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 배경
요한복음 18장 12-22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간” 사건은 복음서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다. 이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면, 유대 종교 권력의 속성, 당시의 정치·사회적 배경, 예수님께서 겪으신 불법적이고 부당한 심문, 제자들의 두려움과 실패,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사명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장재형목사가 여러 설교와 강의를 통해 강조해 온 ‘종교 권력의 부패와 그 속에서 여전히 이어지는 구원의 역사’라는 관점은, 이 사건이 단순히 2,000년 전 일어난 종교재판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상당히 깊은 교훈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후, 군대와 천부장, 그리고 유대인들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곧바로 안나스에게 데려간 것은 그 자체로 여러 의미심장한 문제점을 노출한다. 당시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를 보면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 심문받으시는 장면이 주로 강조된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먼저 안나스에게로 연행되었다는 점을 추가로 언급함으로써, 그 재판 과정이 매우 불법적이며 배후에 거대한 종교권력이 얽혀 있음을 드러낸다. 대제사장은 본래 종신직이었지만, 이 시대에는 로마 제국이 유대 땅을 지배하고 있었고, 돈과 정치적 결탁을 통해 대제사장직이 자주 교체되는 부패가 일어났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안나스였다. 안나스는 A.D. 6년부터 15년까지 9년간 대제사장을 지냈고, 이후 자신의 다섯 아들에게도 연이어 대제사장직을 세습시키며 그 막강한 영향력을 지속했다. 그뿐만 아니라 안나스는 사위인 가야바가 공식적인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도 여전히 막후 실력자로 군림했는데, 요한복음 18장 13절이 바로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이 이에 부합한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대목에 주목하며, 겉으로 드러난 대제사장은 가야바였지만 예수님을 잡고 심문한 실제 배후에는 안나스라는 거대한 종교적 카르텔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한다. 안나스가 예수님을 먼저 자기 집으로 데려오도록 함으로써, 합당한 절차나 공식적 자리(산헤드린 공회에서의 공적 재판) 대신 사적이고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님을 심문하려 했다. 이는 율법에 충실해야 할 대제사장 가문이 스스로 율법을 파괴하며, 야음(夜陰)에 음모를 꾸민 부패상을 보여준다. 유대율법에 따르면 산헤드린 재판은 야간에 열 수 없었으며, 반드시 성전 뜰에서 하도록 규정되었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율법을 아주 철저히 지키는 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이 체포된 밤에 곧바로 심문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율법을 공공연히 깨뜨린 사건이었다.
문제는 이 재판이 단순히 밤에 열렸다는 절차적 하자가 아니라, 예수님께 적용하려던 죄목이 애초부터 억지였다는 데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대제사장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여러 번 함정에 빠뜨리려 하거나 신성모독죄로 몰고 가려 했다.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부른 것(요 2:16),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요 2:19),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 등은 그들에게는 결국 십자가형에 처해야 할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언제나 공개적으로 가르치셨고, 은밀한 조직이나 거짓 교리를 전파한 적이 없었다. 바로 그런 점을 요한복음 18장 20절에서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이라고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안나스는 예수님을 은밀히 불러내어 “네 제자들과 네가 가르치는 교훈이 무엇이냐?”(요 18:19)라고 묻는다. 이는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성모독의 증거’를 끄집어내려는 질문이었다. 복음서에 따르면, 유대의 공적 재판에서는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일치하는 증인이 필요했고, 거짓 증언이나 강압적 증언은 무효였다. 게다가 현직 대제사장이 아닌 안나스가 예수님을 신문할 권한 자체가 없었으며, 또 재판 장소가 성전 뜰도 아니었다. 정식 산헤드린 회의도 열리지 않은 시점에서 예수님이 결박된 채 밤에 안나스 앞으로 끌려간 것은, 명백히 법과 율법을 무시한 사건이었다.
이 지점에서장재형목사는 “안나스가 곧 부패한 종교 권력의 실체이며, 그의 내부에 자리한 죄성은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었던 근본 원인이었다”고 지적한다. 안나스 가문이 장악했던 성전은 ‘제물을 팔아 이윤을 취하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었다. 성전 밖에서 흠 없는 제물을 사왔음에도 불합격 판정을 주고, 성전 안에서 비싸게 파는 제물만 구입하도록 유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는 부당한 부담을 지우고, 대제사장 일족이 거대한 이익을 챙기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런 부패를 뒤엎기 위해 성전을 정화하셨고, 결국 그 종교 권력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애려는 음모가 꾸준히 진행되었고, 그 절정이 바로 이 밤의 체포와 신문이었다.
