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에서 아들로 — 장재형목사와 함께 읽는 갈라디아서 4장

갈라디아서 4장은 복음의 심장으로 스며들게 하는 문이다. 신앙은 종종 정보와 논쟁이 뒤엉킨 숲으로 보이지만, 장재형(장다윗) 목사의 안내를 따라 이 장을 다시 읽으면 시야가 맑아진다. 모든 길은 결국 한 사건, 곧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는 사실로 수렴한다. 옷의 첫 단추를 바로 꿰어야 전체가 흐트러지지 않듯, 성육신이라는 첫 단추가 맞춰질 때 십자가의 대속, 부활의 소망, 하나님의 자녀 됨이라는 큰 그림이 제자리를 찾는다. 바울은 이 정점을 “때가 차매”라는 절제된 표현으로 붙들어 둔다. 시간의 양(크로노스)이 아니라 의미의 때(카이로스)가 충만해졌을 때, 역사는 새 방향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 때를 위해 하나님은 역사의 무대를 이중으로 준비하셨다. 한 축은 구속사의 중심 무대다. 아브라함의 부르심, 시내산의 율법, 성전과 제사의 리듬, 그리고 선지자들의 예언은 메시아를 향한 기대를 공동체의 기억 속에 새겼다. 다른 축은 세속사의 흐름이다. 로마의 평화가 길을 열고, 제국의 도로망과 헬라어의 보편성이 소통의 경계를 낮췄다. 복음이 퍼지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예상 밖에서 빛난다. 제국의 심장부가 아니라 변방의 베들레헴, 그마저도 마구간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아들이 태어나셨다. 세상이 힘과 성공으로 자신을 과시할 때, 하나님은 낮아짐과 섬김으로 세상의 논리를 거꾸로 세우신다. 이 전복의 지혜가 갈라디아서 4장 전체를 관통한다.

아들의 오심이 겨냥한 목표는 분명하다. 율법 아래 갇힌 우리를 속량하시어, 마침내 아들의 명분을 주시는 것이다. “율법 아래” 산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율법은 은혜다. 죄를 분별하게 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비춰 주는 거울이다. 그러나 거울은 진단할 뿐 치료하지 못한다. 기준은 선명해지지만, 그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 또한 적나라해진다. 바울은 이 상태를 미성년 상속자의 비유로 설명한다. 유업의 주인이 될 아이라도 자랄 때까지는 후견인의 관리 아래 종과 다름없이 산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였지만, 그 교실에 평생 갇혀 죄책감과 의무감에 눌려 사는 것이 문제다. 바로 그 막다른 골목에서 복음이 길을 연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오셨다.

속량은 추상적 종교어가 아니다. 값을 지불해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시장의 언어다. 한자 ‘속(贖)’에 화폐를 뜻하는‘패(貝)’가 들어 있는 것만 봐도 그 현실감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 팔린 우리를 해방하시려 아들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셨다. 십자가는 대속의 자리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공의의 요구가 무시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충족되는 길을 예비하셨다. 구약의 대속죄일이 예고편이었다면, 십자가는 본편이다. 예수의 피 흘리심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잠재우는 화목제물이요,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칭의의 법적 근거다. 그래서 십자가는 감상이나 연민의 드라마가 아니다. 공의와 사랑이 치열하게 만나는 정점이며, 세상 지혜에는 어리석어 보일지 몰라도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깃든 자리다.

그러나 복음은 죄 사함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만 풀어 주신 게 아니라 “아들”로 삼으셨다. 입양의 선언은 법적 지위를 넘어 존재의 방향을 바꾼다. 심판을 피하려 벌벌 떨던 종의 마음에서, 사랑받는 자녀의 담대함으로 옮겨 앉는 변화다. 이 변화를 우리 안에서 보증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우리 영 안에서 “아바, 아버지”라는 호명을 일으키신다. ‘아바’는 종교의 언어가 아니라 가족의 언어다. 장재형 목사는 신앙의 핵심이 결국 관계임을 강조한다. 멀찍이 규칙을 지키며 버티는 관계가 아니라, 전적으로 안길 수 있는 신뢰의 관계. 성령은 이 관계를 기념이 아닌 경험으로 바꾸신다. 그 결과, 우리는 신분을 의심하는 고아가 아니라 유업을 기다리는 상속자가 된다. 상속은 먼 미래의 약속으로만 남지 않는다. 지금 여기서 성령의 첫 열매를 맛보는 삶이 상속의 현재형이다.

