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건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모든 복음서가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강조하고 있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27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부터 운명하시는 순간까지를 비교적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기록의 이면에는 인간의 글로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고난과 동시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전하는 십자가의 의미와, 그 고난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17절에서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골’이라는 뜻을 가진 골고다는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장소로서, 당시 로마 제국이 극형을 집행하던 언덕이었습니다. 사형 제도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으로 손꼽히던 십자가형은, 죄수가 자신이 못 박힐 십자가를 직접 지고 처형지까지 가야 했다는 점에서 인간의 참혹함이 극에 달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악의와 증오가 가득한 역사적인 형벌을 스스로 감당하셨는데, 요한은 이를 매우 간결하게 기록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길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택하신 고난의 길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해석하면서, 인간의 죄와 그 죄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거룩하고 무거운지를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진하여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나아가시는 과정은 단순히 역사적 처형 과정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죄와 사망의 억압에서 해방시킬 구속의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위대한 사랑이자 동시에 지독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이 때로는 침묵하고, 때로는 매우 짧게 기록함으로써, 그 무거운 진실을 담아내려 했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합니다.
당시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네 명의 로마 군졸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이 받을 처형에 대한 죄목이 적힌 패를 목에 걸고, 최대한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먼 길을 돌아 처형장으로 향했습니다. 그 여정은 죄수에게 마지막 변호의 기회를 줄 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조롱과 고통, 수치심을 극도로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이 적힌 패 역시 십자가 위에 내걸렸고, 많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 패가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에 상처를 준다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빌라도는 이를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이야말로 참된 왕이심을, 비록 조롱의 목적이었을지라도 세계 역사에 각인시키는 선언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7-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으로 가시는 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더욱 자세히 묘사합니다. 군병들은 홍포를 예수님께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운 뒤 희롱하고 침을 뱉었으며, 갈대로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런 뒤 주님께 무거운 십자가를 지워 처형장으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셨고, 사람들을 치료하고 사랑을 가르치셨으나, 결국에는 거짓된 무리들의 증오 속에서 가장 극심한 형벌을 당하신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주목하며, 예수님의 겪으신 고난이 단순히 육체적 고통을 넘어, 인류가 지닌 모든 죄와 악의를 짊어지신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로마 군병들, 유대 종교 지도자들, 심지어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으로 예수님을 조롱하던 이들 모두가 인간이 가진 악함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조롱과 폭력을 피하지 않으셨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죄 사함과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이 장재형목사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구레네 사람 시몬의 등장은 복음서에서 매우 인상적인 장면을 이룹니다(마 27:32, 막 15:21). 예수님께서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지셨을 때, 로마 군병들은 시몬에게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성경은 구레네 시몬이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언급을 넘어서서, 훗날 루포가 교회 안에서 중요하게 언급될 만큼(롬 16:13) 시몬의 가정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큰 변화를 경험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통해,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일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는 특별한 통로가 되며,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사건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시몬은 단지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러 왔을 뿐이지만,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면서 “내가 누군가의 죄를 위해 대신 짐을 지는 삶”의 실체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개인의 거룩한 변혁을 일으키고, 가정과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3-34절에서, 예수님께 주어진 쓸개 탄 포도주가 언급됩니다. 이는 일종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음료로서, 십자가형을 당하는 자가 겪는 극심한 고통을 어느 정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맛보시고는 거부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부분적으로만’ 짊어지거나 ‘고통을 무디게 하면서’ 감당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로부터 오는 모든 형벌과 고통을 그대로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축소하지 않으셨고, 거룩한 사명으로서 완전히, 전적으로 담당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친 대목은, 예수님의 고난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구약의 유월절 양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보호했던 것처럼, 예수님이야말로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기 위해 자신을 대속제물로 내어주신 어린 양이 되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이 ‘대속 사상’을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상기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이라 하는 골고다로 걸어가신 그 한 걸음 한 걸음은, 사랑의 행진이자 인간 역사 전체를 뒤바꾸는 구속의 서곡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던 말씀이, 십자가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구타하고 조롱하고 침 뱉는 이들을 향해서도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이 완벽히 일치함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강조하면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의 삶과 말씀의 통합성, 곧 말과 행동이 분리되지 않는 모습을 배워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말로만 용서를 외치거나, 말로만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에게조차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실천적 제자도가 십자가에서 드러난 가장 아름다운 진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갖는 또 다른 중요한 면모는,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성취된다’는 데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죄에 대한 심판을 요구하는 한편, 우리 인간에게 베푸시는 무한한 은혜와 자비가 예수님의 피 흘림을 통해 완성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이 둘은 서로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안에서 하나의 위대한 서사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한다”(막 10:45)고 선언하셨고, 실제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길을 여셨습니다.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 그 길이 바로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피로 열렸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요체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러한 구원의 본질을 설명함에 있어, “십자가형은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를 피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인간적인 한계나 두려움을 초월했다는 뜻이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조차(롬 5:8)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셨다는 놀라운 은혜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선언하신 “다 이루었다”(요 19:30)는 말씀은 바로 그 모든 고난과 사랑의 대장정을 완결지으시는 함축적인 선언입니다.
