연계시를 통해 가능해진다”고 거듭 강조한다. 복음이 선포될 때,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아, 내가 늘 갈급했던 바로 그것이구나” 하고 인식하거나, 혹은 마음속에 숨어 있던 죄책감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회개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돌이킴’과 ‘주님께 나아옴’이야말로 로마서가 말하는 구원의 출발점이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인간이 하나님을 등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손길을 거두지 않으시며, 다만 인간이 그 손길을 뿌리칠 때, 죄에 대한 진노를 면할 수 없음을 천명한다. 바울의 시대 로마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과학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도, 내면 깊은 곳의 불안과 허무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내재되어 있으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데서 오는 필연적 결과다.

그러나 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마음을 열면, 더 이상 죄의 노예로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는 길이 열려 있다. 교회는 이 사실을 전해야 하고, 세상은 이를 거부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복음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에게는 죄 사함과 영생이 약속되고,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이 로마서 전체가 말하는 구원의 논리다.

이렇게 보면, 로마서 1장 18-19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 문제는 단지 바울 시대나 특정 지역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죄가 있는 한, 이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동시에 복음의 답변도 계속된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찾도록 창조되었고, 그 갈망을 죄가 가려버려서 스스로 길을 잃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다시 열어 두셨다. 교회와 성도는 바로 이 길을 세상에 소개하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장재형 목사가 이 본문을 강해할 때마다 핵심적으로 던지는 질문은 “당신은 참된 자신을 회복하였는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죄를 인정하고 돌이켜 구원의 은혜를 붙들 것인가?”이다. 이는 로마서가 주는 매우 직접적이고도 개인적인 도전이기도 하다. 복음은 단순 지식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 안에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더는 죄를 핑계 삼거나 회피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돌아가야 한다. 이때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를 멸망으로 몰고 가는 공포가 아니라, 죄로부터 돌아오게 만드는 ‘구원의 기회’가 된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죄와 구원, 진노와 은혜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결코 참 자아도, 참된 평화도 찾을 수 없는 존재이다. 동시에 인간은 하나님을 외면할 때, 죄 가운데 머무를 수밖에 없고, 그 죄로 인해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불가피하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이며, 복음이야말로 죄 사함과 영생, 하나님과 화목되는 길이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이 메시지를 잃어버리지 않을 때 세상 속에서 힘있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임을 전제해야, 죄를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회복을 믿고 기다릴 수 있다. 또 “하나님의 진노”를 전제해야, 복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만일 교회가 죄나 진노를 회피해 버리면, 인간은 자기가 진정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구원 또한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반대로 인간 내면의 하나님 인식을 무시한다면, 복음 전파에 있어서 ‘상대방은 아예 희망이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다’는 식의 패배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두 구절(롬 1:18, 1:19)이 함께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죄와 진노의 심각성을 직시하면서도,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소망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당신 안에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루속히 돌이켜야 합니다”라고 권면할 수 있다. 이 권면을 듣고 마음을 열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에게, 복음은 생명과 구원의 능력이 된다.

결과적으로 로마서는 죄를 지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죄가 드러나야 구원이 임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은 1장 후반부와 2-3장에서 인간의 죄를 철저히 폭로한 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죄인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의 복음으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의로움이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의롭다 하심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가 임한다. 이것이 로마서가 펼치는 위대한 복음이다. 그리고 1장 18-19절은 바로 그 위대한 복음의 문을 열어 주는 시작점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에게 “스스로 죄를 깊이 인정하고 회개하며, 이미 내면에 주어진 하나님의 음성에 더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라”고 권면한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없이 살 수 없게 창조되었고, 그렇기에 죄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게 마련이다. 그 갈망이 결국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불씨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끝까지 그 갈망을 부정하고 진리를 막으면, 진노를 피할 수 없다. 반대로 갈망을 인정하고,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면,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된다.