아들의 자유는 방종이 아니다. 자유는 사랑할 능력의 회복이며, “해야 해서”가 아니라 “할 수 있어서” 순종하는 힘이다. 율법이 바깥에서 채찍질한다면, 성령은 안에서부터 사람을 새롭게 하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4장은 자연스럽게 5장의 성령의 열매로 이어진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 오래 참음과 친절과 선함, 신실과 온유와 절제는 외부 압박의 산물이 아니라 은혜의 기후에서 자라는 생명이다. 우리의 몫은 악착같이 애쓰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숨 쉬는 자리를 삶의 중심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도 바뀐다. 우리는 보통 시계를 바라보며 바쁨과 지루함 사이를 오간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일상 속에서 때를 준비하신다. 기도하는 기다림, 미뤄 둔 화해를 행동으로 옮기는 용기, 작지만 정직한 선택,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의 섬김—이런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때를 익게 한다. 카이로스는 거대한 사건으로만 오지 않는다. 새벽의 한 구절 묵상, 따뜻한 메시지 한 줄, 조용한 배려 속에 하나님의 때가 스며든다. 그때 우리는 비교의 리듬에서 벗어나 은혜의 리듬으로 호흡하기 시작한다. 자유의 박자는 성령의 박자와 맞아떨어질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교회 역시 이 리듬을 배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로마의 도로와 헬라어를 복음의 통로로 삼았듯, 오늘의 교회는 디지털 도로와 글로벌 언어, 다문화의 광장을 복음의 그릇으로 삼아야 한다. 다만 수단이 목적을 삼키지 않도록 늘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로그램보다 복음, 방법보다 본질, 성장보다 성숙이 먼저다. 이 질서가 흐트러지면 우리는 금세 “초등 학문”으로 회귀해 도덕 경쟁과 성과주의에 붙잡힌다. 갈라디아서 4장은 이 함정을 경고하며, 종의 멍에를 벗고 아들의 자유로 서라고 초대한다. 공동체 안에서도 서로를 잠재적 심판관이나 경쟁자로 대하기보다, 함께 유업을 이을 형제로 대할 때 복음의 공기가 교회 전체에 퍼진다.

개인의 영성에서도 이 장은 실천 가능한 지침을 준다. 정체성은 성과가 아니라 은혜에서 온다. 우리는 “잘해서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기에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실패가 겹쳐도 성령은 우리에게 붙여 주신 “아들”이라는 이름을 거두지 않으신다. 기도가 막힐 때는 어려운 수사를 찾기보다 “아바, 아버지”라는 단순한 호명으로 시작하라. 성경을 읽을 때도 해야 할 목록을 늘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얼굴을 먼저 찾으라. 가정과 일터에서 상대를 상속자로 대하는 작은 배려를 반복하라. 그러면 삶의 리듬이 바뀐다. 쉼이 돌아오고, 감사가 습관이 되며, 평범한 하루가 예배로 변한다. 이것이 이미 주어진 “아들의 권세”가 일상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이다.

목회 현장에서 장재형 목사가 주는 조언은 땅에 닿아 있다. 설교는 죄책감을 자극해 억지 순종을 끌어내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복음으로 양심을 깨워 사랑의 힘을 흘려보내는 통로여야 한다. 제자훈련은 지식 축적이 아니라 정체성의 견고화—“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선교와 사회참여 역시 아들의 자유에서 출발할 때 가장 창의적이고 오래 간다. 십자가 앞에서 공의와 사랑을 함께 배운 사람만이, 세상 속에서 진리와 자비를 함께 실천할 수 있다. 복음의 공공성은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는 작은 결정들에서 힘을 얻는다.

결국 갈라디아서 4장은 초대장이다. 종의 옷을 벗고 아들의 옷을 입으라는 초대, 흘러가는 시간에 휩쓸리지 말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를 붙들라는 초대, 율법의 교실을 졸업하고 사랑의 삶으로 나아가라는 초대. 이 초대는 개인의 경건을 넘어 교회의 체질과 사회를 향한 태도까지 바꿀 힘을 지녔다. “때가 차매” 오신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의 시간 속에서 때를 채우신다. 그러니 오늘 작은 순종으로 그때를 맞이하자. 미뤄 둔 화해를 시작하고, 약한 이에게 손을 내밀고, 정직을 선택하고,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기도하며 섬기자.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눈치를 보지 않고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선다. 거기서 아들의 노래가 시작되고, 자유의 호흡이 깊어진다. 복음은 우리의 이름을 바꾼다. 종에서 아들로, 낯선 손님에서 상속자로. 갈라디아서 4장이 선포하는 이 변화를 장재형 목사의 안내와 함께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 보자. 설명보다 선물, 성취보다 은혜, 율법보다 사랑—이 세 단어가 우리의 하루를 이끌게 하자. 그러면 크로노스의 풍랑 속에서도 카이로스의 항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들의 오심으로 열어 주신,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된 복음의 새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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