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요한복음21장 강해

1. 요한복음 21장의 구조와 의미

요한복음 21장은 흔히 ‘부록’ 혹은 ‘에필로그’ 장으로 불린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20장 31절에서 이미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명시함으로써, 저자가 복음서를 쓴 목적과 그 결론을 충분히 전달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이 복음서를 기록한 1차 목적이었다면, 21장은 그 복음서의 결론 이후에 덧붙여진 후일담, 혹은 결론 이후에 남겨진 제자들의 삶과 주님의 마지막 메시지, 더 나아가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선교적·목양적 방향을 제시하는 장으로 볼 수 있다.

이 21장에는 매우 중요한 본문이 등장한다. 1절에서 14절에는 디베랴 호수(갈릴리 호수)에서 일곱 제자가 물고기를 잡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큰 물고기 153마리를 잡은 기적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후 이어지는 대목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 하심으로써, 베드로와 더불어 모든 제자(특히 교회 지도자)가 감당해야 할 목양의 사명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주신다. 그리고 21장 후반부는 예수님께서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며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심으로 종말론적 ‘때’와 ‘시기’에 대한 언급을 해주신다. 이는 마태복음 28장에 기록된 ‘그레잇 커미션(The Great Commission)’과는 또 다른, 매우 실존적이며 종말론적인 차원의 말씀이다. 이로써 요한복음은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의 이름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라는 대전제 위에, 교회 공동체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떻게 ‘주님의 재림’과 ‘역사의 끝’을 준비하는가를 깊이 있게 그려 낸다.