또한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요 11:50)는 가야바의 말은, 정치적·종교적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고자 하는 그들의 공동 음모가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음모의 배후에서 모든 실질적 권력을 쥐고 흔든 이가 안나스였다는 것이다. 결국 안나스에게 먼저 예수님이 끌려갔다는 사실은, 십자가의 비극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종교권력의 은밀한 부패가 뿌리 깊었음을 드러내고, 예수님이 가시밭길을 홀로 걸으실 때 어떤 악의 연대가 작동했는지를 고발하는 장면이 된다.
이어서 본문은 시몬 베드로와 대제사장과 아는 다른 제자가 예수를 따르다가,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를 이끌어 대제사장의 집 뜰로 들어가게 해 준 상황을 설명한다(요 18:15-16). 여기서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으로 묘사되는 이 제자가 누구인지는 본문에서 명시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는 요한 자신일 가능성, 혹은 다른 친분이 있는 제자라는 견해가 있지만, 일각에서는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의 개연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두 명 이상의 증언이 있어야 하는 재판 절차’에서, 예수님 편에서 증언해 줄 수 있는 제자가 필요한 순간이었음에도, 베드로는 두려움으로 인해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요 18:17)고 부인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에서, 베드로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며 그분 곁을 지키고자 했던 ‘용기’ 자체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주님을 부인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증인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미 가야바 혹은 안나스 측은 ‘유다’라는 내부자를 통해 예수님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하고 있었다. 공정한 재판이라면 유다의 말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예수님을 변호할 증인이 필요했다. 그런 맥락에서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는 예수님의 말씀이 가진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곧이어 세 번 부인하게 되었고, 다른 제자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예수님께 불리한 증언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주님의 가르침의 진정성이 제대로 드러날 길이 막혀 버렸던 셈이다.
요한복음 18장 22절을 보면,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라는 폭력적 장면이 연출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안나스의 불법적인 심문에 합법적 절차를 환기시키자, 그 자리에 있던 하속이 예수님을 때리며 모독하는 모습이다. 율법과 진리를 지켜야 할 자리에서, 종교지도자와 그의 하수인은 오히려 폭력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장재형목사는 “진리가 부재한 자리에 폭력이 난무한다”고 분석한다. 오직 거짓과 음모, 부패로 얼룩진 상황에서, 예수님은 묵묵히 그 ‘불법 재판’의 수모를 감당하셨고, 곧 이어 가야바, 빌라도에게까지 끌려가 십자가형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과정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는 여정이었다는 사실이 복음서 전체에서 드러난다.
안나스에게로 먼저 끌려간 사건이 담고 있는 교훈은, 한편으로는 성전을 ‘하나님의 전’이 아닌 ‘돈과 권력의 장’으로 만든 종교적 타락의 무서움을 일깨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그토록 극심한 부패 구조 한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으시고, 종국에는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셨다는 진리를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개인의 구원 이야기를 넘어 공동체의 갱신과 회복, 나아가 참된 성전(주님의 몸)으로서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과정이었다는 점은 이후 초대 교회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의 해설에서 늘 그리스도인의 삶이 주님을 본받아 “어떠한 구조적 불의와 타락 앞에서도 진리를 선포하고자 하는 담대함이 필요함”을 역설해 왔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자칫 ‘안나스의 길’을 걸어가면서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고 권력과 탐욕에 물들 위험성도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모든 맥락에서 핵심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예수님을 통해 ‘헌 성전’이 무너지고 ‘새 성전’이 세워지는 구도다. 예수님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신 말씀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도전이 아니었다. 본래의 성전 제도가 죄악과 탐욕으로 오염되었기에, 예수님이 친히 ‘새로운 성전’으로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죄를 속량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참된 예배와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이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유대 지도자들과 부딪친 근본 원인이다. 안나스는 자신과 일족(一族)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해 성전을 유지하려 했고,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새 성전의 비전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은 그 어그러진 대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되, 그 길은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계획임을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처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간” 본문은 한없이 부패한 종교 권력의 민낯, 진리이신 예수님의 흔들림 없는 태도, 두려움 속에서 무너지는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그 모두를 초월하여 진행되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교차하며 드러나는 장면이다.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의 영적 의미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되짚으며, 오늘날 교회 공동체가 겪는 내부적 부패와 권력화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함을 권면한다. 특히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참혹한 고통과 모욕을 묵묵히 견디시면서도, 한마디 한마디로 율법의 정당성을 되짚고, 종교지도자들의 불법을 정확히 드러내신 장면은, 세상 권력 앞에 굴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는 길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초대한다. 나아가 성도들은 베드로처럼 실패와 부인의 자리로 떨어질 수 있지만, 결국 주님의 사랑과 회복의 손길을 통해 다시금 세워질 수 있다는 사실도 함께 묵상하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안나스, 가야바, 빌라도로 이어지는 불법 재판의 굴레를 통과하심으로써, 십자가 사역을 온전히 이루시는 길의 시작점이 된다. 안나스에게 먼저 잡혀가심으로써, 예수님은 거짓 종교 권력의 본질을 조목조목 폭로하셨고, 동시에 성전과 예배의 참 의미를 다시 일깨우셨다.장재형목사는 “이 땅에 속한 어떤 권력도 진리를 막을 수 없으며, 진리는 그 어떤 억압과 폭력 속에서도 끝내 빛을 발한다”는 점을 이 본문을 통해 설파한다. 안나스가 막후에서 획책한 불법 심문과 거짓 음모는 오히려 주님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더욱 극명히 드러냈다. 그리고 그 결론이란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했고, 예수님은 승리자이시다”라는 복음의 선포다.