결국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담긴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수백 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구원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에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어 주심으로, 우리가 무거운 죄의 십자가를 영원히 지고 있을 필요가 없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도 그분을 닮은 십자가의 삶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두고,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짐을 덜어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아 ‘자기 부인’의 길로 나아가게 하셨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세상의 가치관과는 정반대되는 ‘하나님 나라의 길’입니다.
종합해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구원을 완성하신 결정적인 사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사건을 통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얻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결코 추상적인 교리나 교회의 상징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예수님의 삶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십자가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담겨 있고,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본보기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묵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죄와 무능을 바라보는 동시에,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참 생명으로 나아갈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요한복음 19장 17-27절이 전하는 깊은 의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서 “십자가 없이 구원은 없으며, 고난 없이 영광은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길이란,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내어드리는 헌신과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대속의 은혜가 십자가 안에 분명히 있고, 그 은혜는 시대를 넘어 모든 이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을 활짝 여신 분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모든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우리는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을 통해 되새길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에서 드러나는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 구원은 단지 죄사함으로 끝나는 개념이 아니라, 우리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이 교리적 지식으로 머물지 않도록, 구체적인 삶의 적용점을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까지 직접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보여주신 첫 번째 핵심 가치는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마 26:39)라고 기도하셨으며, 끝내 아버지 하나님의 계획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함과 세속적 성공을 추구하느라 종종 잊어버리는 이 ‘희생적 순종’을, 십자가 묵상을 통해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적 삶의 원리임을 증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순간에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사랑이 그저 감상이나 도덕적 선행 수준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을 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자기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고통과 갈등이 있는 현실 세계에서 결코 쉽지 않지만,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랑의 절정과 능력을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 적용점은, ‘자기 부인의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미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결국 각 사람의 몫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기심과 세상 욕망으로 인해 십자가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습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예수님의 순종과 희생을 본받아‘자신을 부인하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은혜를 힘입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영적 여정입니다.
네 번째로, 예수님의 고난은 ‘연약한 이들과 함께 고난 받는 연대’를 요청합니다. 십자가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조롱당하고 버림받은 예수님의 모습을 상기시키지만, 동시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신 ‘임마누엘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떠올릴 때마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을 위해 행동하는‘실천적 자비’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전하는 모습이야말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내가 너희를 사랑한 줄을 세상이 알리라”(요 13:35)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난은 ‘겸손’의 길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빌립보서 2장 6-8절은 예수님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는 신성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가장 낮은 자리,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까지 내려오셨음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분의 신성에 손상이 가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드러내는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임을 인정하되, 십자가 묵상을 통해 자기 비움과 겸손의 가치가 얼마나 커다란 영적 유익을 가져다주는지를 깊이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부활의 약속’을 전제합니다. 고난과 죽음이 결코 최종적이거나 영원한 운명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완성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일부라는 점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집니다. 장재형목사는 예수님의 고난이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졌듯이, 우리 인생의 고난 또한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의미 있는 여정이 되리라는 소망을 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없는 부활도 없고, 부활 없는 십자가도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고통과 수치로 끝나는 듯 보이지만, 그 너머에는 예수님의 빈 무덤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측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한 종교적 상징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은 우리도 따라가야 할 제자도의 길이기에, 장재형목사는 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는 삶을 뜻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겸손히 다른 이들을 섬기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며, 사랑이 필요한 곳에 자신을 내어주며, 심지어 반대하고 미워하는 이들까지 품으려 애쓰는 생활 양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세상은 비로소 “아, 이들이 말하는 복음이 실제로 사랑과 희생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교회 공동체가 십자가의 가르침을 어떻게 구현해 나갈 수 있는지를 중요한 과제로 제시합니다. 많은 교회들이 자신들의 조직과 프로그램, 외적 성장에 몰두하다 보면, 십자가의 정신을 놓쳐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뿌리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있고, 그 중심에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주님의 새 계명이 있습니다. 이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각 사람의 삶과 공동체의 문화 속에 녹아들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친절을 베풀고, 갈등이 생길 때는 용서와 화해를 실천하며, 세상의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길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배웁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행사된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단지 착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몸소 이루신 분입니다. 죄 없는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고, 그 대가는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역설을 발견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핵심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기적과 가르침은 결국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절정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섬김, 거룩함과 능력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부활로 이어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그 길이 결코 실패나 패배가 아니라, 가장 위대한 승리였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죄인이나 다름없이 처형된 예수님의 모습은 패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바로 그 사건을 통해 사망의 권세가 깨지고 죄의 독이 해소되는 ‘영적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간적으로 2천 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구원이 여전히 유효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그 사랑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이유로 복음 전도의 핵심이 늘 “십자가와 부활”에 맞춰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설득력만으로는 사람들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으나, 십자가 사건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순간 사람의 내면이 새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종종 우리 자신의 무력함과 실패, 그리고 죄악을 볼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십자가 위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와 치유, 그리고 희망을 발견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에서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폭로하지만 동시에 용서와 구원을 선포한다”고 요약합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그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며, 동시에 우리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우리의 삶이 복잡해질수록, 세상의 가치관이 점점 더 쾌락과 이기심을 장려할수록, 십자가가 보여주는 겸손과 사랑, 희생과 섬김은 더욱더 강력한 반문으로 다가옵니다. 