이렇듯 로마서 1장 18-19절은 복음의 전말을 보여주는 서곡이다. 죄의 현실과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인간의 내면적 가능성이 교차하면서, “왜 구원이 필요한가?”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자연스레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로마서는 이 물음에 대한 최종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음”으로 제시한다. 교회와 성도는 이 답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께 돌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 길을 열어 두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그분이야말로 죄와 진노에서 벗어나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회복시키시는 유일한 길이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듯, 교회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복음의 핵심이다. 교회는 죄를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되, 정죄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동시에 전해야 한다. 또한 세상이 이미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본적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며,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복음을 제시해야 한다. 이렇게 죄와 은혜, 진노와 구원이 함께 드러날 때, 로마서가 말하는 복음은 오늘날에도 생생한 능력이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논의의 가장 핵심은, 인간이 ‘본래의 나’를 되찾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등을 지고 불화 관계에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 그분의 자녀가 되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삶의 목적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불의한 인간관계 역시 치유와 회복으로 나아갈 길이 열린다. 수직적 관계가 회복되어야 수평적 관계도 회복된다는 것이 로마서의 핵심 논리다. 불경건을 해결해야 불의의 문제들도 점차 치유된다.

결국, 로마서 1장 18-19절은 짧은 두 구절 안에 복음 신학의 중요한 전제가 다 들어 있다. 인간은 죄 가운데 있어 하나님의 진노를 면할 길이 없으나, 동시에 인간 안에는 하나님을 알 만한 씨앗이 있어 복음을 받아들일 잠재력이 존재한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과학, 철학, 예술, 사상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하지만, 참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 교회는 이 해답을 가진 공동체로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이들에게 기꺼이 은혜의 길을 안내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의 로마서 강해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점은, 인간이 처한 영적 현실이 얼마나 엄중한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돌아올 길을 열어 두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동시에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현실이지만,그분의 은혜와 구원도 현실이다. 인간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을 직시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라’는 복음의 초대에 온전히 응답해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라는 두 축을 한눈에 보여주는 본문(롬 1:18-19)은, 로마서 전체의 서론이자 복음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바울은 이를 통해 독자들을 죄의 심연으로 안내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의 문을 열어 준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가 이 본문을 심도 있게 강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죄를 인식해야 구원이 보이고,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음을 깨달아야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열리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 – 장재형(장다윗)목사

Ⅰ.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에베소서 2장의 핵심 주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에베소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한 찬송과 감사의 이유를강조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히 개인 구원을 넘어선 ‘역사의 큰 방향성’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역사의 흐름이B.C(주전)와 A.D(주후)로 구분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핵심적 사건임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역사는“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 가는 거대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며, 이것이 곧 ‘종말론적 비전’이자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 보통 ‘창조-죄-그리스도-구원’으로 요약되는 사영리(四靈理)를 가르치지만, 여기에 ‘하나님 나라’를 추가하여 ‘창조-죄-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나님의 나라’로 확장해 소개한다. 그 이유는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고 완성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십자가 대속을 통해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도 확장되고 있으며 최종적으로 완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독교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의 구원”이라는 광범위한 차원 속에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을바라보도록 이끈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찬송할 이유”가 있었다고 언급하듯,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찬양과기도가 넘치게 된다고 해설한다. 에베소서 1장은 찬송과 기도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기도가 바로 바울의 기도”라며, 특히 에베소서 1장 후반부에 나타난 바울의 기도 내용을 주목한다. 그기도는 피상적인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통치, 그리고 인간의 영적 지혜와 계시의 영을 구하는 높은 차원의 요청이다. 즉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는 표현을 통해,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심령의 각성’을 통한 하나님의 뜻 깨달음을구한다.

이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타락과 죄 문제로 시선을 옮긴다. 원래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심히 좋았다’고 평가하셨으나, 인간은 죄로 인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단절되고, 무질서와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사무엘상 15장 23절에서 사무엘이 사울에게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리셨다”고 한 말씀과 비견되는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버린 것’이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깊은 세계”라며,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범하고도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다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상 인간이 먼저 하나님을 등졌고, 그 결과로 진노 아래에 놓인 존재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은 끝이 없어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살리고자 아들을 보내셨고, “독생자를 주셨다”(요 3:16)는 복음으로 인류를 초대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대속(Redemption)’의 사건임을 특히 강조한다. ‘속량(贖良)’이라는 말이 가진 고대적 배경(노예를 돈으로 사서 자유를 선물하는 개념)처럼, 예수님이 친히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귀한 대가를 치르심으로 죄의 노예 상태에 있던 인간을 해방시켰다는 것이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창조-죄-그리스도-구원’이라는 전형적인 사영리에 이어, 성경 전체가 “결국 하나님 나라로 귀결된다”는 대전제를 제시하면서, 에베소서가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얼마나 장대하고도 명확한 것인지를 설파한다.