이 본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면은 역시 디베랴 호수 사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요한복음에는 디베랴 호수라 지칭)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놀라움과 신비로 가득하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다시금 고기를 잡으러 떠났고, 밤새 그물을 내렸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뒤(물론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달라진 어떤 세상이 오리라 예상했지만, 막상 현실은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들의 귀환’이라 불러도 좋을 이 모습은, 때로는 인간이 체감하는 영적 무기력, 기대한 대로 전개되지 않는 삶의 상황, 그 가운데서 옛 삶의 방식으로 회귀하는 인간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에서 고기를 잡던 그들에게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은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즉시 예수님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명령하신다.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이었고, 앞도 뒤도 아니었다. 이를 두고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여러 설교자들은, 그 방향이 곧 ‘주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 복음에 있어서 ‘방향’이란 삶의 질서이자 순종의 태도다. 사람들은 쉽게 특정한 방식대로, 혹은 자신이 익숙한 쪽(왼편, 혹은 뒤편)으로 그물을 내리려 할 때가 많지만, 주님은 분명하게 “오른편으로 던지라”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걸어가야 할 길, 즉 ‘선교와 목양’이라는 방향성을 재확인하라는 요청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은 크게 놀랄 만큼 풍성한 물고기로 가득 찼다. 심지어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요21:6). 이 경험은 누가복음 5장 초반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사건과도 맞닿아 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있은 후 주님은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다. 요한복음 21장의 이 장면 역시 그 부르심이 ‘완성’ 혹은 ‘확증’되는 순간으로 해석된다. 예수님이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셔서 큰 고기를 풍성히 잡도록 이끄신 건, 결국 이 제자들이 세상으로 나아가‘153마리의 큰 물고기’를 잡듯 ‘온 열방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선교’에 쓰임 받을 것임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시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21장 11절에 강조되는 부분이 있다.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보통 그렇게 큰 물고기가 잡히면 그물이 찢어질 법도 한데, 여기서는 다소 ‘초자연적’이라 부를 수 있는 표현이 사용된다. 교부 시대부터 이 상징성을 해석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고, 대표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또는 복음)은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는 식의 신학적 해석이 많이 공유되었다. 어거스틴 같은 교부도 이 153마리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번에 잡은 이 ‘153마리’는 초대교회 시대에 중요한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히브리어의 ‘수신학(Gematria)’ 전통에 따라 “베니 하 엘로힘(Bənē hāʾĔlōhīm)”, 즉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라는 말의 숫자 합이 153이라는 설명도 제시되었다. 이것이 정확히 맞는지 여부는 다소 학자마다 이견이 있지만, 중요한 점은 초대교회가 이 숫자를 단순한 ‘우연’으로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주님의 소유가 된 자들’로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기쁨으로 참여하게 될 ‘크리스천 공동체’를 이 물고기 숫자가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초대교회에서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암호로도 쓰였다. ‘ΙΧΘΥΣ(익투스)’라는 헬라어 낱말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주’라는 의미의 머리글자를 따온 것이어서, 박해 시대에는 물고기 모양을 그리거나 새김으로써 서로 ‘동지’를 인식했다고 한다. 요한복음 21장은 바로 그런 상징성을 요약하여 보여 주는 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므로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는 말은, 오늘날 교회가 이 복음 사역에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지지 않을 만큼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는 확신을 던져 준다. 그러한 믿음은,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다양한 교회 지도자들이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은 결코 부족함이 없고, 오히려 넘치도록 역동적”임을 선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이 장면에서 또 하나 주목할 대목은, 예수님께서 이미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그 위에 떡과 생선을 준비해 두신 장면이다(요21:9).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따라 풍성한 고기를 잡아오긴 했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미 모든 식탁을 마련해 놓으셨다. 이는 흔히 ‘성찬’을 상징한다. 또한 누가복음 24장에 나타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떡을 떼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눈이 밝아졌던 사건,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생명의 떡’이심을 가르치셨던 맥락과도 연결된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져온 물고기는 ‘인간의 수고와 순종의 열매’라 할 수 있지만, 애초부터 모든 것의 ‘시작’은 예수님의 베푸심이다. 이는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먼저 예비하신 은혜의 자리에 인간이 초청받아 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기에, 요한복음21장의 숯불 위에 준비된 생선과 떡은, 단순한 식사 이상으로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노력이나 헌신이 분명 필요하지만, 모든 것의 기초는 ‘주께서 이미 준비해 두신 은혜’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후 21장 15절 이하에서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반복해 물으신 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 명령하신다. 누가복음 22장 34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받았고, 실제로 대제사장의 뜰에서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공공연히 부인했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상처와 실패를 회복시키시는 동시에, 그의 소명을 다시 확인시켜 주신다. 그 결과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 이후 담대한 사역을 감당하는 인물로 변화한다. 특히 사도행전 4장에서는 안나스(대제사장) 앞에서 “천하에 구원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라고 예수의 유일성을 담대히 선포하게 된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다.

