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 공동체 내에서 분쟁이 발생할 때,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상대방을 비난하는 감정의 언어를 내뱉을 것인가, 아니면 복음의 언어로 서로를 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합니다. 빌립보서 2장 1~5절을 통해 볼 때, 교회 갈등의 해소는 단순한 처세술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비롯된 ‘그리스도의 겸손’이라는 영적 체질 개선의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대개 사소한 오해에서 시작된 다툼은 ‘내가 맞다’는 확신이 ‘상대는 틀렸다’는 공격으로 변질되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바울은 누가 옳은지 판가름하기에 앞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요청하며 우리의 시선을 전환시킵니다. 갈등 속에서 시선이 바뀌면 언어가 변하고, 비로소 관계의 방향도 수정되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서신, 그 속에 감춰진 공동체의 아픔
빌립보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글이 감옥에서 쓰인 ‘옥중서신’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갇힌 몸임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은 시종일관 기쁨(Rejoice)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기쁨이 외부 환경이 아닌 복음의 결과물임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위협하는 요소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가장 큰 고통은 감옥의 냉기가 아니라 사랑하는 교회의 분열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며 공동체의 연합을 간절히 호소합니다. 이는 개인적인 감상이 아니라, 교회가 무너지면 복음의 전진도 멈춘다는 영적 위기감을 반영한 목회적 탄식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오늘날 우리가 화려한 예배 형식에만 치중한 채, 성령의 교제와 사랑의 위로가 사라지는 내부의 균열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은지 날카롭게 묻습니다.
관계와 환대로 시작된 교회, 조직과 파벌로 변질되다
사도행전 16장에 나타난 빌립보 교회의 태동은 매우 역동적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로서 철저히 로마화된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복음은 가치관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바울이 강가 기도처에서 만난 루디아와 여인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루디아의 집이 ‘하우스 처치’가 된 사건은 초대교회가 제도적 조직이기에 앞서 관계와 환대로 숨 쉬는 공동체였음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헌신과 눈물, 기도로 세워진 집이었습니다. 이러한 초심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딱딱한 조직이 되고, 조직은 이내 파벌로 갈라지게 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동역의 깊이만큼 깊어진 상처
빌립보 교회 탄생에 핵심적이었던 여성들의 존재감은 시간이 흐른 뒤 유오디아와 순두게의 갈등이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것이 살아있는 공동체에서 피할 수 없는 긴장이라고 분석합니다. 사역이 깊을수록 기대치가 높아지고, 그만큼 상처도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실명을 언급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동일한 무게로 양쪽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이는 법적인 판결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처방입니다. 교회는 죄를 묵인하지 않으면서도 자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닮은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자비가 권면의 본질입니다.
갈등을 녹이는 네 가지 영적 토대
빌립보서 2장 1절이 제시하는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는 갈등 해결을 위한 가장 강력한 도구입니다.
- 권면: 잘못을 파헤치는 칼이 아니라, 영혼을 회복의 방향으로 돌려세우는 설득입니다.
- 사랑의 위로: 상대를 정죄하기 전에 한 인간으로 대우하는 복음적 온기를 부여합니다.
- 성령의 교제: 인간적인 타협을 넘어, 상대를 ‘문제’가 아닌 ‘기도의 대상’으로 보게 합니다.
- 긍휼과 자비: 징계의 언어로 얼어붙은 공동체의 기류를 다시 녹여냅니다.
바울이 말하는 “마음을 같이 하라”는 의미는 성격이나 취향의 통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각자의 위치를 조정하는 ‘방향성의 일치’입니다. 나를 변호하고 내 공로를 내세우려는 본능적 계산서를 십자가 앞에 내려놓는 것, 즉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실재적 능력입니다.
케노시스: 내려감이 곧 새로움의 길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찬가’는 갈등의 해법을 그리스도론의 핵심으로 연결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종의 형체로 낮아지신 ‘비움(Kenosis)’의 신비는 우리가 왜 낮아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분쟁의 원인은 대개 ‘내가 낮아지면 손해 본다’는 두려움에 있지만, 복음은 낮아짐이 곧 구원의 방식임을 선포합니다. 예수의 낮아지심을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이셨듯, 교회 안에서의 겸손은 하나님 나라의 역설을 믿는 행위입니다. 분쟁의 순간에 상대의 얼굴이 아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해결의 시작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투영된 화해와 치유의 미학
-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소란스러운 제자들 사이에서 고요를 유지하는 그리스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의 안정감을 보여줍니다. 중심을 권력이 아닌 십자가에 둘 때 분열은 멈춥니다.
-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 어린양의 희생은 우리가 취향이 아닌 ‘십자가의 피’로 맺어진 가족임을 일깨웁니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죽은 아들을 안은 마리아의 비애는 갈등으로 상처 입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정죄가 아닌 공감의 언어임을 시사합니다.
-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상처 입은 그리스도의 모습은 고통받는 이들에게 가식적인 위로보다 더 깊은 치유를 선사합니다.
회복의 실제: 말의 속도를 늦추고 경청하라
실질적인 회복은 언어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갈등 상황에서 말을 서두르지 않고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은 그를 형제로 인정하는 신학적 행위입니다. 경청을 통해 자신의 확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깨달을 때, 권면은 비로소 길이 됩니다. 또한 중재자는 재판관이 아닌 목자의 심정으로 임해야 합니다. 한쪽을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화해의 문은 닫힙니다. 교회의 거룩함은 배타적인 정결함이 아니라, 회개를 가능케 하는 포용적 자비에서 증명됩니다.
십자가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했듯 “모두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는 의식은 지체의 통증을 함께 느끼는 교회의 본질과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 분쟁 해결은 몇몇 사람을 입다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관계 맺는 법을 다시 배우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결국 빌립보서 2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침묵을 강요할 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때 찾아옵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주님을 드러내려는 용기, 이기려는 마음 대신 살리려는 마음이 공동체의 공기를 바꿉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갈라놓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로 묶는 매듭입니다. 이 복음의 흐름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때, 모든 갈등은 힘을 잃고 공동체는 비로소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