그 결과, 에베소서 1장의 결론은 ‘찬송’과 ‘기도’로 요약된다. 바울의 고백을 통해 보듯,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넘치는 찬양이 터져나오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 크게 깨닫고 체험하기를 구하는 ‘거룩한 기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해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처럼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인간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와 역사 구원을지향하는 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 지점이 에베소서가 가진 독특한 규모감, 즉 ‘역사와 구원’을 동시에 관통하는 서신의 특징이기도 하다.

Ⅱ. 허물과 죄, 그리고 구원의 확실성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에베소서 2장으로 넘어가면서, 2장 1절에 등장하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는 선언이지닌 극적인 반전을 강조한다.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1장 마지막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고 선언했는데, 2장에 이르러 그 통일의 과정이 얼마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선 2장 1절에서 말하는 ‘허물(παράπτωμα, 파라프토마)’과 ‘죄(ἁμαρτία, 하마르티아)’의 구분에 주목한다. 장재형목사는허물은 ‘궤도를 이탈함(fall away)’을 의미한다고 전하면서, 본래 인간이 가야 할 길(궤도)이 있음에도 그것을 벗어났다는 점을설명한다. 우주 만물은 태양을 중심으로 각자 공전 궤도를 지니고 있고, 자연계나 동식물조차도 자신에게 주어진 법칙대로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신의 창조 질서와 길을 이탈해버렸다는 것이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빗나감(missing the mark)’이라는 어원을 갖는데, 이는 과녁 중심을 맞히지 못함으로써 모든 것이 엉켜버린 상태, 곧 무질서와 혼란을 의미한다.