즉, 요한복음 21장이 전하려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갈래라 할 수 있다. 하나는 ‘선교’이며, 다른 하나는 ‘목양’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풍성한 물고기를 잡도록 하심으로써 ‘열방을 향한 전도와 구원의 역사’를 예시하고, 또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써 ‘교회 공동체를 향한 돌봄(목양)의 사명’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이미 마련해 놓으신 식탁’을 기억하는 예배와 성찬, 그리고 주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장재형 목사를 비롯한 여러 목회자는 이 본문을 설교할 때, 교회가 ‘전도’와 ‘목양’을 반드시 붙잡아야 함을 역설한다. 교회는 복음을 모르는 자들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고, 동시에 이미 공동체 안에 있는 자들을 책임감 있게 돌보며 성장시키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21장 후반부에 있는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21:23)라는 말씀이 묘사하듯, 초대교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임하는가?”라는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 등에서 ‘재림’ 혹은 ‘종말’을 예고하셨고, 사도행전 1장 6~7절에서도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입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라고 대답하셨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21장 23절에도 반영된, ‘때와 시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다.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희는 내가 맡긴 사명을 감당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어쩌면 본문의 핵심 주제이자, 교회가 이 땅에서 ‘역사의 종말’을 바라보면서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신앙적 태도를 보여 준다. “주님 언제 오십니까?”라는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는 질문인 셈이다. 그 대답이 바로 “너희는 나가서 전도하라, 온 열방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양떼를 돌보라”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메시지를 종합해 볼 때,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을 넘어, 4복음서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복음 전파와 공동체 돌봄, 그리고 주님의 재림에 대한 종말론적 소망’을 함축한 장이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신 부분은, 베드로 개인뿐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 모두에게 적용된다. 이는 곧,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을 돌보라”, “주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라”, “2세들을 비롯해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양육하라”는 구체적 요청이다. 여기에 전도와 세계선교의 사명이 함께 들어 있는 까닭에, 많은 지도자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153마리 큰 물고기와 같이 세상 곳곳에서 주를 향해 돌아오는 사람들을 주의 교회가 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장재형 목사는 여러 설교와 문서에서, 이 21장의 메시지를 기반으로 “세계를 품는 교회, 전 인류를 향해 나아가는 선교적 공동체, 그리고 영적으로 목양하는 강건한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교회의 최종적인 모습은 “사랑으로 양을 돌보는 목양”과 “열방을 대상으로 한 적극적 전도”가 균형 있게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 균형을 잃으면 교회는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다. 즉, 오직 교회 안에 있는 기존 성도들의 돌봄에만 몰두하다가 외부로 나아가는 ‘선교적 사명’을 소홀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도’에 치중하다가 교회 내부의 연약한 지체들이 상처 입고 방치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은 바로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품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라고 하심으로써 ‘위로부터 주어지는 방향’에 순종해야 할 것을 알려 주셨고, 또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심으로써 목양을 함께 당부하신 것이다.

이 메시지는 초대교회가 지닌 역사적 맥락에서, 그리고 현대 교회의 비전 및 사명에서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의 문제는 종종‘때와 시기를 자기 방식으로 제한해 버리는 것’이다. 주님이 속히 오시리라고 믿으면서도, 정작 그 재림을 준비하는 삶은 멀리할 때가 있다. 혹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 안에만 갇혀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21장의 말씀은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몰라도 너희는 맡은 사명을 감당하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그 사명은 곧, 열방을 제자 삼는 선교와, 주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목양이다. 주님의 진정한 최후 명령(‘내 양을 먹이라’와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의 결합)은 단 한쪽만으로는 교회를 온전히 세울 수 없다는 점을 알려 준다.

더욱이 여기에 덧붙여, 역사관과 세계관에 대한 언급도 빠지지 않는다. 21장에서 베드로는 일곱 제자 중 하나로서 다시금 갈릴리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았으나, 결국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야 풍성한 열매를 보았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역사란 인간이 자기 노력만으로 개척하는 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따라 순종할 때에 열리는 장’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역사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깊이 탐구하고, 세계가 결국 어떤 결말(종말)로 나아가는지를 성경의 시각으로 이해해야만 흔들리지 않고, 소시민적인 이기심에 빠지지 않으며, 달팽이가 달팽이집에 들어가듯 자기 안에만 갇히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는 청년들과 2세대들에게 성경적 세계관과 역사관을 가르쳐야 한다. 인류 역사가 단지 우연이나 물질적 흐름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궁극적 구원과 심판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요한복음 21장의 핵심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제자들이 맞닥뜨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선교적 순종과 목양적 책임을 다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을 “선교와 목양의 긴장 속에서 교회가 견지해야 하는 사명의 에센스”로 요약하면서, 실제 사례로서 교회 개척, 학교 설립, 미디어 사역, 문화 사역 등을 통해 전 세계 153개 지역(이른바 ‘153 비전’)에 복음을 전하고, 다양한 영혼들을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비전을 품어야 한다고 역설해 왔다. 이는 명단상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상징하듯, 궁극적으로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비전과 중첩된다.