따라서 첫 번째 “예수님을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간 종교·역사적 배경과 본문의 심층적 의미”는, 단순히 배경사를 나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작동하는 악한 권력과 부패를 직시하며, 주님이 이를 어떻게 상대하셨는지를 주목함으로써 오늘의 교회와 성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성찰하게 한다.장재형목사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예수께서 철저히 당하신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타락한 성전을 허무는 과정이었으며,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한 구원을 이룩하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 구원은 2,000년 전 한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가운데서 다시금 새롭게 체현되어야 한다. 곧, 우리 자신과 교회가 ‘안나스와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를 끊임없이 점검하고, ‘예수님의 길’을 좇아 부패와 거짓을 버리고 진리와 공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안나스 앞에서 시작된 불법적 심문은 결국 가야바를 거쳐 빌라도 법정에 이르러,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선고받는 국면에까지 치닫는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 고난이 단순히 종교적·정치적 음모의 희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의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이루는 결정적 통로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 고난의 이야기는 교회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다시금 예배와 성전의 의미, 권위와 진리에 대한 태도,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묻는 준엄한 목소리가 된다.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러한 교훈이 요한복음 18장 12-22절 이후로 이어지는 “십자가 길”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즉, 안나스의 뜰에서부터 이미 예수님은 고난받는 메시아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셨고, 그 고난이 곧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복음서 전체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사건이자, 동시에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안나스가 취한 불법 재판, 가야바의 음모, 빌라도의 우유부단 등, 인간의 악과 어리석음이 극단으로 치닫는 국면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은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내가 말하였노라.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요 18:21)며 담대하게 대응하셨지만, 곧이어 주님께 가해진 것은 모욕과 폭력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메시아가 왕이시면서도 고난의 종으로 오실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53장 등)을 상기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힘으로 이 악을 무너뜨리시는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스스로 종의 모습이 되셔서, 부패한 종교지도자와 세상의 권력 앞에서 침묵 가운데 고난을 받으셨고, 그 길이 곧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희생의 길이 되었던 것이다.
둘째로, 이 고난은 성전 제도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 그분이 “참된 성전”임을 드러낸다는 점이 요한복음에서 매우 강조된다.장재형목사는 “안나스가 장악하고 있던 그 낡은 성전 체제, 즉 동물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구약적 제사 시스템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새롭게 갱신되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예수님의 죽음 직후,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마태복음의 기록(마 27:51)은 구약적 희생 제도의 종결과 예수님을 통한 직접적이고 참된 예배의 길이 열렸음을 상징한다. 이처럼 “안나스의 성전”은 결국 무너지고, “예수님이 친히 성전 되시는” 은혜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을 거부한 종교지도자들처럼, 지금의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진정한 임재보다도 자신들의 전통이나 권위를 더 우선시한다면, 안나스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할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셋째로,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드러나는 제자들의 연약함은 오늘 우리에게도 거울이 된다. 인간은 아무리 충성을 다짐해도, 혼자 힘으로는 극한의 두려움과 위험 속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가 쉽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고, 수제자라는 명예를 누렸으며, 심지어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자를 만큼 과감했다. 그러나 막상 안나스의 뜰에서,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라는 질문 한 마디에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요 18:17).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내면을 헤아려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알면서도 동시에 얼마나 인간적인 두려움에 휩싸였는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국 베드로가 이 부인의 죄를 끌어안고 통곡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그를 회복시키셨다(요 21장). 이는 제자가 비록 깊이 실패하고 넘어질지라도, 주님은 여전히 그를 붙잡고 다시금 제자로 세우신다는 소망의 메시지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앙 생활 속에서 “때로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태도나 말로 부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서는 자를 주님은 한없이 받아주시고, 다시금 큰 일을 맡기신다.