장재형목사는 “전에는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엡2:2)라는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단지 개인적 죄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중 권세 잡은 자(사탄)’가 지배하는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살아가는 구조적 죄악임을 시사한다고 해설한다. 즉 사람들은 죄의 존재가 하나님과 무관한, 혹은 자신들끼리의 문제로만 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 배후에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이 있으며, 그 세력이 세상 풍속(이데올로기, 문화, 가치관 등)을 좌지우지함으로써 ‘죄의 기류’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에베소 교회가 있던 에베소 도시는 거대 여신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성적 퇴폐와 우상숭배가 성행했던 곳이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들어, 당시 사람들이 “우상 숭배와 음란, 부패한 문화 속에서 그 길을 좇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을 보면,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모습’이 결코 추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매우 현실적인 문제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3절에 등장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는 표현이 로마서 1장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가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한 맥락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진노를 언급할 때,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배치되는 개념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장재형목사에 따르면,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을 버렸고, 스스로 불의와 우상숭배를 행하며, 서로를 해치는 죄악 가운데 빠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반대라기보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본질적 태도이자, 회복을 위한 ‘공의로운 심판’이다. 인간은 스스로 궤도를 이탈해 본질적으로 진노의 대상이 되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고 다시금 구원할 길을 내신다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이 말하는 반전 메시지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말미암아,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2:4-5)라는 구절에서, 장재형목사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거듭 강조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음에도 하나님이 인류를포기하지 않으셨고, 결국은 아들을 내어주는 극단적 희생을 통해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구원을얻은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우리의 행위나 공로나 의로 인해 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구원의 본질은 ‘행위 이전의 은혜’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장재형목사는 “Sola Gratia(오직 은혜)”를 언급하며, 종교개혁 시기부터 강조되어 온 ‘은혜’와 ‘믿음’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은혜가 먼저 있고,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믿음’이기에,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먼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울 역시 “그러므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엡2:9)고단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포도주에 물을 타면 안 되듯, 절대 은혜에 행위 공로를 섞어서는 안 된다”고 비유하며, 구원의 절대성이 곧 크리스천 신앙의 기초임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는 표현(엡2:10)을 헬라어 ‘포이에마(ποίημα)’로 분석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창조된 존재”라는 뜻을 깊이 있게 풀어낸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되었음을 재차 언급하며, 구원은 단순히 죄사함이나 형벌 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새롭게 빚어지는 근본적 재창조라고 본다. 그리고 구원의 목적을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엡2:10)라는 말로 이어간다. 즉,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두신‘선한 일을 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크리스천이 세상 속에서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볼 수 있다고 말한다.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은 이들은, “결국 착한 일을 하고, 세상에서 빛과소금이 되며,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기쁨으로 걷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에베소서 2장 1-10절의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은, 허물과 죄로 궤도를 이탈하고 과녁에서 빗나간 인간을 주님이‘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불러 일으키심’으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평생 감사하며 찬송해야 할 복음의정수”라고 힘주어 말한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해 보이던 죄인 인생에게, 하나님의 극진한 긍휼과 사랑이 임하여 ‘함께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시는’ 영광에 참여시키셨으므로, 우리의 삶 전체가 감사의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Ⅲ.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확신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1~2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역사의 종말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라 정리한다. 에베소서 1장 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할 때, 이는곧 역사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그 종점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결론이자 신약의 시작, 곧 “알파요 오메가”라는 계시록의 선언처럼 역사의 시발점이자 완성점으로서 자리한다. 장재형목사는 떼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오메가 포인트” 개념에 빗대어, “구약의 오메가 포인트가 예수 그리스도이듯, 신약의 오메가 포인트는 하나님 나라”라고 말한다. 결국 종말은 “낡은 역사가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시점”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처럼 역사는 단순히 흘러가다 사라지는 무의미한 물줄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수렴”되는 계획된 여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속에서 바울이 사도행전 28장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고 기록된 것을상기시킨다(행28:31). 그리고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이 물었던 질문,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1:6)라는 말 속에도 “나라 회복, 곧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는 소망”이 담겨 있었다고 해설한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크리스천들에게도 동일하게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서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기도의 자리에서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바로 이 ‘종말론적 확신과 현재적 참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낡은 죄악의 역사는 십자가로 인해 종말을 맞이했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가 열렸다’는 선포는, 곧 오늘날 교회가 “어떤 역사의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장재형목사는 “역사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면 자신의배가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표류하게 된다”는 비유를 들며, 크리스천은 “명확한 목적지”, 곧 ‘하나님 나라 완성’을 바라보며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삶과 사역은 “역사의 큰 흐름”에 참여하는 행위이며, 우리가 처한 세상 한가운데서도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조금씩 자라나며, 누룩처럼 밀가루 전체를 부풀게 하듯 영향력을 확장해간다는 것이다(마13:31-33).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역사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확신하는 이들에게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영적 태도가 “찬송과감사”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1장에서 바울이 삶 자체를 찬송으로 고백했듯, 그 역시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찬양의 이유는 단지 심리적 위로 수준이 아니라, 죄에 빠져 죽었던 자를 “은혜로 건져내신” 구원의 사건에 대한 감격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세상 풍습과 공중 권세에 붙들려 허우적대며, 결코 스스로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어줌을 당하심”으로써 인간은 “값 없이” 구원받았으며, 그 결과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강력한 생명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았다. 여기에 대한 감사가 곧 찬양이 된다.

또한 이 은혜를 경험한 자들은 감사의 태도로 세상을 섬기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 10절의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다”는 부분을 언급하며, 감사와 찬송은 결코 입술의 고백에만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해석한다. “죄인의 괴수”였던 사도 바울이 그 은혜를 깨닫고 온 인생을 다해 복음을 전한 것처럼, 현대를 사는 성도들 역시 “자신의 과거 죄악에서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이제는 선을 행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우고, ‘그리스도와 함께’ 권세를 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삶이다. 그래서 장재형목사는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을 따라 선을 행하게 함이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결론지어 말한다.