실제로 교회가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파하려 할 때, 세상은 여러 경로로 교회를 압박하고, 복음 전파의 방향성을 흐리게 만들고자 한다. 그 가운데 교회는 무엇보다도 주님이 말씀하신 ‘오른편’—즉 ‘하나님이 이끄시는 정확한 방향성’을 붙들고 떠나야 한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세계선교에 뜻을 둔 여러 지도자는 이러한 원리로, 각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새로운 사회적·문화적 도전을 교회가 수용하면서도 본질인 복음을 결코 타협하지 않도록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그물)은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 세상에 나아가 수많은 영혼을 건져 올려도, 그 그물은 능히 감당해 낸다. 다만 교회가 방향을 잃어 그물을 다른 쪽으로 던지려 할 때, 혹은 아예 던지지 않으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이 메시지를 기억하는 것만이, 요한복음 21장이 전하는 ‘풍성함’과 ‘생명’을 실제로 체험하게 하는 길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몰라본 제자들의 눈이 다시금 뜨이고, “주님이시라!”(요21:7)라는 감격의 고백으로 이어진 장면은, 구체적으로 오늘날의 교회가 부활절 이후의 신앙생활에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암시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머리로만 아는 믿음’에 멈추지 말고, 실제 생활 가운데 찾아오시는 주님을 체험하며, 그분이 지시하시는 길을 따르는 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이다. 이때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내리는” 베드로의 모습은, 실로 열정적이다. 신학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회복의 열정을 소유한 존재로 거듭났다”고 해석한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과거가 있지만, 그 실패를 넘어서 주님께 달려가는 행위 자체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한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20장까지 전개된 복음서의 결론 뒤에 놓인 ‘새로운 시작’에 관한 기록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셨다. 이제 제자들은 이전에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모든 것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릴리 바다에서의 수고와 책임이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그 몫은 바로, ‘복음을 전파하고, 양들을 먹이는 사명’이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결정적 사건 이후에 감당해야 할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렇지만 주님은 단 한 번도 그들을 혼자 두지 않으셨고, 여전히 앞서 숯불과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으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친히 말씀해 주셨다. 이 내용을 묵상하는 오늘의 교회 역시,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종말에 가까울수록 교회가 지켜야 할 것은 “선교와 목양, 역사와 세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 그리고 다음 세대를 책임감 있게 양육하는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 전도와 목양의 실천 그리고 역사·세계에 대한 인식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을 두고 설교하면서, 특별히 “선교와 목양”이라는 두 축을 강조한다. 그는 이 장을 “전도와 목양의 장”이라고 부르며, 실제로 초대교회부터 현대 교회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공동체가 반드시 붙들어야 할 핵심 과제임을 누누이 역설해 왔다. 전도란,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신 말씀—“오른편으로 던지라”—에 순종함으로써 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목양이란, 제자들 가운데서 특별히 베드로를 지명하시어“내 양을 먹이라”고 거듭 세 번 부탁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돌봄의 의무를 교회 안팎에서 실행해 가는 것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고, 한쪽이 과도하게 강조되면 교회의 균형이 무너지게 된다.

