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장재형(장다윗)목사의 신학적 사유 안에서 교회는 정적인 제도나 조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로서의 역동적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그의 에베소서 4장 13절 강해는 바로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심장부를 해부하는 지적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는 이 한 구절은, 장재형 목사의 해석을 통해 개인의 영적 성숙을 넘어 교회의 존재론적 목표와 그 실현 경로를 제시하는 거대한 신학적 아키텍처로 확장된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기독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으로 조망하면서, 특히 종말론과 교회론을 하나의 변증법적 짝으로 설정하는 독창적 헤르메네틱스를 선보인다. 이 관점에서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자들의 회집을 넘어, 종말론적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이 땅 위에 선취하고 건설하는 역사적 전위대(avant-garde)로서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해석은 마태복음 13장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비유—눈에 띄지 않는 겨자씨가 거목으로 자라나고, 소량의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리는—와 동일한 성장 원리가 교회의 본질임을 역설한다. 이는 세상을 단번에 전복시키는 열광주의적 종말론을 지양하고, 내재적 생명력으로 점진적이고 필연적으로 성장하는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적 본질을 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확히 그 궤를 같이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자라남’이라는 동사에서 교회의 가장 근원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며, 인체의 각 지체가 상호 유기적 관계 속에서 전체의 생명을 영위하듯, 다양한 은사를 지닌 성도들이 그리스도라는 머리 아래 하나의 생명 공동체로 결합하여 끊임없이 성숙해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설파한다.

이러한 교회의 동력학적 성장을 추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으로 장재형 목사는 본문이 제시하는 두 가지 축, 즉 ‘믿는 것’과 ‘아는 것’의 변증법적 통일을 제시한다. 이는 그의 신학에서 신앙의 실존적 차원과 이성적 차원이 어떻게 상호 침투하며 성숙을 이끌어내는지를 보여주는 핵심 논리이다. 먼저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assent)를 초월하는 차원으로 규정된다. 갈라디아서 3장에 대한 깊이 있는 주해를 바탕으로, 그는 믿음을 인간이 창안한 사상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라는 궁극적 진리, 즉 ‘지혜’에 대한 전인격적 수용 행위로 해석한다. 이 계시된 지혜 앞에서 인간은 실존적 결단을 요구받는다.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나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는다”는 예수의 단언적 선포처럼, 이 진리를 영접할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의 양자택일적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로마서 10장 10절(“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을 근거로, 이 수용이 머리가 아닌 ‘마음’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속적 진리는 본질상 ‘사랑’이기에, 이는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의 관계로만 체화될 수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의 내면세계로 유입되는 유일무이한 통로로서, 모든 영적 성장의 존재론적 출발점이 된다.