결국 에베소서 2장은 우리에게 한없는 감사와 찬송을 불러일으키는 ‘은혜의 장(章)’이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살아 있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로 인해 죽어 있는 상태였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생명을 얻었으니 “새롭게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교훈을 준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에베소서가 들려주는 복음의 선포”이며, 또한 “장대하고 심오한 하나님의구원 계획을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열쇠”라고 요약한다. 과거에 죄로 인해 궤도를 이탈해 죽어 있던 자들이,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물로 지음받아 선한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존재 이유와 소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붙들 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사단의 권세가 커 보일지라도, 역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된 미래”를 향해 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에베소서 2장을 통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앉히워졌다”는 복음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노래와 기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찬양과 감사가 교회 공동체를 더욱 영적으로 건강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목표로 전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는 늘 이 메시지를 전하면서, “우리가 배를 타고 가는 종착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통일되고, 낡은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끝이 나며, 새로운 역사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흔들리지 말라. 은혜로 구원받은 너희는 선한 일을 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는 존재가 되라”라고 결론지어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에베소서 2장의 메시지는 곧 교회의 정체성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다시금 일깨우는 작업이다. “너희가죽었었다, 그러나 이제 산 자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받았고,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선을 행하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 핵심에서 나온 감사와 찬양, 그리고 확신이 우리의 삶 전반을 새롭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길 위에서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이 된다고 장재형목사는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에베소서 2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펼쳐진 ‘죽음에서 생명으로, 진노에서 은혜로’ 옮겨진 모든 사람의 고백이요 간증이 된다. 그리고 그 최종 목적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확고한 비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우리는 모두 이 장대한 역사의 행진에 참여하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그로 인해 찬송과 감사가 마땅하다는 결론이, 장재형목사가 풀어낸 에베소서 2장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이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 – 장재형(장다윗)목사

에베소서 4장 4절에서 사도 바울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라고 선포한다. 이는 교회가 왜 그리스도의몸으로서 하나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핵심 구절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본문을 해석하며, 교회가 다양한모습과 문화를 품고 있을지라도 그 근원이 오직 그리스도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몸이 하나라는선언은 단순히 조직이나 제도상의 통일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영적·실질적으로 “연합”된다는본질을 보여준다.

1.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됨의 기초”

이 연합은 외적인 형태나 특정 공동체만의 색깔을 주장하는 것과 다르다. 바울은 “성령이 하나”임을강조함으로써, 교회 내 모든 성도의 궁극적 출발점이 어디인지 분명히 한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자체가 성령께서 각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이끄시고 그분의 몸 안에 들어오게 하셨음을 뜻한다. 그결과, 어느 누구도 교회 안에서 자신의 권리를 독점하거나 우위를 주장할 근거가 없고, 한 몸 안에서 함께성장하는 동등한 지체라는 본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다는 이 개념이 다양성의 무시나 획일적 일치를 의미하지 않는다고설명한다. 오히려 서로 다른 은사와 사역을 조화롭게 엮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를 이룬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듯이 교회에도 다양한 지체가 있다”고 언급한 사상과도상통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통해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각자의 위치와 사명을 온전히 인정받고, 서로경쟁하기보다는 상호 의존함으로써 진정한 하나 됨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4장 4~6절을 보면 몸·성령·소망·주·믿음·세례·하나님 등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가 제시된다. 몸이하나, 성령이 하나, 소망이 하나, 주가 하나, 믿음이 하나, 세례가 하나, 하나님이 하나. 바울은 이를 통해 교회가분열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그리고 본질적으로 하나의 공동체임을 설명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이렇게분명한 기초를 제시했음에도, 교회는 여러 사소한 문제와 역사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분열을 반복해 왔다”고지적하면서, 오직 복음의 근본을 붙드는 것만이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교회가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위험 요소 중 하나는 세속화이다. 20세기 후반부터 각종문화적·사상적 흐름이 교회에도 파급되면서, 한편으로는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나가야 한다는열정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도한 세속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딜레마가 생겼다. 장재형 목사는 “세속화신학”이 모두 그르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적 관점”을 긍정적으로수용하되, 복음의 본질이 희석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지나치게 폐쇄적이거나 자기 배타적 형태를 취해도 문제가 된다. 특정 교단이나 신앙 전통만이 완전하고옳다고 주장할 때, 복음의 본질과 하나 됨의 정신은 무시되고 외형적 기준만을 내세우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장재형 목사는 그러한 편협성과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에베소서 4장에 제시된 ‘일곱 가지 하나 됨의 근거’를날마다 되새길 것을 권면한다.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는 역사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어,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임하는 데 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시작이자 마침이시라는 것을 믿고 고백한다면, 교회는그 방향을 더 선명히 드러내야 한다. 우리가 “하나 됨”을 추구하는 것은 단지 교회 안의 화합을 위해서만이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예비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칼과 창이 낫과 보습으로 바뀌는 진정한평화와 회복은 이 땅의 어떠한 제도나 인간적 노력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자들을하나로 묶고 세상으로 흩어 보낼 때, 그 나라가 확장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교회는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동시에 복음 전파와 봉사를 통해 세상에 소금을 뿌리고 빛을 비추는‘파송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는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은혜를 경험하고, 다시 세상속으로 나가 그 은혜를 나누도록 부름받은 존재”라고 강조한다. 이는 곧 “하나 됨의 이유가 교회 외부로 확장되는선교적 목적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점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4장에 담긴 “몸이 하나이고, 성령이 하나이며, 소망이 하나이고, 주·믿음·세례·하나님이모두 하나이시다”라는 일곱 가지 선언을 붙드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 하나 됨을 온전히 이루며,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중심축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질적 진리 위에교회가 다시 서면, 아무리 급변하는 세상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복음의 힘과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게 될것”이라고 말한다.