넷째로, 이 본문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 권력과 맺는 관계, 그리고 내부적 권위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부패하고 타락한 안나스와 그 일족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욕심의 방편으로 삼은 자들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거짓 종교심과 막대한 부로 성전을 오염시켰다. 예수님은 이들과 타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성전을 정화하시며 진리로 그들의 죄를 고발하셨다(요 2장). 교회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때로는 세상의 권위(정치, 경제, 문화 등)와 부딪히거나 협력해야 할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 교회가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안나스 일가처럼 “거룩한 외양”만 취한 채 실상은 이익과 권력에 영합한다면, 오늘날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역할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장재형목사는 여러 설교에서 “교회의 순수함과 투명성,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하며, 성도 각자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하여, 결코 교권주의나 세속적 욕망으로 복음을 가리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다섯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결국 ‘승리의 관문’이 된다. 안나스의 음모, 가야바의 재판, 빌라도의 심문을 거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모든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실 때, 이미 사단과 죄의 세력이 패배하였음을 의미한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은 생명의 능력을 드러내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심으로 교회 시대를 여셨다(요 20장). 이는 종교적·정치적 권력이 협잡하여 예수님을 죽였지만, 참된 진리는 결코 꺾이지 않고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수난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희생이며, 결과적으로는 보화(寶貨) 같은 부활의 소식을 안긴다는 점에까지 시선을 확장해야 한다.
결국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날 교회가 ‘부패한 종교 권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진정한 예배와 신앙이란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든다. 또한 “베드로의 부인”과 “제자들의 도망”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되,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다시 부르시고 용납하셨듯이, 실패한 자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새롭게 쓰임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는 철저히 주님의 은혜로만 회복되고 재무장될 수 있으며,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역설한다. 그분만이 우리의 기틀이자 반석이 되시므로, 어떤 인간적 실수나 부패, 악행이 일시적으로 발호할지라도, 결국 진리의 길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때로는 종교적 시스템과 충돌하는 과감한 개혁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예수님은 성전을 뒤엎으신 사건(요 2:13-22)을 통해, 성전이 본래 목적을 상실하고 장사치들의 소굴이 되었다면 단호하게 바꿔야 함을 보이셨다. 그 결과 종교 권력에게 미움과 박해를 받으셨으나, 결코 주저하지 않으셨다. 교회가 ‘개혁’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는, 바로 이런 예수님의 결기를 떠올려야 한다. 안나스 같은 부패 지도자가 자리하고, 그 주변에 간신배와 부당한 하수인이 가득하다면, 교회는 스스로를 갱신하고 정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철저히 복음과 진리의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적인 수단만으로는 교회의 타락을 막기 어렵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개혁이 추진될 때, 그 길은 힘들고 외로워 보여도 궁극적으로 승리로 귀결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맥락에서,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의 빛을 비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안에서부터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설파한다. 만일 교회 내부가 타락하고, 지도자들이 욕심과 권력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곳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은 변질되기 십상이다. 그 결과,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복음 전파의 문이 막히게 된다. 안나스에게 붙들린 예수님의 모습을 생생히 묵상하면, 교회의 부패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깨닫게 된다. 주님이 직접 도마뱀 굴 같은 성전 기득권자들의 손에 넘겨지셨듯이, 오늘날도 교회 안에 도사린 욕망은 스스로 교회를 병들게 하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한 영향력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그렇다면 이런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가장 우선적인 표준으로 삼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대제사장이나 권위자에게도 타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집중하셨다(요 4:34). 오늘날 교회가 전통이나 인간 지도자의 지시에 매몰되어, 성경의 본래 정신과 벗어난 길을 걷고 있다면, 과감히 되돌아와야 한다.
둘째,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며 공동체적인 회개가 필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완전히 변했던 모습(행 2장)은 교회가 살아나는 핵심 동력이 “성령의 충만함”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교회가 인간적 계획이나 프로그램보다 성령의 역사에 민감해지고, 죄를 회개하며 돌이킬 때,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셋째, 서로를 정죄하거나 상처 주는 일보다, 말씀의 진리에 근거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요 13장) 사랑의 새 계명을 주신 것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이 사랑에 있음을 분명히 하신 행동이다. 안나스 같은 폭정형 리더십과는 정반대로, 예수님은 종이 되신 리더십의 본을 보이셨다. 따라서 교회 안에서 권력을 쥐고 남을 지배하려는 태도는 예수님의 본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넷째, 교회 재정이나 권한구조 등 제도적 측면에서 투명성과 책임성을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 고대 성전에서 제물을 사고파는 행위를 악용했던 안나스 일가는, 거짓 관행을 제도적으로 고착화시켜 큰 이득을 취했다. 교회 역시 예산·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지 않으면, 권력과 부를 탐하는 자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고, 결국 내적 부패를 초래하게 된다.