먼저 선교에 대해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신 것은 복음서들의 공통된 흐름 중 하나다. 마태복음 28장 또한, 예수님께서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고 명령하신 ‘그레잇 커미션’ 장면을 기록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는 선언에서, 예수님은 선교 사명의 근거와 그 결과 모두를 제시하셨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도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심으로써, 교회가 계속해서 ‘열방’을 향해 전진해야 함을 역설하신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흐름, 그리고 요한복음 21장의 메시지를 통합적으로 묵상하며,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풍성한 전도의 결실을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주님의 지시하시는 방향, 즉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는 순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실제로 선교 현장에서 우리는 때로 인간적 전략, 통계나 노하우만을 의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세대와 문화권이 다르며, 지역에 따라 선교 접근 방식은 다양하다. 결정적으로, 교회가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거나 무시한 채, 그저 자신들의 계산과 경험으로 선교 전략을 세운다면 오히려 깨어진 그물만 남길 수도 있다. 반대로, 아무리 열악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허락하신 방향과 방법에 순종하며 전할 때, 우리는 초대교회가 보았던 ‘놀라운 부흥’과 ‘생명력 있는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렇듯 전도와 선교는 교회 본질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면서, 구체적으로 “세계선교”를 이루기 위한 비전도 제시해 왔다. 153마리에 대한 상징적 해석을 기반으로 ‘153 비전’을 말하거나, 교회가 서로 연합하여 지구촌 곳곳에 학교나 신학교, 병원, 미디어 센터 등을 세워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돌보며, 복음을 전하는 거점으로 삼는 등의 계획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숫자 맞추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물이 결코 찢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에 기초한, 적극적이고 실제적인 사역 비전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교회가 이런 거대한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본문의 제자들도 한 번에 153마리를 건져 올리기 전까지 ‘밤새 헛수고’한 경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셔서 오른편에 던진 그물”은, 상상 못 할 풍성함을 가져왔다. 이 사실이 바로 “선교는 결국 하나님의 일이며, 그분이 직접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우리가 순종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전도의 과업을 감당함과 동시에, 교회는 목양에도 힘써야 한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 묻고, 세 번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한 사랑 고백의 회복을 넘어, “너는 이제부터 내가 너에게 맡길 양들을 책임지고 돌보라”는 준엄한 요구였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는, 양들을 안전하게 이끌고, 바른 말씀과 진리로 먹이며,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 그것이 곧 목양이다. 그런데 이러한 목양이 진정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회가 아무리 전도를 통해 사람들을 모으고 늘려 간다 해도, 결국 영적 돌봄이 부재하여 자라지 못하거나 상처 입고 떠나는 이들이 속출할 수 있다. 선교와 목양은 반드시 함께 진행되어야 하며, 주님께서 이 본문을 통해 특별히 “베드로-교회 지도자-모든 성도”에게 반복적으로 들려주시는 음성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강력한 호출이다.

이러한 목양은 교회 내부를 넘어, 세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확대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 또한 여러 설교와 글에서, 교회가 세상의 가난하고 외로운 영혼들을 찾아가 섬기고, 그들에게 복음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문화적 자원을 제공하며 실질적으로 돕는 것이 “예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한국교회가 과거에 학교와 병원을 세워 사회적 발전에 기여했던 선례가 있으며, 초대교회도 로마 제국 치하에서 박해받으면서도 병자와 고아, 과부를 돌보는 데 앞장섰다. 이는 결국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명령을 공동체 안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와 세계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적용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더 넓은 역사적·세계적 시야를 가져야 하며, 결코 자기 교회나 자기 민족 안에만 갇히지 않고, “너는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창12:1)는 아브라함의 소명을 공유해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세계관을 강조하면서,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은 다시 한 번2세대를 세우고, 그들에게 성경적 역사관을 가르치며, 열방을 꿈꾸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나’를 중심으로 한 문화—즉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 익숙해져 있고,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삶과 커리어가 중요하다”는 식으로 사고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라고 명령하며, 더불어 “이 세대의 흐름을 본받지 말라”(롬12:2)고도 명한다. 이는 개인의 구원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앙이 아니라, ‘세계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동참하라는 초대다. 교회가 2세들을 향해 이러한 성경적 역사관과 세계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할 때, 다음 세대들은 점점 세상 안에서 자기만족과 세속적 풍조를 좇다가 ‘물고기 잡는 사명’을 잃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의 교훈—“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져라”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은 단지 ‘제자 시대’나 ‘교회 지도자’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부모와 교육자, 그리고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함께 붙들어야 할 진리가 된다.

“주여, 제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는 베드로의 이전 고백(눅5장)과도 같이, 우리가 현실에서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했다 해도, 주님이 정하신 시점과 방향에 순종하면 “153마리의 큰 물고기”와 같은 결실을 얻게 된다. 이는 경제적 풍요를 넘어, 영혼 구원과 세계선교라는 측면에서 더욱 참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목사는 요한복음 21장 설교 중, 이 153마리를 이렇게 해석한다. “이것은 우리가 붙든 복음의 망(net) 안으로 들어올 하나님의 아들들의 총체이며,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이들의 상징이다. 그물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절대 찢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물이 약해질까 염려할 게 아니라, 어떻게 더 많은 영혼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처럼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복음이 단단히 견고하고, 그 안에 생명의 능력이 충만하다는 고백이다.