2. “은혜와 선물의 신비—값없이 주어진 구원의 본질”

에베소서 4장 7절에서 바울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고 말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란 우리의 자격이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은혜”이며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밝혀낸다.

이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시로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원 품꾼 비유’를 들 수 있다. 아침부터 하루종일 일한 품꾼도, 오후 늦게 불려와 한 시간밖에 일하지 못한 품꾼도 동일한 품삯을 받았다. 이 장면에서 오래일한 이들은 불평하지만, 주인은 “내가 너희에게 불의를 행한 것이 아니다. 약속한 한 데나리온을 준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은혜의 세계가 얼마나 ‘불공평’하게 보일 수 있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갑작스럽게 모든 것을 받아 버리는”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설명하신것이다.

포도원 주인에 해당하는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어떠한 선한 공로도 쌓을 수 없었던 죄인에게도 동일한 구원을베푸실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은혜의 대반전”이며, 구원을 자격으로 환산하려는 인간의 모든오만한 시도를 일거에 부정한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구원을 ‘우리의 노력이나 자격의 결과’로 믿는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charis)라고 불리는데, 이는 신약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의 일방적호의를 의미한다. 선물은 받는 사람이 값을 치르지 않는다. 오직 베푸는 이의 호의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일뿐이다. 마태복음 20장의 비유뿐 아니라,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역시 이를 잘 그려낸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방탕하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조건 없이 환대하고 잔치를 베푸는 모습은 그 어떤 상황에서든 ‘돌아오기만하면’ 무한한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징한다.

교회는 이런 은혜를 모르는 이들이나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시에 스스로도 그 은혜 안에머무름으로써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야말로은혜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할 때 감사와 겸손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역설한다. 교회가 만약 이 은혜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내가 행했으므로 받는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된다면, 그순간부터 정죄와 배제의 문화가 나타나게 된다. 이는 복음의 본질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왔노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 세상의 모든 죄인을 향한 자비와 구원의 초청장을준비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오직 주의 은혜로 살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복음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결국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함께 예배하고 교제하는 이유도, 모두가 은혜로 초대받은죄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배타적인 클럽이 되어서도 안 되고, 스스로를 의인으로 포장하며 세상을재단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교회의 하나 됨도 마찬가지로 이 은혜를 매개로 이루어진다. 값없이 받은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더 낫다”는 자기 자랑이 사라지고, 서로를 존중하게 될 때, 교회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역사를 실제로 누리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접착제 역할을 하는 한 몸의 공동체가 교회”라고가르치며, 은혜의 신비가 사라지면 곧 갈등과 분열이 시작된다고 덧붙인다.