이러한 제도적·영적 차원의 개혁을 통해, 교회는 다시금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예수님이 “은밀하게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다”(요 18:20)고 당당히 말씀하신 것처럼, 교회 역시 공의롭게 행하고 빛 가운데 일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의 비난과 의심 앞에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고, 제자들이 결국 두려움을 벗고 오순절 이후 용감하게 복음을 전파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진정한 도구로 쓰임받게 된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에 담긴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단지 1세기 유대교의 부패만을 탓하며 끝낼 일이 아니다. 안나스가 보여 준 부패와 왜곡된 종교 권력의 작동 방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되풀이되는 인간 죄성의 대표적 사례다. 교회사의 여러 어두운 국면에서, 그리고 오늘날도 세계 각지의 교회나 종교 조직 안에서 “안나스 유형의 지도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 자신 역시 부패한 시스템에 가담하고 있지 않은지, 예수님의 진리에 충실하게 서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장재형목사는 줄곧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 앞에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해야 하며, 외형적 성공이나 수적 부흥이 아니라, 예수님의 길에 충성함이 최우선 기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동시에 성도 개인의 차원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인간적 연약함을 깊이 실감한다.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왔어도, 막상 우리에게 불이익이 닥치거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라면 예수님을 부인할 가능성이 누구에게나 도사린다. 그렇기에 우리의 힘과 결심만으로는 온전한 제자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 베풀어 주시는 회복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점에서 베드로는 우리의 자화상이고, 예수님이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용서하시고 다시 사명을 맡기시는 장면(요 21:15-17)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된다. 설령 우리가 한 번, 두 번,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다 해도,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주님은 그 부인을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다.
결론적으로,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요 18:13)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 고난 서사의 시작이며, 동시에 기득권 종교권력의 사악함과 예수님의 참된 권위가 극명히 대비되는 결정적 장면이다.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통찰하며, 교회와 성도가 예수님의 길을 본받아 구조적 부패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진리를 증거해야 하며, 부패한 모습을 발견할 때에는 성전정화의 심정으로 회개와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님이 보여 주신 고난의 순종이야말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으로서의 사명 완성의 길이었으며, 이 길이 궁극적으로는 부활과 승리로 이어진다는 복음의 소망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당하시는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사건 전체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십자가는 단순한 처형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절대적 사랑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떤 인간 권력도 가로막을 수 없었다.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해 온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었다면 기독교의 구원 메시지는 완성될 수 없고,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죽음은 비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핵심 축을 이루며, 이 사건을 통해 인류가 새 생명과 영원한 소망을 얻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안나스와 같은 부패한 영적 리더십을 경계하고,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 복음을 지키고 전파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부당한 모욕과 고통 속에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진리를 주장하셨던 장면을 기억하면서, 세상과의 타협과 자기합리화를 부숴 버리고, 성령 안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살아 내야 한다. 그리고 혹여 실패하거나 두려움에 져서 주님을 부인한 자들이 있다 해도, 베드로가 다시 일어섰듯이, 누구든 회개하고 주님께 나오면 새 출발이 가능하다는 소망을 붙드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다.
요한복음 18장 12-22절의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차원의 성찰을 제공한다. 부패한 종교권력의 민낯,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걸어가신 예수님의 고난과 담대함, 연약한 제자들의 실패와 회복, 그리고 ‘헌 성전’을 무너뜨리고 ‘새 성전’을 여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함께 어우러진 텍스트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본문을 통해, 교회란 오직 예수님을 머리로 삼아야 하며, 어떤 인간 권위도 진리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재차 깨닫게 된다. 또한 믿음생활에서 실패와 부끄러움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임재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일어설 수 있다.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고난의 길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길,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길이기에, 성도와 교회도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 모든 세속적·종교적 부패를 뛰어넘는 영적 승리를 누릴 수 있다”고 요약한다. 이것이 곧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라는 본문이 지금도 우리에게 살아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다. 그 길에 동참하는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늘 기억하며, 오늘의 시대 속에서 복음의 빛을 계속 밝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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