장재형목사는 현대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 중심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을 묵상하고,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정신을 실천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이 인간 문화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생명력을 갖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듯이, 때로는 우리도 ‘내키지 않는 헌신’의 상황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강제성이 오히려 은혜의 시작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많은 사람이 교회 봉사나 섬김을 강요로 느끼거나 부담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합니다. 내 자유 의지로는 선택하지 않았던 ‘십자가의 짐’을 지는 일이 뜻밖에도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깊게 하고, 믿음을 성장시키는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우리의 일상과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주일 예배 때 한 번 듣고 마는 교리도 아니며, 사순절에만 잠시 애도하는 역사적 사건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능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진리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로 시작하여 십자가로 끝나는 삶, 그것이 곧 제자도의 완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그 어떤 거창한 업적이나 행사보다도,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 순종하고 사랑하며, 심지어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핵심임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할 때마다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요소는 ‘회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희생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죄에 무감각하거나, 불의와 악을 방관한다면, 십자가의 가치를 왜곡시키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주셨지만, 그 자유는 방종의 도구가 아니라 의와 사랑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거듭 강조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바울의 경고(고후 6:1)를 상기시킵니다. 회개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삶의 방향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구원의 확신, 죄사함, 새로운 삶의 능력,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는 사랑의 동기, 겸손과 순종, 나아가 부활의 소망까지,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고난에서 비롯됩니다. 장재형목사는 “골고다 언덕이야말로 인간 역사의 중심점”이라고 표현하며, 거기서 흘린 예수님의 피가 세상의 온갖 죄와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의 원천임을 가르칩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선포합니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십자가 구속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나, 자신이 잘났다고 여기는 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얻어지는 선물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우리의 어떠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의지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온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바꾸어 놓은 절대적 진리의 사건입니다.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처형 장면은, 그 무거운 의미와 사랑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가 단지 바라보는 데서 멈추지 말고, 그 길에 실제로 동참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우리의 일상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증언하는 무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길의 정신을 가슴에 품을 때,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만 갇힌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실천적 영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을 장재형목사는 “사랑 안에서, 진리 안에서, 겸손히 섬기는 교회 공동체”라고 지목합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워질 때, 세상은 십자가가 단순히 두 개의 나무토막이 교차된 처형 도구가 아니라, 전 인류를 살리는 생명의 통로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현장에서 우리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정말로 모든 민족과 열방의 왕이심을 삶으로 증언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시대를 초월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억눌릴 때마다, 혹은 길을 잃은 것 같은 고난의 한복판에 있을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이 어떤 길을 여는지를 알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복음의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강조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이나 철학도 죽음과 죄를 넘어서는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깬 영원한 승리를 우리에게 안겨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쉴 때, 우리는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섬기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장면을 조금씩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틀어 장재형목사는, 십자가의 본질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믿음의 근간임을 누누이 역설합니다. 예수님의 희생 없이는 구원도 없고, 예수님의 사랑 없이는 우리가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단지 교회의 벽에 걸린 상징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긴 고난과 희생, 그리고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서 날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가 우리 영혼의 중심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1세기 유대 땅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의 드라마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드라마를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그 한복판에 참여하는 배역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무대 위에서, 우리의 역할은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고, 그분이 이루신 구원을 삶으로 드러내며, 세상을 향해 그 사랑을 펼쳐 나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십자가 영성은 바로 그러한 참여와 실천을 통해 완성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다시금 우리 각 사람의 심령에 살아 역사하실 때, 우리는 죄악과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서로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 19장 17-27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복음의 정수이자 제자도의 뿌리로 강조합니다. 주님이 직접 지신 십자가, 그리고 그 무게를 덜어 주려 했던 마취제마저 거부하시고 온전히 고통을 감당하신 모습에서, 우리는 죄인 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렬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또한 구레네 시몬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길에 동참해야 할 존재임을 상기시킵니다. 그 길은 고난의 길이지만, 동시에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승리의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길을, 십자가를 붙들고 함께 걸어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와 생명,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증거하는 공동체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라는 성경 본문의 오늘날 의미이며,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가르치고 선포하는 메시지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변해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골고다로 나아가셨다는 사실은 결코 희미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통하여 구원받은 우리도 역시 십자가의 정신을 붙들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이 땅과 우리의 삶에 참되고 영원한 통치자로 임하신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고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