이렇듯 은혜에 대한 자각이 깊어질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자신을 높이는 대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영혼들조차도 함께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이 커진다.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호의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기억한다면, 교회 안에는 결코 서열이나 차별이 자랄 자리가 없다.

3.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성—은사의 목적과 직분”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바울은 시편 68편을 인용하여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는 구절을 언급한다. 이는 구약에서 전쟁에 승리한 장수가 전리품을 얻게 되고, 그것을 나누어 갖는 장면에서 따온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바울은 이걸 그리스도께 적용한다. 낮아지시고(성육신과 고난), 죽음을 통해 승리하신(부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사 교회에게 은사를‘전리품’처럼 분배하셨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우리의 사역이 곧 주님의 승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강조하며, 하나님이 교회에 은사를 주심은 인간적 자격과 능력에 근거한 게 아님을 상기시킨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하실 때 사람들이 각기 다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했던 모습이 은사의 다양성을 잘보여준다.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는 은사들이 다채롭게 언급되는데, 이러한다양성은 교회 안에서 상호 보완을 통해 더 큰 통일성을 이룬다. 장재형 목사는 “은사의 목표는 교회를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바울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교사라는 다섯 가지 대표 직분을 언급한다. (일부 학자들은 목사와 교사를 묶어 네 가지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장재형 목사는 초대 교회 당시의 상황을반영하지만, 본질적으로 오늘날 교회도 이 다섯 직분이 제시하는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사도는개척하고 파송되는 자,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전도자)는 곳곳에 복음을 퍼뜨리는자, 목사는 양을 돌보는 자, 교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를 각각 지칭한다.

이 직분들 중 어느 것도 우열이 없으며, 모두가 귀하다. 교회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은사를 가지고 섬기는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이것을 바울은 “몸의 다양한 지체”에 비유했다. 눈과 손, 발, 귀 등 각 지체가 서로 다른기능을 담당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온전한 몸으로서의 활동이 제한된다. 교회가 한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획일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고유한 역할을 통해 풍성한 하모니를 이룬다는 데 진정한아름다움이 있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서 바울은 은사를 주신 목적을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세우려 하심이라”고 요약한다. 이를 조금 더 풀면 첫째,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일이 교회의몫이다. 헬라어 ‘카타르티스모스’가 지닌 “꿰매고 교정한다”는 의미처럼, 교회는 죄와 아픔으로 갈라진 영혼들을보살피고 수선하는 작업에 부름받았다. 둘째, 그 회복된 성도들이 세상에 나가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도록준비시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교육받은 성도는, 세상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약자들을돌보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해야 한다. 셋째, 그 모든 활동의 최종 목표는 그리스도의 몸(교회)을 견고히 세우는데 있다.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이며,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인 동시에 파송된 공동체이기도 하다.

장재형 목사는 “성도들이 은사를 제대로 발견하고 활용하도록 돕는 일이 교회 리더십의 핵심 과제”라고 말한다. 은사는 때로 잘못된 방식으로 사용되면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어떤 성도가 “내 은사가 더영적이다”라며 우월감을 갖거나, 반대로 “나는 눈에 띄는 은사가 없으니 쓸모없다”고 낙담하면, 교회는 건강한기능을 잃고 만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눈이 손에게, 손이 발에게 우열을 논할 수 없음을 언급한 이유가바로 이것이다. 교회 안에서 각 은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개인의 명성과자부심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은사를 나누고 협력하는 교회 문화를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호 존중과 겸손”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 대형교회나 복잡한 구조를 가진 교회에서는, 주목받기 쉬운 은사와 그렇지 않은 은사 간의 간극이 크게 벌어질 수있다. 그러나 서비스팀, 행정팀, 재정팀, 주차 안내 봉사, 각종 돌봄 사역 등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들의헌신 없이는, 결코 교회가 온전히 운영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서로 다른 은사를 발견하고 인정하며 함께협력할 때, 세상은 그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해 있다는 사실을 엿보게 된다”고 강조한다.