결국 요한복음 21장은 전도와 목양의 동시적 요청, 그리고 종말론적 인식 속에서 교회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 준다.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가 끝없이 확장되면서도, 동시에 안으로는 깊이 돌보는 사역이 이뤄지길 바라는 주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 교회 역사는 실제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왔으며, 로마 제국 시대, 중세 시대, 종교개혁, 근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낚임 받은 영혼들’과 그들을 목양하는 ‘교회 공동체’가 세워져 왔다. 물론 세상의 도전과 오류도 많았고, 교회가 그 사명을 오해하거나 실행하다가 실패한 부분도 많았지만, 핵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물을 던져야 하고, 양들을 먹여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 언제 오시나?”라는 호기심이나 ‘시기 계산’에 함몰되지 말고, “때와 시기는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맡겨진 오늘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21:23)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함의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시점을 두고 논쟁하던 초대교회 공동체들에게도, 그리고 그로부터 2천 년이 지난 지금의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재림 날짜를 추측하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충성스럽게 이 복음을 전하고 서로 사랑하며, 목양을 통해 교회를 온전히 세우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이 지닌 종말론적이고, 동시에 선교적이며 목양적인 초대”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매년 총회를 준비하거나 새로운 교회 사역을 시작할 때, 우리는 이 말씀을 되새기며“역사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큰 그림” 속에서 우리 개개인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다시금 각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회가 자칫 내부만 바라보고 자기 울타리 안에 안주한다면,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채 왼편이나 뒷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세상에서 조금만 풍요로워지면, 오히려 하나님의 부르심과 복음을 잊고 오락과 유흥에 빠지기도 쉽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21장에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 그리고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영역이니 네가 함부로 간섭하지 말고, 종말론적 의식을 갖고 복음을 전하라.” 이 명령은 현대 사회에서도 유효하며, 교회가 맡은 사명은 ‘안으로는 서로 돌보며 키우고(목양), 밖으로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제자를 삼는 것(선교)’이다. 이것이 매년 새롭게 출발하는 교회의 사역과 총회의 방향을 결정짓는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

교회가 어떤 지역에 뿌리를 내리면, 그 지역 특유의 문화와 계절,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며, 서로를 돌본다. 도버의 아름다운 사계절, 단풍이 물드는 가을 풍경이나 눈 내리는 겨울 풍광이 더 인상 깊게 느껴지는 것은, 거기에 교회의 사역과 기도, 예배와 교제가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교회가 “건설의 시대를 맞았다”는 말은, 물리적 건물의 건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 지역과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 가자”는 의지를 담는다. 그 시작이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는 것”이요, “양을 먹이기 위해 필요한 영적·실천적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요한복음 21장 말씀을 따라 선교와 목양을 함께 꿈꾸는 모든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은, 바로 이 원리로 다음 세대를 기를 학교를 세우고, 열방에 파송된 선교센터를 운영하며, 복음과 사랑을 전파하고자 한다. 결국 이 모든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행보는 요한복음 21장의 “153마리의 큰 물고기”와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아들들(베니 하 엘로힘)인 크리스천 공동체를 전 세계에 확장해 나가는 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에 더욱 분명하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주님의 물음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 영생을 얻었다면, 이제 세상 구원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몰라도, 교회와 성도들은 눈앞에 놓인 선교와 목양의 기회를 붙잡아 열심히 수고해야 한다. 그 수고의 결과로 우리가 사역하는 각 지역(도버를 포함하여 전 세계 어디든)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2세들은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갖춘 믿음의 세대로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으며 주님과 함께 기쁨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의 결론이자,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복음서들의 그랜드 피날레’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의 결말에 이어 21장이 ‘부록’처럼 존재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깨닫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영생을 얻으라’(20장 결론)는 분명한 복음의 핵심 진술 뒤에, 그 믿음을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지침이 21장에 담겨 있다. 그 지침이란 바로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되, 때와 시기에 연연하기보다는 너희가 가야 할 방향(오른편)과 해야 할 책임(내 양을 먹이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라”는 말씀이다. 교회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사역하다가, 종국에는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신랑이신 예수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룰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 ‘153마리의 물고기’처럼 수많은 영혼이 교회 안에 들어오고, 그물(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찢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핵심—전도와 목양—이 요한복음 21장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통해 강조된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세 번째 중요한 흐름인 ‘재림과 종말론적 관점’이 깔려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 21장은 “종말이 언제 도래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살아 있건 어찌하건 네가 알 바 아니니, 너는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말씀을 남겨 둔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주님이 이미 주신 사명(선교·목양)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지, 종말의 때와 시기를 정확히 계산하거나, 그 논쟁에 매몰되는 게 아니다. 초대교회나 현대교회나, 인간은 종종 “주님, 언제 다시 오십니까?”라는 호기심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게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가서, 복음을 전하고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라고 되묻으신다.