반면, ‘아는 것’은 이 믿음으로 시작된 구원의 서사를 더욱 깊고 풍성하게 만들어가는 지속적인 지성의 여정이다. 이 ‘앎’은 명제적 지식의 축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는 믿음으로 받아들인 그 사랑의 진리를 인격적 관계와 삶의 경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체득해나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과 동의어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과정을 ‘성숙(Maturity)’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바울 사도가 말한 ‘충만함’과 동일시한다. 즉,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단회적으로 수납했다면, 그 이후의 신앙 여정은 성령의 조명 아래 그 은혜의 깊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를 탐구하며 인격 전체가 성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히브리어 ‘야다(יָדַע)’가 지적 앎을 넘어 ‘경험하다’, ‘사랑하다’와 같은 관계적 의미를 포괄한다는 점을 환기시키며, 기독교의 ‘앎’이 본질적으로 ‘사랑의 지식(knowledge of love)’임을 역설한다. 이 앎의 여정 속에서 신자와 교회는 비로소‘믿음’이라는 뿌리와 ‘지식’이라는 줄기가 조화롭게 자라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믿음 없는 지식은 지적 교만으로 귀결될 수 있으며, 지식 없는 믿음은 맹목적 광신에 머무를 위험이 있기에, 이 둘의 유기적 통일이야말로 건강한 영적 성숙의 시금석이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성숙의 궤적을 고린도전서 13장의 심오한 통찰을 통해 더욱 정교하게 그려낸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는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현재적 앎이 지닌 근원적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온전한 앎을 향한 종말론적 희망을 품게 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인식의 주체성에 관한 놀라운 신학적 전회를 보여준다. 우리가 주를 온전히 알게 되는 그 궁극적 지점은, 우리의 인식 능력이 극대화된 결과가 아니라, ‘주께서 먼저 나를 아셨다’는 피조물로서의 본질적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깨닫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이는 요한일서 4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는 말씀의 인식론적 번역과도 같다. 우리의 앎과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제적(a priori) 앎과 사랑에 대한 응답적 메아리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자신의 사랑의 근거가 자기 자신이 아닌, 자신을 이미 알고 사랑하시는 주님께 있음을 투철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안다’는 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마침내 온전히 깨달아, 그 사랑의 힘으로 나 또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것이다’라는 관계적 앎의 최상급 표현이다. 이처럼 장재형 목사에게 있어 영적 성장이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관계가 심화되는 과정이며, 교회의 성숙이란 이 사랑의 네트워크가 공동체 전체를 견고하게 직조해 나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영적 성숙의 여정을 거부하고 정체된 상태를 장재형 목사는 ‘어린 아이’라는 은유를 통해 날카롭게 진단한다. 여기서‘어린 아이’는 발달 과정의 자연스러운 한 단계가 아니라, 성장을 멈춘 비정상적 상태, 즉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할 능력이 결여된‘영적 유아기(spiritual infancy)’에 고착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거구의 성인이 유아적인 행동을 하며 부조화의 극치를 보였던 개인적 경험을 소환하여, 영적 성장이 결여된 신앙이 얼마나 기형적이고 부자연스러운지를 생생하게 환기시킨다. 히브리서 5장의 경고처럼, 마땅히 진리의 교사가 되어 단단한 식물을 섭취해야 할 성도가 여전히 젖병에 의존하고 있다면, 이는 지각을 사용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영적 연단을 게을리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성숙한 신자는 베드로전서 3장의 권면처럼, 세상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물을 때, 온유와 두려움으로 그 이유를 변증할 수 있는 지적·영적 준비를 갖추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는 복음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아는 일’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하는 대목이다.

영적 유아 상태에 머물 때 발생하는 필연적인 위험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상대주의와 무수한 정보의 소음 속에서 이 말씀이 갖는 현대적 적실성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진리의 말씀 위에 굳건한 닻을 내리지 못한 영혼은 시대의 사상과 이단의 교설이라는 파도에 속절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는 ‘속임수’를 의미하는 헬라어 ‘쿠비야(κυβείᾳ)’가 주사위 던지기, 즉 도박판의 사기 기술에서 유래했음을 설명하며, 세상이 얼마나 교활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신자들을 미혹하는지를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 영적 혼돈 속에서 중심을 잡고 항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통일을 통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라는 견고한 인격의 배를 구축하는 것뿐이다.

궁극적으로 교회의 성장은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는 말씀으로 수렴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성장의 방향성(그리스도를 향하여), 방법론(진리의 실천), 그리고 필수 환경(사랑 안에서)을 통합적으로 제시한다. 진리와 사랑은 기독교 영성에서 분리될 수 없는 두 날개와 같다. 사랑이 배제된 진리는 차가운 독단과 율법주의로 전락하며, 진리가 결여된 사랑은 무원칙한 감상주의와 종교다원주의로 흐를 수 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 행할 때,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균형 잡힌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가 상징하듯, 가지된 교회의 모든 생명력과 성장의 동력은 나무이신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서 비롯되며, 그 연합의 본질적 수액은 바로 ‘사랑’이다. 에베소서 4장 15-16절은 이 유기체적 교회론의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온 몸이 각 마디, 즉 성도들의 유기적 연결망을 통해 생명력을 공급받고, 각 지체가 자신의 고유한 기능과 분량대로 역사할 때, 몸 전체가 자라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건축해 나간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역동적인 교회의 이미지를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 환상과 겹쳐 보여주는 탁월한 성경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죽음의 골짜기에 흩어져 있던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생기, 즉 성령의 임재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생명을 얻어 ‘심히 큰 군대’로 재탄생하는 이 환상은, 바로 성령의 능력으로 흩어진 개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연합하여 세워지는 신약 시대의 완벽한 예표라는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사랑의 힘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지체들 간에 서로를 세워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스스로를 세워가는 역동적인 생명 공동체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결국, 이 시대의 마른 뼈와 같은 무기력한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성령의 생기 안에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위대한 군대로 세워지라는 강력하고 희망에 찬 예언적 선포로 귀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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