결론적으로 은사가 다양해도, 그 목적과 방향이 그리스도께 집중되어 있다면 오히려 교회는 더 온전한 통일성을이룰 수 있다. 이 ‘다양성 속의 통일성’이야말로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제시하는 교회의 이상적인 모습이며, 장재형 목사가 끊임없이 설파하는 교회론적 핵심이다.

4. “교회의 참된 사명—세상 속으로 파송된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

장재형 목사는 교회의 방향성을 논할 때 자주 “In and Out”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교회가 모이는 것(In)과흩어지는 것(Out)의 두 가지 축을 균형 있게 잡고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초대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내부적으로 뜨거운 예배 공동체가 되었지만, 동시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흩어져 복음을전했다. 교회가 이 두 측면 중 어느 한 쪽만 강조해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오직 안에만 머문다면 세속과단절된 종교 집단이 되고, 밖으로만 나간다면 영적 교제와 예배의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20세기 중후반 ‘세속화 신학’이 대두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담론이활발해졌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도 같은 시기에 부각되었다. 이는 선교가 교회의 전략이나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이 세상에서 구원 사역을 펼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교회는 그저‘하나님의 선교’에 초청받아 동참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바울의 에베소서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그리스도께서이미 만물을 통일하시기 위해 역사 가운데 일하신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교회가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어느 민족이나 문화 안에서도 선포할 수 있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전 세계가 하나의 지구촌으로 급변하고 있는 지금, 교회가 더 넓은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주장한다. 과거와 달리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한 지역 안에 공존한다. 이 과정에서 갈등도발생하지만, 동시에 복음 전파의 기회도 열린다. 교회가 만약 지역과 민족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은혜와사랑으로 접근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의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이는 곧 에베소서 1장10절에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우주적그리스도론과 결을 같이한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도 이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종종 교회 사명 하면 전도와 예배만을 떠올리기쉽지만, 성경은 고아와 과부, 낙은애를 돌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약부터 신약까지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예수는 복음서에서 병든 자와 죄인들을 찾아가셨고, 초대 교회도 유무상통의 정신으로 약자들을 보살폈다. 장재형 목사는 “수직적 영성(예배와 기도)만 강조하면 세상과 분리된 종교 생활로 전락하기 쉽고, 수평적사랑(사회적 봉사)만 강조하면 영적 뿌리가 흔들릴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는 이 두 축을 균형 있게붙들어야 한다.

결국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하는 공동체다. 교회가 서로 하나 되고, 각자의 은사를 최대한발휘하여 상호 보완하고, 동시에 지역사회와 열방을 섬긴다면,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체험하게 된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희락이라”고 했던 말처럼, 교회는 이 세 가치(의·평강·희락)를 삶으로 드러내야 하는 증인이다.

장재형 목사는 가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세속적 표현을 빌려,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세상 구조도 결국 ‘새 하늘과 새 땅’ 앞에서 해체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종말론적 확신을 자주전한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하거나 더디게 느껴도, 하나님 나라는 이미 도래하고 있고 또 결국 완성에 이를것이다. 교회는 그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세상 가운데 조금씩 펼쳐 보이는 모델 하우스 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처럼 교회가 은혜에 기초하고, 다양성 속 통일성을 추구하며, 세상으로 파송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의 몸으로서 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 됨과 거룩함을 교회 안에만 가두지 않고, 세상속에 해방과 치유와 축복의 통로로 가져가는 것이 참된 교회의 사명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교회가 때때로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지만, 에베소서 4장의 교훈, 즉 통일성과 다양성, 은혜와 선물, 그리고 파송된 공동체라는본질을 재발견함으로써 다시금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써 나갈 수 있다”고 역설한다.

결국 교회는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세상에 흩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전초 기지이다. 값없이 받은 은혜로하나 되어, 서로 다른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아픈 영혼을 치유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포도원에 초대받은 품꾼들이며, 결코 자격으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은혜 덕분에 자리를 얻은사람들이다. 그 은혜의 힘으로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세상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엿보고, 장차 완전하게임할 그 나라의 아름다움을 기대하게 된다. 이러한 놀라운 복음적 순환이 멈추지 않을 때, 닭의 모가지를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