그렇다면 교회는 실제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요한복음 21장이 제시하는 길은 분명하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양을 먹이듯, 교회 안에서 서로 돌보되, 바깥으로는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내리듯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이처럼 양육과 선교를 병행할 때,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교회는 ‘찬양’과 ‘감사’의 공동체로 거듭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일이 곧 오늘날 교회의 존재 이유이고, 요한복음 21장의 핵심 정신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요약한다. 나아가 교회가 세상 문화와 교육, 사회 구석구석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역사와 세계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자녀들에게도 심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그리고 종말의 비전을 깨닫지 못하면, 젊은이들은 세상의 유혹과 풍조에 쉽게 동화될 것이며, 교회의 사명 또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요한복음 21장은 복음서 전체의 결론 이후에 주어진 추가적인 장이자,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호수에서 제자들에게 베푸신 기적과 사랑의 대화, 그리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궁극적 사명을 담고 있다.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했던 베드로의 일상적인 고백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시작을 열어 가는 계기가 됐다. 예수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지시하셔서 풍성한 어획을 경험하게 하셨고, 숯불에 생선과 떡을 구워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세 번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통해, 베드로가 지닌 과거의 실패를 회복시키셨으며,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사명을 부여하셨다. 이 대목은 곧 ‘교회 지도자’에게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적용되는 ‘전도와 목양’의 공동 소명이다. 다시 말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교회가 맡은 일은 “그물을 던져 열방을 구원하고,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양들을 성실히 먹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21장이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이며, 장재형 목사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 본문을 통해 받고 있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21장에 기록된 마지막 구절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다 기록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하고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 풍성함의 핵심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 그리고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직접적인 명령으로 요약된다. 교회가 이 명령에 충실히 따를 때, 우리는 개인 구원을 넘어 역사와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거대하고 선한 섭리를 조금이나마 함께 이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천하 만민” 중에서 구원을 얻은 많은 사람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그날을 바라보며, 각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그 방향—오른편”과 “목양”이라는 소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 21장이 오늘, 그리고 내일의 교회에게 던지는 도전이자 초청이며, 결코 흘려듣지 말아야 할 최후의 권면이다.

요한복음 21장 본문의 흐름과 그것이 지닌 신학적·실천적 의미를 중심으로, 장재형 목사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교회 공동체의 과제(전도와 목양, 다음 세대 교육, 세계관 확립)를 아우른다. 그 핵심 결론은 “복음서의 결론 이후에 교회에게 맡겨진 가장 중요한 사명은 전도와 목양이며, 그 방향과 능력은 주님이 이미 마련해 놓으셨으니, 우리는 날마다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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