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비처럼 보이는 사랑, 복음의 향기가 되다 – 장재형 목사

마가복음 14장의 향유 옥합 사건을 다룬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허비처럼 보이는 사랑의 신비와 가롯 유다의 비극, 그리고 예수의 장례를 예비한 베다니 여인의 헌신을 신학·예술·음악·고전과 연결해 입체적으로 해설한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과거 상처와 격리의 공간이 은혜와 감사의 식탁으로 변한 복음의 심장을 드러낸다. 이 자리로 이름 없는 여인이 들어와 순전한 나드 향유 옥합을 깨뜨리고, 값비싼 향유를 모두 예수께 쏟아 붓는다. 이는 단순한 예의가 아니라 여인의 존재와 미래 전체를 내어놓는 결단이자, 사회적·경제적 논리를 넘어선 “사랑의 과잉”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사랑을 “허비”로 규정하며 계산한다. 요한복음은 그 목소리의 중심에 가롯 유다가 있었음을 밝히고, 그의 비난이 진정한 정의감이 아니라 탐욕에서 비롯되었음을 폭로한다. 장재형 목사는 사랑과 허비를 구분하지 못하고 가격표와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제자들의 시선을, 복음서와 예술·음악 속 대비(유다의 불편함과 마리아의 헌신)와 연결해 설명한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제자들의 항의 합창 뒤에 예수의 “그가 내 장례를 준비하였다”는 선언을 배치하듯, 예수는 이 허비를 자신의 죽음을 예비한 아름다운 헌신으로 재해석한다.

여인의 행동은 순간적 감정이 아니라 십자가를 직감한 영적 통찰이다. 향유는 장례용 향료였고, 여인은 다가올 죽음을 앞당겨 미리 예수께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다. 이 무모한 사랑은 곧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기 몸을 깨뜨리고 피를 쏟으실 운명의 예표이기도 하다. 설교는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로 흐르며, 하나님의 사랑이 언제나 효율과 합리를 넘어선 “비효율적 풍성함”임을 상기시킨다. 문제는 효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사랑보다 먼저 기준이 될 때이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쉽게 ‘유다적 합리성’에 포획되는지 경고한다. 예배·헌신·재정·사역을 평가할 때 우리는 성과와 효율의 언어를 우선시하고, 사랑이 식을수록 계산은 더 정교해진다. 그러나 예수는 여인의 비합리적 행동을 “내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시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녀의 이야기가 함께 기억될 것이라 약속한다. 그의 설교는, 제도·기관·사역을 세우는 자신의 삶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베다니 여인의 무조건적 사랑을 잃는 순간 유다의 계산과 다르지 않은 껍데기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본문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옥합을 깨뜨린 여인인가, 허비라 비난하는 제자인가, 아니면 사랑의 현장을 불편해하며 결국 등을 돌린 유다인가. 주님의 사랑이 실제 사건으로 내 안에 자리할 때, 우리는 계산을 멈추고 자신의 옥합을 깨뜨릴 용기를 얻게 된다. 예수께서 문둥이 시몬의 집을 기꺼이 찾아오신 사랑, 그녀를 변호하신 사랑, 배반할 제자들을 끝까지 품으신 사랑은 모두 ‘허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허비가 아니었다면 복음도 없다. 그러므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아까워하며 붙들고 있는가”로 바뀐다. 시간이든, 재정이든, 안전한 미래든, 베다니 여인의 옥합은 결국 우리 각자가 주님 앞에서 깨뜨려야 할 삶의 상징이 된다.

예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셨다. 베다니의 향기는 이미 시몬의 집을 채웠고, 이제 우리의 일상과 예배 속을 채우기를 기다린다. 사랑을 허비라 부르지 않고 기쁨으로 선택하는 이들의 삶이야말로 세상 앞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복음의 증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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